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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요람지’ 주어사 성지화 제동

  • 사회
  • 입력 2023.06.29 22:29
  • 수정 2023.07.01 20:14
  • 호수 1687
  • 댓글 8

산림청, 연장계약  체결 안 해
“배려 공간서 갈등 공간” 변질
가톨릭 점유로 절터 훼손 심화

여주 주어사지 전경. [불교문화재연구소]

산림청이 한국 가톨릭계가 40년 간 여주 주어사지를 점유하도록 했던 ‘분수림 설정 계약’을 중단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에 따라 불교색을 지우고 주어사지를 ‘한국천주교회 요람지’로 만들려던 한국 가톨릭계의 성지화 계획에도 제동이 걸렸다.

법보신문이 최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산림청은 지난해 3월14일을 끝으로 40년 간 이어온 재단법인 천주교한국순교복자수도회 유지재단과의 ‘분수림 설정 계약’을 종료했다. 분수림 계약은 산림청이 산림자원 보존 및 활용을 위해 민간단체 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민간 단체가 국유림에 나무를 심은 뒤 20~30년 후 산림자원 생산으로 수익이 생기면 10분의 1은 산림청이, 10분의 9는 민간단체가 갖는 방식이다. 

주어사지 한가운데 꽂혀 있는 안내 간판. '천주교 강학회 장소'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법보신문 DB]
주어사지 한가운데 꽂혀 있는 안내 간판. '천주교 강학회 장소'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법보신문 DB]

천주교한국순교복자수도회는 1982년 3월15일 산림청과 주어사지가 포함된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산106 일대에 잣나무 3만3000본을 심겠다는 ‘분수림 설정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가톨릭계가 산림자원 보존을 위해 이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고, 실은 주어사지를 성지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실제 가톨릭계는 이 계약 전후로 주어사지를 둘러싼 앵자봉 인근 토지를 대거 매입한 것은 물론, 산북성역화위원회 주도로 성당 신자들을 동원해 매주 주어사 터에서 미사를 보는 등 종교행사를 꾸준히 열어왔다. 또 2015년부터는 옹청박물관 주어사지 순례원의 주도로 도보 순례를 100회 이상 진행했고,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직접 주어사 강학 역사를 알려 나갔다. 특히 ‘주어사 성지’ 안내간판과 천주학자 모습으로 만들어 둔 포토존 등을 설치하며 이곳이 가톨릭 성지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시대 주어사는 스님들이 초기 가톨릭 신자들을 도운 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톨릭계의 일방적 성지화로 200여년 전 종교 간 화합의 공간이 갈등의 장소로 변질됐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불교계와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2014년 9월, 조계종 제2교구신도회가 주어사지로 오르는 길목에 연등을 달자 천주교 수원교구 산북성당과 산북성역화위원회가 이를 제거하라고 요구해 갈등을 빚었다. 

한국 가톨릭계의 주어사지 성지화 계획에 지자체의 묵인과 협력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여주시는 2009년 주어사 터에 대한 지표 및 학술 연구조사한 뒤, 2011년 5월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주어사는 정조 3년(1779) 녹암 권철신(1736~1801)이 정약전(1758~1816) 등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천주교 강학을 했던 장소로 ‘한국 천주교 발상지의 요람지’다. 우리 군(당시엔 여주군)은 이런 주어사지의 역사적 의미를 알려 많은 등산객과 성지순례자들이 찾는 명소로 만들고자 지난해 돌 계단 및 로프, 난간 등 탐방로를 정비한 데 이어 안내간판을 설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여주시는 한발 더 나아가 2012년 7월 주어사지를 ‘여주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했다. 

여주군이 각 언론사에 배포한 2011년 5월21일 보도자료. 주어사가 '우리나라 천주교 요람'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캡처]
여주군이 각 언론사에 배포한 2011년 5월21일 보도자료. 주어사가 '우리나라 천주교 요람'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캡처]

그러나 정작 주어사지가 한국 천주교 발상지인지에 관해선 학계에서도 이견이 많다. 일반적으론 1784년 초 청나라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한성부 남부 수표교 이벽의 셋집에서 집단적 세례의식을 거행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됐다고 보고 있다. 반면 주어사가 서학 강학의 장소였다는 근거는 정약용이 쓴 권철신과 정약전 묘지명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 가톨릭계는 남상철(1891~1978)이라는 인물이 1962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경향잡지’에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 발견 됨’이라는 글을 계기로 주어사 성지 개발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남상철이 1962년 11월 '경향잡지'에 게재한 글. 오른쪽 사진은 남상철(1891~1978). [법보신문 DB]
남상철이 1962년 11월 '경향잡지'에 게재한 글. 오른쪽 사진은 남상철(1891~1978). [법보신문 DB]

이런 가운데 1973년 11월 오기선·박희봉 신부가 주어사지에 있던 ‘해운대사 의징비’를 서울 잠두봉(절두산 순교성지)으로 무단 반출했고, 다시 10년 뒤인 1982년 천주교한국순교복자수도회가 산림청과 주어사지 분수림 설정 계약을 맺으면서 주어사지 가톨릭 성역화에 본격 나섰다. 그러나 60년 간의 성지화에도 주어사지가 ‘한국 천주교 발상지’라는 근거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73년 오기선·박희봉 신부에 의해 주어사에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잠두봉(절두산순교성지)으로 무단 반출된 ‘해운대사 의징의 승탑비’. [법보신문 DB]
1973년 오기선·박희봉 신부에 의해 주어사에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잠두봉(절두산순교성지)으로 무단 반출된 ‘해운대사 의징의 승탑비’. [법보신문 DB]

반면 최근 주어사지가 17~19세기 조선시대의 주요 사찰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물들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5월 시굴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주어사지에서 조와이주신(造瓦以主信) 글씨가 있는 기와와 고대 인도문자인 범자(梵字)가 찍힌 암막새 조각, 백자 조각, 상평통보 등이 발견됐다. 본존불을 모신 건물인 금당 등 건물터 유적 3동도 확인됐다. 

김진덕 불교문화재연구소 팀장은 “범자 암막새는 불교 유물이므로 산속에 있는 이곳은 분명 절터이다. 일반가옥이나 관아 건물에선 사용하지 않는 막새편”이라며 “출토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절의 규모도 작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김진덕 불교문화재연구소 팀장이 주어사지에서 발굴된 불교 관련 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법보신문 DB]
김진덕 불교문화재연구소 팀장이 주어사지에서 발굴된 불교 관련 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법보신문 DB]
여주 주어사지에서 나온 범자(梵字) 암막새 조각. [불교문화재연구소]
여주 주어사지에서 나온 범자(梵字) 암막새 조각. [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 가톨릭계가 주어사지를 점유하면서 절터였던 주어사지의 훼손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톨릭계가 ‘분수림 설정 계약’에 따라 절터 내부에 수많은 잣나무를 심고, 이 잣나무가 우후죽순 뿌리를 내리면서 심각한 형질 변형이 일어났기 때문. 불교문화재연구소장 제정 스님은 “나무들이 30~40년 동안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훼손된 축대가 적지 않다.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87호 / 2023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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