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어릴 때 양친 잃은 뒤19살 때 순천 송광사로 출가참선 매진하다 노장의 말에교학부터 배우겠다고 결심침굉 소개로 사제관계 시작1681년 태풍 때 중국배 표류나무궤짝마다 불경들이 가득성총 4년간 수집해 불서 편찬제자 무용도 스승 위해 참여조선불교 바꾼 획기적 사건“몸을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요 마음 인도하신 분은 스승님과 도반입니다. 여러 해 가까이 모시는 동안 듣지 못한 것을 들려주셨으니 그 은혜가 바다보다 깊건마는 그 보답은 티끌보다 못합니다. 사람이 일흔까지 사는 것이 예로부터 드물다고 말을 하지만 느닷없이 광언(狂言)을
13살 때 왜군 피해 절에 숨어왜군에 붙잡혀 적장에 끌려가칼날 앞에서 한시 써내려가자가토 기요마사 “범상치 않다”사명대사와 가까웠던 니쓰신이제자 삼아 출가시킨 후 지원일본에 피랍된 지 27년째에고국 아버지로부터 편지 받아부디 노력해 귀국할 것 권유일요도 꼭 돌아가겠다고 다짐권력자, 불허 방침 후 감시 강화끝내 귀국 못하고 일본서 입적“천만 뜻밖의 친서를 받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무사하시고, 금슬도 좋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봉서를 뜯고 읽으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처음 붙잡힌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향을 피우고 부
덕청 홀로 오대산에서 정진중요한 수행 전환점 맞을 때주굉이 찾아가 며칠 간 대화덕청, 두고두고 감사마음 전해주굉 정토로 떠난 지 2년 뒤덕청, 운서사로 찾아가 참배탑비명 쓰고 제자들에 법문덕청 죽은 뒤에도 육신 온전지금은 남화사 조전에 모셔“지난번 제가 오대산에 머물 때 스승께서 찾아오셔서 큰 자비심으로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그 후 스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갈수록 커졌습니다. 제가 오대산을 떠나 남쪽으로 만행을 떠났을 때 스님을 뵙고자 했으나 저의 업력이 동쪽 바닷가로 이끄는 바람에 부득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이곳(광동)에서 10
왜적 침입으로 나라 위기 처하자서산대사, 승병으로 나설 것 호소유정도 금강산서 150명 모아 참전평양성 탈환 등에 혁혁한 공 세워전쟁 뒤에도 일본 건너가 담판붙들려갔던 조선인 3000명 송환산중 머물던 정관은 승병에 부정적환속자 늘고 지계 풍토 해이 탄식유정에게 이제는 돌아올 것 요청일본 떠날 때는 무사귀환 기도“아아, 불법이 쇠하고 세상도 극히 어지러우니,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승려들도 편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더욱 슬픈 일은 승려가 속인의 옷을 입고 군사로 몰려 나가 동서로 쫓아다니면서 적의 손에 죽거나 속가로
25년간 관리 지내던 이탁오“따라 짖지 않겠다” 선언50대 중반부터 집필 작업공자 등 유학 노골적 비판여성차별·편견 잘못도 지적62살 때엔 승려의 삶 시작담연 출가도 이탁오 영향편지 주고받으며 교리문답불온서적 간행으로 투옥담연과 관계도 왜곡 음해감옥서 자결로 삶 마무리허균 등 후대에 큰 영향“혹독한 여름 더위를 넘기고 나면 바로 용호로 돌아갈 작정이다. 그곳에서는 오직 서방정토만을 주장하고 서방정토로 가는 공안만을 연마하며, 앞으로 더 이상은 소학생처럼 묵은 종이뭉치나 뒤적이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참선이 큰 일이기는 하나
금강산서 수행한 뛰어난 고승불경은 물론 사서삼경도 통달문정왕후 간곡한 요청 수락쓰러져가는 불교중흥에 진력승과 부활 및 선교양종 복구5000여명에게 정식 승려 길서산·사명당 등 인재도 발탁음해로 제주 유배 후 순교“이미 공문(空門, 승가)에 들었으니 크게 앓는 사람이 되고, 차라리 옳음을 위해 죽을지언정 헛되이 살지 말라. 평소 성현을 스승 삼아 행동하되, 추하고 어리석게 한 평생을 허비하지 말라.”신묵(信黙) 등 제자들은 스승 허응보우(虛應普雨, 1510~1565)를 참으로 희유한 존재로 여겼다. 사슴처럼 두려움이 많아 보이다가도
수양대군 시절부터 깊은 인연자존심 셌지만 신미에겐 깍듯세종 때 석보상절 같이 편찬수양대군 왕위에 오른 뒤에도신미를 스승으로 모시며 공경복천사 등 직접 찾아가기도신미도 세조 위해 상원사 중창“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총카파 질시하던 사캬파 학승‘현관장엄론’ 주석서 보고 감복31살의 총카파를 태양에 비유티베트 최고 고승 될 것 확신8살 때 동진 출가한 총카파는종파 넘나들며 현·밀교 공부‘보리도차제론’ 등 저술 통해새로운 티베트불교 만들어“태양과 같은 당신의 지혜가 떠올랐을 때 반야경과 ‘현관장엄론’이라는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제 마음의 오만함도 시들어버렸습니다. 심오하고 광대한 지혜의 보고(寶庫)에 경배합니다.”1387년, 사캬파의 유능한 번역관인 탁창로차와(sTag tshang lo tsa ba)는 총카파(Tson kha pa, 1357~
