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뭔가 공책에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일기쓰기’였다. 무언가 나만의 비밀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좋았다. 지금 읽어보면 그 내용이란 게 참으로 기도 안 차는지라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무언가를 기록하면서 아울러 그중에 한자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은 국어사전을 찾아서 써 보았다. 국어와 한문 2개 국어를 익히는 나만의 일기쓰기 비법이었다.아버님께서 한학을 좋아하셔서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 매양 ‘농민신문’을 읽게 하셨다. 국한문 혼용인지라 읽기가 쉽지 않은데 용케 잘 읽으면 칭찬
“아버님 전상서! 조석으로 바람이 찬데 그간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신지요? 소자는 아버님의 염려덕분으로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무슨 옛날 편지인가 하겠지만 내가 고등학교 객지 유학시절 가끔 시골집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편지 드리던 첫 구절이다. 그 무렵에는 소식을 거의 편지로 전하던 때라 격에 맞춰 글을 쓰지 않으면 ‘배우지 못한 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니 편지 첫머리의 ‘누구누구 전상서’와 ‘기체후일향만강’은 편지 좀 쓴다는 사람들의 기본옵션이었다.나는 중학교 때 한문시간이 즐거웠다. 고사성어에
스님! 여여(如如) 하신지요?미혹한 제자 ‘진광’입니다. 스님께서 원적에 드신지도 어언 14주기가 다 되어 옵니다. 그렇게 꽃은 피고 또 지고를 반복하며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제 가슴 속에 항상(恒常) 하시는 스님의 크고 너른 자비덕화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해만 갑니다. 원래 생전에 불효한 자식들이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더욱 애달픈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합니다.남미를 여행할 적에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스님의 전화를 받았지요. “이제 들어와서 나를 도와다오”라는 한마디에 2박3일간 비행기를 타고 귀국을 했었지요. 귀국해 인사드리
“스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주리라.”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느니라.”선종에서 너무나 많이 알려진 달마대사와 제자 혜가의 문답이다. 스승을 찾아 힘들게 소림굴까지 온 혜가는 허리까지 오는 눈 속에서 법을 구하였다. 그러나 근기를 점검해보는 달마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자 비로소 제자로 받아들였다. 9년 동안 두문불출 면벽좌선을 하며 제대로 된 제자를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물려받고 닮아간다. 나의 경우에는 아버님에게서 이성을, 어머님에게는 감성적인 면을 물려받은 듯하다. 특히 사내아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어머님의 영향을 더 받는가 보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의 나는 주변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다분히 감성적인 소년이었다.그 시절에 우리 집에서는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매일 시냇가로 끌고 나가서 소꼴을 먹이는 일이 내 차지였다. 그런데 소를 끌고서 걸어가기에는 꽤나 먼 거리인지라 소의 등에 올라탄 채 오가곤 했다. 그럼 내가 마치 수주 변영로라도 된 듯 했고 소등에 탄 채 함곡
# 에피소드1지난 초하루 법회 때 일이었다. 한참 법문을 하고 있는데 노보살님 한분의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청춘~을 돌려다오~♬” 조용한 법당에서 울리는 벨소리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했다. 다들 멋진(?) 벨소리에 킥킥댔다. 그러나 그 보살님은 벨소리를 잘 듣지 못하시는지 꺼질 때까지 그냥 있었다. 잠시 후 조용하던 전화기 벨이 다시 울렸다. 어쩌면 자식들의 안부 전화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법문시간에 재밌는 말씀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보살님이라 ‘감성이’의 너그러운 마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세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 북소리’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중략)…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라고 말했다.누구에게나 그런 ‘먼
살다보면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내겐 지난해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일명 ABC)’ 트레킹이 그것이다. 나는 사실 이 순례를 오래전부터 꿈꿔왔다. 선방 다닐 땐 지인들에게 “내게 연락이 끊기면 설산 어느 자락에서 살다가 간 줄 알아라”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그 설산 양지바른 어디쯤엔가 토굴 하나 지어놓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가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오래전 포카라에 갔을 때 안나푸르나 설산이 보이는 ‘오스트리아캠프’에서 하루 묵은 적이 있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 의문과 회의가 들 때가 있는 법이다. 스님들에게는 4년이나 9년 차에 한 번씩 그런 일이 종종 생겨난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러 지나가기도 하지만 심한 홍역이나 열병을 앓기도 한다. 그럼 지체 없이 길을 나서 만행을 떠나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리라.어느 해인가 내게도 그런 날이 시나브로 찾아왔었다. 아니 예정된 인연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일은 그럴만한 연유가 있게 마련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란 소설의 첫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
집을 나서면 길이 있다. 길은 우리네 삶과 닮았다. 늘 갈림길이 나타나며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이 길이다 싶어 갔는데 길이 막혀 아까 포기했던 다른 길로 돌아갈 때도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듯 질주할 때도 있고 비포장 길을 만나 덜컹거리며 갈 때도 있다. 인생의 봄날처럼 경치가 좋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 꽃구경 할 때도 있고 꽃자린 줄 알고 갔다가 진흙탕에 빠져 곤욕을 치를 때도 있다. 차가 고장이 나면 견인차를 부르듯이 삶의 간난(艱難)에 허덕일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옷을 흠
벗이 있어 시를 보내면 그에 답시를 보내던 시절은 실로 행복했을 것이니 어느 날 조지훈이 벗인 박목월에게 ‘완화삼(玩花衫)’이란 시를 보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 꽃은 지리라 //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박목월은 이에 흥이 일어 ‘나그네’라는 시를 지어 보내니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
“있잖아, 몹시 슬퍼지면 해 지는 모습을 좋아하게 돼.” 생 떽쥐베리가 쓴 ‘어린왕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노을’하면 어린왕자가 생각났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워낙 작아서 고개만 서쪽으로 돌리면 언제든지 노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외로울 때만 보던 그 노을을 어느 날 외로움이 사무쳐 하루에 마흔세 번이나 바라본다. 그렇게 외로웠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던 어린왕자, 친구라곤 장미 한 송이밖에 없는 별에서 어린 왕자가 느낀 그 외로움, 고독….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외로움이 환경이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