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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수교 50주년, 상월결사 인도순례] 한반도 찾아 온 인도의 전법승들

인도 전법승 영향력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풍성한 불교문화 양산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오빠 장유화상이 인도 출신 1호 전법승
‘삼국유사’에 “서역 명승들이 이 땅에 한 집안 만들었다” 기록
고려 말 도래한 제납박타, 나옹무학 더불어 ‘삼화상’으로 존숭

인도와 동아시아는 불교를 매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국의 구법승들이 중국을 넘어 인도로 갔듯 인도의 고승들이 직접 한반도에 와서 불법을 전하고 일으켰다.
기록에 따르면 불교는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 혹은 남방 해양을 통해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중국 북방 육로를 통해 전해졌다. 지루가참(支婁迦懺), 지겸(支謙), 축법란(竺法蘭), 구마라즙(鳩摩羅什), 순도(順道) 등은 서역 승려이다. 순도는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반하여 불도징(佛圖澄), 달마(達磨), 지공(指空) 등은 천축국 즉, 인도승이다. 이 글은 고대부터 조선시기까지 서역승이 아닌 한반도를 찾은 인도 고승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다듬어 보고자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 1세기 무렵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오빠인 승려 보옥 장유(長遊)화상이 함께 왔다. 바로 이분이 한반도에 온 첫 번째 인도 스님인 셈이다. 허황옥이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이나 관련 쌍어문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섭불연좌석이나 황룡사장육상 등도 인도에서 해양으로 온 사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까지 남방 해양설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양고승전’에 동진의 고승 하남 태생인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생전에 고구려의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한국불교 1700년 역사의 시작이며 불교의 초전 기록이다.

인도를 포함한 서역 인식은 불교의 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동진의 법현(法顯)과 당의 현장(玄奘, ?~664)이 인도에서 구법하고 돌아오자 중국 승려들 사이에서는 인도 구법이 유행했다. 예컨대 의정(義淨, 635~713)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내용을 보면 신라 승려 7인, 고구려 승려 1인이 포함되어 있다. 의정보다 50년 후에 혜초(慧超, 704~787)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인 5천축국을 여행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구법 승려는 많았으나 신라의 승려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처럼 대부분은 귀환하지 못한 채 인도에서, 혹은 귀국 도중 서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역 구법승 가운데는 이름을 남긴 승려들도 있지만 무명 구법승이 더 많았다. 구법승들은 인도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불경을 가지고 오는 등 교류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삼국유사’ 홍법편에서는 “서역의 명승들이 이 땅에 오니, 삼한을 병합해 한 나라가 돼 온 세상을 합하고 한 집안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신라 불교에 초전한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인도 또는 서역 승려로 추정된다. 백제에 불교를 초전한 것은 384년 인도 북부의 간다라에서 온 마라난타(摩羅難陀)이다. 그는 그 이듬해 한산주에 절을 창건하고 10인을 출가시켜 득도시켰다. 백제의 겸익(謙益)은 배를 타고 인도에 유학 갔다. 526년(성왕 4) 인도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율부를 연구하고 531년 ‘아비담장’과 ‘오부율’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倍達多) 삼장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흥륜사에 있으면서 고승 28인과 함께 ‘오부율’ 72권을 모두 번역했다. ‘오부율’이 처음으로 완역되었는데 중국보다 1세기 앞선다. 그 후 배달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신라 고승 안홍(安弘, 혹은 安含)이 601년(진평왕 2) 수나라로 유학갔다. 605년에 신강 남부에 있었던 우전 출신 비마라(毗摩羅)와 농가타(農伽陀), 중인도의 마두라의 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했으며, 밀교 경전인 ‘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53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인도에 구법했다가 불경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하였고, 18세기에 쓰여진 ‘운악산현등사사적’에 의하면, 540년(법흥왕 27) 인도승 마라가미(摩羅訶彌)가 왔을 때 현등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시기에는 인도와 서역에 직접 구법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으며, 고려 초의 마후라(摩㬋羅)와 실리바일라(㗌哩嚩日羅), 고려 말의 지공(指空, 蘇那的沙野, 순야디샤)과 달마실(達摩悉) 등 고승들이 참방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후삼국 통합을 전후하여 인도의 두 승려가 고려에 참방했다. 929년 6월16일 인도승 삼장법사 마후라(摩㬋羅)가 고려에 도착하자 태조가 의장을 갖추고 맞이했으며, 그 이듬해에 개경 구산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구산사는 929년에 송악산 소격전 동쪽에 창건된 사찰로, 마후라를 위해 창건된 사찰인 듯하며 ‘나한삼장이 주석하여 불법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라고 한다. 이에 나한은 삼장법사 마후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도 홍범대사(弘梵大師) 실리바일라(㗌哩嚩日羅)도 마갈타국 대법륜보리사의 승려다. 그는 화복(火卜)을 잘하였는데, 후진에 머물다가 고려에 왔다. 후진의 고조에게 고려와 발해가 혼인한 사이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협공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938년(태조 21) 3월 개경에 ‘갈마단경’을 가지고 와 밀교 의식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구산사에서 주석했으며, 고려 승려 지종(智宗) 등이 제자였다. 개경의 10대 사찰인 사나사에 머물다가 귀국했다고 한다. 지종은 구산사 주지를 역임한 체관(諦觀)을 중국에서 만난 듯하며, 지종과 함께 중국에 유력한 진관 석초(眞觀 釋超)도 구산사 주지를 하게 되는 등 천태종과 밀접했다. 진관을 비롯한 고려 선승들에 의한 법안선의 수용은 곧 천태학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켰다.

