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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수교 50주년, 상월결사 인도순례] 사찰 문화재 속 인도

삼국·통일신라 시기 등장한 사찰 모습은 ‘인도문화테마파크’

당간지주·일주문·탑은 인도의 석주·토라나·스투파와 닮은꼴
편단우견 석굴암 본존불은 보드가야 봉안 부처님 모방 조성
불교문화재 곳곳서 인도 흔적…수교 50년은 긴 교류의 열매

한국·인도수교 50주년이라고 하지만, 두 나라의 문화적 교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단순히 불교가 우리 땅에 전래된 것뿐 아니라, 실제로 인도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 같은 분이 백제 땅을 밟았으니, 간접적인 교류를 넘어 직접적인 교류라고 할만하다. 물론 근대적 의미에서의 공식적인 수교는 아니었겠지만, 이후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수많은 사원을 건립한 것을 보면 이들 사원이 일종의 인도문화원이나 인도대사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중국의 스님에게 불교를 전해 받은 고구려나, 그러한 고구려 불교교단의 스님을 통해 불교를 전해 받은 신라와 달리 백제에는 서산마애불이나 태안마애불의 도상처럼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상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와의 직접적인 교류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나아가 백제처럼 인도불교를 직접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삼국의 불교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인도만 만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인도와 직접 만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사찰 곳곳에 스며있다. 우선 사찰에 다가갈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당간(幢竿)이나 당간지주부터가 그렇다. 이들 당간에는 원래 깃발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이 전체를 ‘당’이라고 했고, 이곳부터가 사찰의 영역임을 알리는 의미였다. 이렇게 당을 세워 영역을 표시하는 전통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인도의 아쇼카왕이 중요한 불교성지에 돌기둥, 즉 석주(石柱)를 세웠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 위에는 사자조각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 위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두 기둥이 모두 각각의 문화에서 왕을 상징하는 동물을 올려놓음으로써 그 장소가 부처님의 법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공통점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의 양상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당을 세우는 전통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문화가 가장 국제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사찰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주문에도 역시 인도의 문화가 담겨있다. 인도에서는 스투파나 불교석굴의 입구에 ‘토라나(Torana)’라는 문을 세웠는데, 두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일주문과 유사하다. 특히 석굴암 본실의 입구에 위치한 두 기둥은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에 들어가서 바라보면 윗부분의 모습이 실제 인도 산치탑의 토라나와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은 인도에서는 ‘스투파(Stupa)’라고 불리며 둥근 반원형의 형태로서 발우를 뒤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복발탑(覆鉢塔)’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탑은 이런 둥그런 형태가 아니라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누각 형식을 하고 있다. 때문에 인도의 스투파와는 다른 모습이어서 인도와의 연관성을 언뜻 생각하기 어렵지만, 알고 보면 우리나라의 탑 형태는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당에서 기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던 장소인 보리수 앞에 세워진 이 기념비적 사당은 부처님의 사리 대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불교도들은 이 성스러운 깨달음의 장소를 자신들의 나라로 옮겨오고자 했고, 그 결과 이러한 형태의 기념비들이 스투파를 대신하여 불탑의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하보디 사당 역시 원래는 목조건축이었다가 후에 석조로 개조되었다고 하니,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목탑은 특히나 고대 마하보디 사당의 원형에 더 가까운 기념비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팔상전 안에는 중심의 기둥에 돌아가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걸려 있는데, 이러한 배치 역시 인도 불탑에서의 예불방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인도의 스투파들은 그 하단부나 스투파를 둘러싸고 있는 돌로 만든 울타리인 ‘베디카(Vedika)’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묘사한 불전도(佛傳圖)를 돌아가며 배치하여 탑돌이를 할 때 이 이야기들을 읽어나갈 수 있도록 했는데, 팔상전과 그 안의 팔상도 역시 이러한 탑과 불전도의 관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은 그 어떤 성보문화재보다도 인도로부터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이 결하고 계신 손모양(手印)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동아시아에 전해진 인도의 오래된 전통 ‘무드라(Mudra)’의 영향이다. 이 무드라는 원래 불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의 연극이나 무용에서 의사 전달을 돕는 중요한 손짓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손짓으로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지 표현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도의 오랜 전통이었다. 특히 부처님이 가사를 입고 계신 방식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형식은 아마 동아시아 사람들에는 매우 파격적인 옷 입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몸을 드러내는 것을 지극히 꺼려했기 때문에, 그것도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 몸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해진 이후에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다가 통일신라시대 이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 얼굴과 손 외에 몸 자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된 계기도 결국 인도로부터의 영향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불상으로 가장 대표적인 불상이 경주 석굴암의 본존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은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던 부처님을 같은 크기로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는 이런 경우 대체로 부처님이 보관을 쓰고 목걸이와 같은 장엄을 한 부처님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하보디 사당의 부처님이 가슴 부분에 미완성으로 남겨진 부분이 있어 사람들이 이를 목걸이 등을 걸쳐 가려두었던 것을 그대로 조각으로 표현했기 때문인데, 석굴암의 본존 부처님은 이런 장엄을 걸치지 않고 있어 차이가 있다. 아마도 신라의 조각가들은 이러한 장엄들이 미완성된 부분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을 뿐 원래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고, 일부러 장엄은 제거한 채 온전한 불상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신라의 조각가들이 인도의 원형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상의 광배에는 작은 부처님들이 분신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를 ‘화불(化佛)’이라 한다. 이 역시 인도의 전통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인도에서는 신적인 존재가 스스로 신임을 보여줄 때 이러한 분신을 나타내어 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분신을 인도말로 아바타르(Avatar)라고 불렀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의 제목 ‘아바타’의 어원이기도 하다. 신은 많은 아바타르를 통해 그를 추종하는 신자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이렇게 불교 문화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동물들에서도 우리는 인도의 흔적을 읽어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사자 대신 해태라는 상상의 동물이 있었고, 코끼리는 중국 남부지역에서 고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해태가 아닌 사자로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으며, 코끼리 역시 장기판의 상(象) 외에는 거의 불교에서만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찰에서는 주로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사자, 보현보살이 타고 있는 코끼리로 등장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는 사자후나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六牙白象)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동물로서도 그 의미가 크다.

이와 같은 모습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로 돌아가서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본다고 가정을 해보면 절이라는 곳이 얼마나 이국적인 곳으로 느껴졌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마치 개화기에 서양식 건축인 명동성당이 이국적 모습으로 금방 눈에 띄는 존재였다면, 고대에는 이러한 인도풍의 건축과 불상, 이국적 동물조각들로 가득 찬 사찰이 얼마나 신기하게 느껴졌을지 짐작이 간다. ‘인도문화 테마파크’와도 같은 사찰에서 그들은 머나먼 서쪽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마치 우리 곁에 모시고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불교도에게 한·인 수교 50주년은 그 긴 교류의 역사를 통해 맺은 열매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주수완 우석대 교수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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