13살 때 양주 회암사로 출가19살 때에 화두 참선 시작목숨 건 수행으로 큰 깨달음원나라 건너가 석옥과 법거량임제법맥 잇고 가사 등 받아고려로 돌아와 불교중흥 매진공민왕도 전폭적인 후원·지지개혁 주창한 신돈과 큰 갈등82살에 가평 소설산에서 입적오늘날에도 조계종 중흥조 추앙 “(저 태고는 석옥 대화상을) 떠나온 뒤 하루도 우러러 사모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다음해 봄에 다시 나아가 종신토록 모시려 하오나 혹 업연(業緣)에 얽혀 원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한결같이 가르침에 의지해 나와 남을 이롭게 하
인도 마가다국 왕자 지공8살 때 부왕 치유 위해 출가나란다사원서 경율론 공부스리랑카에선 선적인 깨달음티베트 거쳐 원에서 교화행고려에 왔을 때 “석가” 칭송나옹 견성 후 중국에 가 친견지공에게 인가 받고 구법순례귀국 후 회암사 중창 등 앞장“방장실에 앉아 다과를 드니 이것은 변함없는 좋은 약이로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눈 밝은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1367년 겨울, 청평사에 머물던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원나라에서 온 보암(普菴) 장로에게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스승 지공(指空, Sunya
지방 호족 집안에서 태어나13살 때 정토종 계열로 출가부친 사망소식에 고향 갔다가환속해 결혼하고 자식도 낳아‘내 길은 수행’ 확신 후 재출가혹독한 정진 후 염불전법 나서평생 걷고 탁발하며 민중 교화죽을 때 “시신 동물에게” 유언“내 몸이 죽고 사는 무상의 도리를 자각하고 아미타불에 귀의해 단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른 뒤에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마음도 아미타불의 마음, 거동도 나무아미타불의 거동, 말도 나무아미타불의 말입니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목숨도 아미타불의 목숨, 죽어가는 목숨도 아미타불의 목숨입니다.”1274년 2
충렬왕 정책 비판한 이승휴파면 당한 후 두타산 은거10년간 방대한 불경 탐독‘제왕운기’ ‘내전록’도 집필화두참구에 관심 가진 뒤원 휴휴암 몽산에게 편지몽산 “대장부 지기 갖췄다”‘그는 누구인가’ 참구 권유“정신이 깨끗하고 맑아 영명하고 날카로운 자는 회광(回光)이 한 번 비춤에 곧 밝게 깨칠 수 있소. 동안거사 사간(司諫) 이승휴께서는 대장부의 지기(志氣)를 갖춘 분이오.·… ‘석가와 미륵도 그의 종(奴)인데 그는 누구인가’를 화두 삼아 공부하시오.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칠 것이나 의심이 없으면 끝내 깨치지 못할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우수선사 2세 혜심 깊이 존경혜심, 상경 요청 거절하며수선사 등에서 결사 이끌어시비득실 떠날 것 신신당부최우 초심 잃고 전횡 일삼아“세상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요, 사람의 목숨은 덧없는 것입니다. 들이쉬는 숨이 있더라도 내쉬는 숨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꿈과 허깨비와 허공의 꽃과 같은데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괴로워하는가. 얻고 잃음을 모두 놓아버려라’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그때그때 생각하고 깨달아, 번뇌, 망상, 집착을 없애면 그것은 더울 때 마시는 청량산(淸涼散)이 될
호넨의 전수염불 이은 신란유배 후 간토에서 염불 전법10만여명 아미타불에 귀의‘악인부터 구한다’는 이론에반도덕적 사건 발생 잇따라신란, 아들 보내 해결 모색오히려 왜곡해 갈등 부추기자부득이 아들과의 절연 선택“젠란은 내가 말한 적도 없는 것을 한밤중에 자신에게만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간토(關東)의 동행(同行)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제 부득이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을 수밖에 없구나.”1256년, 84살의 신란(親鸞, 1173~1262)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토록 믿었던 아들 젠란(善鸞, 1216?~1286?)이 불법을 어
