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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감성과 이성에 대하여  ②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출가 인연은 운명같은 강렬한 영감에서 온다

출가후 수행 생활하면서도 
객관적 합리적인 이성보다 
주관적인 감성·직관에 의지
​​​​​​​
종교, 객관적인 이성에 기여 
그럼에도 감성적 영역 속해
근본적으론 지극히 주관적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물려받고 닮아간다. 나의 경우에는 아버님에게서 이성을, 어머님에게는 감성적인 면을 물려받은 듯하다. 특히 사내아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어머님의 영향을 더 받는가 보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의 나는 주변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다분히 감성적인 소년이었다.

그 시절에 우리 집에서는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매일 시냇가로 끌고 나가서 소꼴을 먹이는 일이 내 차지였다. 그런데 소를 끌고서 걸어가기에는 꽤나 먼 거리인지라 소의 등에 올라탄 채 오가곤 했다. 그럼 내가 마치 수주 변영로라도 된 듯 했고 소등에 탄 채 함곡관(중국 하남성 신안현 동쪽에 있는 관문)을 넘어 서역으로 떠나가는 노자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때는 소도 나도 모두가 순수하고 맑았기 때문에 그러했을 게다.

또한 궁벽한 시골에서 읍내로 전학을 왔을 적에도 청소시간에 운동장의 짐승 배설물을 손으로 주워버린 유일한 인물이 바로 나였다. 그것이 그리 더럽고 추하다는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나는 촌스럽고 천진난만한 그런 시골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리 부족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았고 도리어 그 누구보다 더 즐겁고 행복했음은 물론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살이 하얗고 고운 어느 소녀와의 만남은 황순원의 ‘소나기’나 알퐁스 도데의 ‘별’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의 오랜 편지나 엽서를 통한 교감은 더욱 나를 감성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내 위와 형님 위로 계셨다는, 어려서 죽어 얼굴도 알 수가 없는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은 더욱 나를 감성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68혁명의 해에 내가 태어났음을 알았고 1980년 광주의 참상을 비디오로 목도하면서 비로소 감성만이 아닌 이성의 필요성과 실천의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마침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변화를 몸소 겪으면서 말이다.

그 당시의 “그대가 의미 없이 보내는 오늘은, 열사께서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어라!”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먼저 간 그들에게 일정부분 빚을 진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연애나 낭만은 가진 자들의 사치나 방종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가를 꿈꾸고 결행하는 것은 이성일까 감성의 힘일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보다는 감성의 주관적인 선택과 집중의 영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연처럼 어떤 인연과 운명 같은 강렬한 영감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까지 수행을 해 오면서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주관적인 감성과 직관에 의해 살아온 듯하다. 종교는 객관적인 이성에 기여한 바가 큰 것이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선방에 들어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을 할 적에도 이는 어김없이 적용된다. 선문에서는 “이 문안에 들어오려거든 일체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지어다(入此門內 莫存知解)”라고 한다. 선은 일체의 문자와 사량분별을 떠나 직지인심 견성성불 함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불전은 물론 일체의 책과 신문조차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어찌 객관과 합리의 이성이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음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직관과 영감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가해 3년간 원담 방장 스님 시봉을 했는데 스님께서는 수덕초등학교 2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다. 10여년을 만공 큰스님과 벽초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머리가 아닌 옴 몸으로 진리를 체현한 것이다. 가끔 명문대학을 나온 정관계 인사나 유수의 학자가 찾아와 삼배를 올리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면 “아니 그리 좋은 대학 나오신 분들이 왜 초등학교 2학년 중퇴한 나에게 절을 하고 물으시는고?”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에는 ‘보리(菩提)’라는 스님이 한 분 계셨다. 어릴 적에 이곳으로 출가해 벽초 노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일체의 공교육도 안 받고 산문 밖을 나가지 않은 실로 보물 같은 분이다. 당신의 법명마저 누군가 써준 것을 그대로 그린 후에 웃는 얼굴의 그림으로 사인을 한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텨 귀동냥으로 들은 염불소리는 장엄하고 환희스럽다. 그의 농선일치의 삶과 수행은 경외스럽고 수승한지라 온 대중이 함께 수희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 중국에 만권의 책을 읽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만권(李萬卷)’이라 칭송받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인가 유명한 선사를 찾아 자신의 독서와 학식을 자랑하였다. 그러자 선사께서 “만권의 책이 어디에 들어 있는가?”라고 물으니 “제 몸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자네 몸 안에 책이 만권씩이나 들어있으면 무거워서 어찌 돌아다니겠는가?”라고 일갈하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제 몸 안에 천경만론이 있다하나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이 밥값을 내어 놓으라 할진대 모골이 송연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수행자가 되어 한 것이 있다면 다만 시봉과 참선, 그리고 여행과 행정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다만 몸으로 익힌 것일 뿐, 머리로 익힌 것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이 토대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수많은 경험을 통한 감성과 직관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것을 바꾸거나 되돌릴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갈 생각이다. 

다만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에서 “텍스트를 다시 읽고 다시 쓰고 다시 말함으로써 혁명을 이룰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그것을 믿노니 다시금 새롭게 읽고 쓰고 말함으로써 혁명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502 / 2019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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