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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스님 주장에 공감하는 세 가지 이유

기자명 법보신문

손석춘 교수, 본지 칼럼서 제기
교육원장 주장 충격일 수 있지만
현실에 대한 뼈아픈 내부 성찰

재가불자, 스님들 ‘감시’ 못지않게
반불교적 현실 바꾸는 것도 중요

교육원장 제언에 ‘꼬집기’보다
사부대중이 문제의식 공유하길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최근 ‘깨달음과 역사’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고 주장해 큰 논란이 일고 있다. 초기불교 전공자인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와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이 법보신문 기고를 통해 현응 스님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손석춘(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법보신문 논설위원이 칼럼에서 현응 스님 입장을 지지해 눈길을 끌었다. 손석춘 교수는 한국경제신문·동아일보·한겨레신문 기자, 방송위 심의위원 등을 지냈으며, 한국기자상, 한국언론상, 민주언론상, 통일언론상,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신문 읽기의 혁명’ ‘새로운 독재와 싸울 때다’ ‘무엇을 할 것인가’ 등 많은 저술이 있다. 편집자

▲ 손석춘 건국대 교수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발제가 화제다. 그럴 만도 하다. 듣는 이들에 따라선 ‘충격’을 받았을 터다. 이미 비판 글들도 곰비임비 나왔다. 토론은 좋은 일이다. 되새김질할 가치가 있는 글은 더 그렇다. 다만, 민망스런 비난도 보인다. 더러는 치기마저 묻어난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는 꼴 아닐까.

명토박아두거니와, 나는 현응 스님과 특별한 관계가 없다. 한차례 인연은 있다. 싸잡아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교육원은 과거보다 체계가 잡혀가고 있다. 그럼에도 교육원장이 새삼 공개강연을 열며 나누고 싶은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 제언으로 재구성해본다.

첫째, 산중불교의 전환이다. 조계종단 2000여명의 스님들이 하안거와 동안거로 1년에 절반을 선원에서 수행한다. 그런데 스님은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하여, 묻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평생을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가? 이 물음을 교육원장이 던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물음이다. 스님은 깨달음을 “모든 존재들의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간명하게 정리한다. 깨달음이 “엄청난 도그마가 되어 이젠 수행자도, 그 집단들도 통제 불능한 권위가 되어 천년, 이천년을 흘러가는” 현실에 대한 내부 성찰이다. 산문에 들어가 젊음을 던져 수행했는데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수행자들에게 스님이 보내는 ‘위로’ 또는 새로운 ‘제안’일 수 있다.

둘째, 전통불교의 전환이다. 좋은 문제 제기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현응 스님은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할 때, 그 깨달음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수준의 이해인가?” 묻는다. 문제 설정에 엿보이듯이 답은 부정적이다. 연기의 내용은 시대가 변하면서 그에 적용하기 위해 계속 바뀌어왔다. 그런데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7세기쯤에 그 변화가 멈추었다고 분석한다. 7세기 이후 오늘 이 순간까지 세상은 급변해왔는데 불교는 1400년 동안 기존 연기론의 수준에 머물었다고 개탄한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한다는 스님의 제안은 필자가 법보신문에 칼럼을 8년째 써오면서 펴온 주장과 상통하기에 더욱 공감한다.

셋째, 사부대중의 사회적 실천이다. 스님은 연기, 공, 자비와 같은 불교적 문제의식을 전제한다면 불교경전이 아닌 책들, 심지어 기독교도 “불교공부꺼리”라고 제안한다. 파격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울뚝밸이 치밀 터다. 하지만 그 이유도 적시한다. 불경 밖의 공부들이 불교의 연기와 공, 그리고 자비에 대한 이론을 대폭 확장시켜주고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서다. 딴은 삼라만상이 모두 ‘불경’ 아니던가. 보살은 “역사성으로부터 해탈의 자유를 담보하면서, 동시에 역사 속에서 목표를 세워 행하는 삶”이며 “그 삶은 누구보다 더 뜨거울 수 있고, 적극적이고 유연하면서 풍부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동감이다. 스님들 ‘감시’ 못지않게 불자로서 반불교적 사회현실을 바꿔가는 재가자들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이 절실하다.

그래서다. 종단 교육원장이 던진 제언에 ‘꼬집기’보다 사부대중이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면 싶다. 종단의 미래에 대해서도 대안 없는 날 선 비판보다는 종단 내부의 뜻 있는 스님들과 더불어 대안을 만들어가자는 호소로 내게 다가왔다면 지나친 ‘이해’일까. 세상이 그렇듯 조계종도 단숨에 바뀌지 않는다.

오래전에 적명 선사께 ‘해탈의 세계가 과연 있는가’를 여쭈었다. ‘일상에서라도 참선을 꾸준히 해보면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온다”는 답을 들었다. 세속에 머물고 있는 나는 ‘깨달음은 이해’라는 명제가 적명 선사의 권고와 어긋난다고 보지 않는다. ‘깨달음은 이해’가 던진 문제제기를 이해한다면, 구체적 실천의 영역에서 깨달음의 길은 다채롭지 않겠는가.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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