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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수교 50주년, 상월결사 인도순례] 인도로 간 한반도의 구법승들

불교 쇠락하던 천축에 등장한 구법승, 그 모습 자체로 전법행이었다

‘부처님나라’ 기대했던 신라 혜초 스님, 불교 쇠락 모습 실망도
8세기 인도 대부분 지역 힌두교 확산되며 스님 보기 힘들어져
오늘 날 인도순례, 구법인 동시에 전법이었던 역사 계승일 것

한반도의 많은 구법승들에게 구법의 목적지였던 날란다사원.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수학하길 희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한반도의 많은 구법승들에게 구법의 목적지였던 날란다사원.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수학하길 희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고대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교류에는 일정기간 동안 방향성이 있고 그 기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써클(circle)처럼 교류를 통해 영향받은 문화가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이 ‘내 것’이 된다. 그리고 문화가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에 가장 큰 파동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사람이다. 

오늘날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으로 인도를 간다고 해도 꽤 긴 시간의 비행을 상상하며 “힘들겠다”는 말을 먼저 한다. 지금의 교통수단에도 불구하고 일단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여정이 무척이나 고되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 옛날에 비하면 상상도 못할 만큼 시간을 단축시켰음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1300여년 전에는 어땠을까? 뱃길을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달리다가 걷기를 반복하는 그런 시간을 보내야만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해보자면 10명이 함께 출발하면 한두 명 살아남을까 말까하는 그런 길인 것이다. 

700년대 신라에서 부처님 법을 접하고, 10대의 나이에 달랑 바랑 하나 짊어진 채 이 먼 길을 출발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혜초(慧超) 스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혜초 스님은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천축국, 즉 인도에 대한 기행문을 남기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iot)가 돈황 장경동의 왕원록에게 ‘왕오천축국전’을 사들여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초 스님은 신라인으로서 인도에 간 구법승이라는 타이틀만 강하게 남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 스님이 아닌, 순례자로서의 혜초 스님은 어땠을까? 

사춘기를 막 보낸 나이 즈음의 혜초 스님이 처음부터 인도 구법을 목표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명주(지금의 절강성)와 광주에서 수학한 후에 스승의 권유로 중국을 출발해 인도로 떠난다. 길을 떠날 당시 혜초 스님은 인도에 대해 아마도 부처님의 나라인 만큼 융성한 불교국가라는 상상을 하셨을 테다. 그러나 8세기 북천축(北天竺)과 중앙아시아를 빼면 사실 힌두교에 흡수된 불교는 생명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던 때였다. 

바닷길을 따라 불서(佛逝:현재의 수마트라)와 사자주(師子州:현재의 스리랑카) 등을 거쳐 인도에 도착했을 때, 남인도 불교는 힌두교에 힘겹게 대응하던 때이며 서서히 쇠락하고 있는 단계였다. 서인도는 15개국 가운데 12개국이 이미 외도가 성행하고 있었고, 동인도와 중인도, 특히 부처님 탄생지와 열반처까지 모두 황폐화되어 단 한 명의 승려도 찾아보기 힘든 때였다. 혜초 스님의 실망감은 글 속에서도 느껴진다. ‘왕오천축국전’은 사실만을 기술하는 방식의 글이라 사사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녹야원, 구시나[쿠시나가르], 사성[왕사성], 마하보리[부다가야] 등 4대 영탑[불생처, 득도처, 전법륜처, 반니원처]이 마가다국 영역 안에 있다는 소개와 함께 혜초 스님은 “급기야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에 도착하고 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무척 기뻤다”는 감정을 처음으로 표현한다. 감정 표현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곧바로 오언시로 남긴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읊으셨다. 출발할 때의 다짐, 그동안의 여정에 있었던 고난, 인도에서의 실망감, 부처님의 흔적을 본 순간의 환희심을 느낄 수 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만 근심할 뿐/ 업연의 바람 몰아쳐도 개의찮네. 
여덟 탑을 친견하기란 실로 어려운데/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내 마음을 간단히 적는 글-

혜초 스님 이전에도 인도로 구법을 위해 떠난 스님들이 있다. 불교가 흥성할 때의 구법에도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불교가 쇠락할 때에 인도로 간 혜초 스님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구법이자 전법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가 국교로 자리 잡고 있는 인도에서 스님의 모습은 상당히 불편한 존재였을 테고, 그 속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일은 여정으로 지친 몸을 이끄는 것보다 더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천축을 순례했던 것이다. 그리고 혜초 스님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순례 동안 당시 인도사람들에게 ‘불교’를 한번쯤 되새기는 시간을 제공한 셈이다. 

부처님의 나라이지만 생김새, 사용하는 말, 먹는 음식, 심지어는 대소변을 보는 일까지 ‘다름’으로 가득하니 순례하는 동안 혜초 스님의 외로움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외로움과 고됨 역시 수행으로 여기셨을 그 순례길이 더욱 애잔하고 스님의 마음은 남기신 시구절로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베트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신라]으로 날아가리.-남천축국 길에서-

2023년 새해는 한국·인도 양국이 수교를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의 국명으로 행정적인 절차를 거친 관계성을 따져본 햇수가 50일뿐,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관계성은 사실 30배가 되는 1500년이 넘는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불교’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양국의 관계는 불법을 전파하고, 불법을 구하기 위해 교류했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전법승(傳法僧)과 구법승(求法僧) 어느 한쪽도 고난의 길을 걷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불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발걸음도, 불법을 조금 더 알고자 또는 부처님 나라에 직접 가보고자 했던 발걸음도 모두 절실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절박한 심정을 지니고 과거의 길마다 계셨던 혜초 스님과 같은 분들이 이루어낸 양 국가의 관계성은 단순한 행정절차로 맺어진 관계 이상의 것이다. 다른 민족·다른 환경과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뛰어넘을 수 있는 심리적 공유와 소통이라는 부분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을 통해, 문화를 통해 이루어진 관계가 갖는 의미는 아마도 불교가 쇠퇴한 시점에 인도 땅에 도착했지만 그 속에서 부처님의 흔적에 환희심을 느끼는 혜초 스님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찾고자 하는 것을 비록 쉽게 찾을 수 없더라도 불제자였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고, 불제자였기 때문에 다른 종교 속에서 나아갈 길을 꿋꿋하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절대적 시간개념이 때론 상대적 시간개념으로 시대마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혜초 스님께서 구법을 위해 절 문을 여는 그 순간의 시간과 지금 불교중흥을 위해 절 문을 여는 순간의 시간적 개념은 다르다. 과거와 현재에 느끼는 시간의 개념은 확연히 다르다.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획기적인 이동 수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빠른 지금 시대에 인도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과거에 비해 ‘고작’ 하루지만 상대적 시간개념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먼 거리임은 분명하다. 

새해에는 인도순례길이 열린다. ‘사람과 불법을 향한 길’에 나서는 것은 혜초 스님께서 구법을 위해 올랐던 순례길의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역사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의 시점에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혜초 스님이 처했던 환경과 지금의 환경이 다르지 않다.

부처님의 나라이지만 지금은 불교가 아닌 힌두교의 나라 인도. 혜초 스님께서는 구법을 향한 순례길을 떠났고 그 결과 문화적 대형 써클이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불교를 부처님의 나라에 다시 중흥시키기 위한 전법의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지 1700여년이 지난 바로 오늘, 교류의 의미로 본다면 인도순례단의 사부대중은 제2의 혜초 스님이 되어 다시금 거대한 문화적 써클을 만드는 첫 단추를 끼는 순례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한지연 동국대 불교사회 문화연구원 교수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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