천태학 일가 이룬 젊은 요세지눌로부터 은근한 참여 권유불교 세속화 우려 깊이 공감결사 참여해 돕겠다고 다짐2년간 팔공산 등에서 함께 결사정토사상·교화 대상 두고는 이견요세는 만덕산서 백련결사 개창양측 제자들 후대까지 계속 교류“파도가 어지러우면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室)이 깊어야 등불 더욱 빛나리. 권하노니 그대여 마음그릇을 가지런히 하오, 감로장(甘露獎)을 기울여 쏟지 말아야 하느니.”1198년 봄, 개경 고봉사(高峯寺) 법회에 참석한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법이 강설
천황 딸이었던 문인 쇼쿠시번잡한 세상 떠나 암자서 생활죽음 앞두고 호넨에 도움 요청관승 화려한 옷 벗어던지고백성들에게 염불 전하던 호넨그녀에게 갈 수 없는 상황에서쇼쿠시에 염불할 것 거듭 당부“쇼뇨보(正如房), 당신의 병환이 매우 위중하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당신의 청대로 꼭 한번 뵙고 싶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만남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리해서 만나면 스러져가는 육신에 집착이 생길 뿐이겠지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먼저냐 나중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남송 최고의 학자 장시랑경산에서 대혜와 첫 만남‘격물’ 법문 듣고 큰 감동비판적 견해로 유배 생활서신 교환하며 수행 지속유배 풀려난 후 계속 교유 “돌과 돌이 부딪쳐서 나는 불빛이나 번갯불과 같은 그 한 가지 일[一着子]만을 애착하고, 그 외에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른 도리를 용납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만약 (혜충국사의) 법성이 너그럽지 않았다면, 번뇌가 단절되지 않았다면, 불법으로 사리분별의 견해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윤회하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감히 그처럼 천하 각지에 머물며 진흙탕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 사람
19살에 교장수집 발원한 의천20대 후반에 정원법사와 인연직접 송에 와 공부할 것 권유임금·어머니 만류 물리치고1085년 마침내 송 유학 감행50여 고승 만나 불법 공부3000여권의 불교전적도 모아“지난해 2월에 쓰신 편지 한 통과 손수 지으신 책을 받아들고 돌아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법사께서는 제게 언어의 밖에서 종지(宗旨)를 터득한 그 뜻이 나의 마음과 같다며, 바람을 타고 와서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전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를 맞히는 듯 기쁨이 클 것이라 하셨습니다.또 문하에 들어올 것을 권면하셨기
출가자 길 선택한 소년 양개깨달아 큰 은혜 갚을 것 약속금생에 몸과 생명 버릴 때까지결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양개 어머니 문간에 기대서서눈물로 출가한 아들 기다려마침내 아들 뜻 받아들이고깨달음 반드시 이룰 것 당부“어릴 때 젖을 먹이고 길러주신 은혜가 깊고 깊으니 온갖 재물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할지라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한량없는 부모님 은혜를 갚으려면 출가만한 공덕이 없을 것입니다. ‘자식 하나가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강처럼 흐르는 생사의 애욕을 끊고, 번뇌 가득한 고통의 바
“아직껏 귀하를 직접 뵈옵지는 못했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사의 존체에 만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저 엔닌은 대사의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품어온 뜻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 대사께서 발원하신 적산원(赤山院)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 이외에는 달리 표현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840년 2월, 엔닌(圓仁, 794~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