지공은 1326년(충숙왕 13) 3월부터 1328년 9월 무렵까지 2년 7개월 간 고려에서 유력 및 교화하였다. 그의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 Dhyānabhadra)로 선현(禪顯)이라는 의미이며, 호는 순야디샤(蘇那的沙野, Śūnyādiśyā)로 번역하면 지공(指空)이다. 그의 선조는 부처님의 숙부인 인도 마갈타국 왕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8세에 출가해 인도의 전역을 돌며 수행했다. 티베트를 거쳐 수년간 사천과 운남의 조변사, 용천사, 정속사에 머물렀으며, 양자강과 대운하를 거쳐 북경에서 머물렀다. 지공은 고려에 도착해 금강산 유점사, 양산 통도사, 개경 연복사, 장단 화장사 등지를 유력하며 교화했다. 그런 후 원나라의 북경으로 다시 돌아가 교화하다가 입적했다.

그가 개경에 도착하자 고려인들은 “석존이 다시 태어나 먼 곳으로부터 왔으니 어찌 찾아뵙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석가모니의 환생으로 불렸을 뿐 아니라 달마대사가 왔다고 여겨졌다. 그의 불교신앙은 승속에 영향을 끼쳤다. 묘덕과 나옹을 비롯해 석호(釋瑚), 송월헌(松月軒), 옥전 달온(玉田達蘊), 동암 달순(同菴達順), 본적 달공(本寂 達空)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고려말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여말삼사 나옹 혜근과 문도인 무학 자초와 축원 지천 그리고 백운 경한 등이 추종하였다. 나옹과 무학은 원나라의 북경 법원사에서 불법을 인가받고 지공과 나옹, 무학으로 이어지는 삼화상의 연을 맺은 바 있다. 그가 터를 잡은 삼산양수의 땅인 양주 회암사를 인도의 날란다사 터를 본떠 중창불사 하게 되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초 무학의 제자인 진산과 기화, 그의 문도(손)들이 조선 전기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며, 조선초 이후 현재까지 삼화상은 불교계 최고의 증명법사로 존숭되고 있다. 그리고 고려말 인도 승려 달마실(達摩悉)이 와서 태고 보우와 교류하였다.

조선 시기에는 인도승을 포함하여 서역승의 흔적을 문집류에서 찾을 수 있다. 16, 17세기에 이르러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청음집’에 언급되는 요동승 삼장은 요동지역에서의 전란을 피해 조선에 와서 영주 부석사에 머물렀던 듯하다.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인 ‘계곡집’에 서역승려와 함께 결사를 했다고 한다. 김육(金堉, 1580~1658)이 쓴 ‘잠곡유고’ ‘천성일록’이나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연경재집’ 성거산조에는 서역승 법달(法達)이 살았다는 ‘법달굴’이 있으며 허목(許穆, 1595~1682)의 문집 ‘기언’에는 경기도 포천 백운산에 ‘서역의 승려 석민(釋敏)의 부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인도와 서역 출신의 전법승들이 적지 않았겠지만 기록에 보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백제에 불교를 초전한 마라난타와 불교경전을 번역한 배달다 삼장, 안홍과 신라에 함께 온 마두라의 불타승가, 그리고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540년 가평 현등사를 창건했을 당시 온 마라가미 등이다. 특히 고려 초의 실리바일라는 밀교 사상 및 천태사상에 영향을 끼쳤고 고려 말에 온 지공은 나옹·무학과 함께 삼화상으로 존숭되며 조선시대 증명법사로 우리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 신라말 이래 한국 불교계가 중국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가운데에도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인도 승려들이 한반도에 참방해 한국불교에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특히 배달다와 마후라는 불교의 학식과 덕에 뛰어난 삼장(三藏)법사로서, 석가족의 108대 후손이었던 지공은 중국화된 우리 불교에 원시불교의 경건성을 다소 지니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인도 사상과 문화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를 통해 우리 문화는 더욱 풍성하고 깊어질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전법에 나섰던 위대한 고승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황인규 동국대 역사학과 교수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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