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젊은 수행자가 도력이 높다는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 젊은 수행자는 이름 난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부하기를 좋아했는데, 그가 찾아간 스승은 웬만해서는 사람들을 잘 만나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 젊은 수행자는 그 스승을 만나기 위해 고집을 피워 결국 스승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가?” 스승이 묻자 젊은 수행자가 답했다.“스승님 밑에서 공부를 하여 진리를 깨우치고 싶습니다.”“진리를 깨우치고 싶다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서 더 훌륭한 스승을 찾게나.”“아닙니다. 저는 꼭 스승님 밑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스승님이 저를 깨우쳐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깨우치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이지 어디 남이 깨우쳐 주게 할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어떤 분이 귀한 차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구수한 숭늉 맛이 감도는 대홍포차였다. 전에 마셔 본 차에 비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정말로 좋은 차였다. 맛이 아주 좋아 찾아 온 손님들에게 차맛을 보이다 보니 일주일도 안 되어 금방 바닥나 버렸다. 사실 그 차를 마셔보기 전에도 대홍포라는 차는 자주 마셨고 약간의 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맛있는 대홍포를 마셔본 이후로는 내가 가지고 있던 대홍포는 맛이 약한 것 같기도 하고 덜 숙성된 듯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 대상이 없었을 때는 그나마 가장 비싼 차 중에 하나였는데 어느 순간 형편없는 차로 전락해 버렸다. 차의 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입맛이 변해서 일 것이다. 맛있고 좋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우리 범부들
명상 실습이 끝나면 간혹 서로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러한 시간은 수행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고 자신의 수행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어느 날, 한 보살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스님, 저는 그래도 매일 조금씩이나마 명상을 하는데 될듯하면서 잘 안되네요.”“매일 어느 정도 하시는데요?”“매일 30분에서 1시간 이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수행을 합니다.”“그렇게 매일 하신다니 참 잘하시는 일이네요. 그런데 제가 한 가지 여쭈어 볼게요. 보살님은 고시 공부를 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과 명상 수행을 해서 번뇌를 없애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까?”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듣자 그 보살님을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보살님의 생각을 내
매일 매일이 새롭다. 왜냐하면 똑같은 순간은 있을 수 없으니까. 또 매일 매일이 기다려진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묻는다면 웃기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즐거운 일들이 있어서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냥 지금 일상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일들이 재미있을 뿐이다. 단지 생각이 바뀌었을 뿐인데 실제의 변화는 참으로 크다. 얼마 전 전자제품 매장에 가서 새로 나온 지 얼마 안 된 3D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냥 육안으로 볼 때는 화면이 조금 밝아졌다는 차이 밖에 느낄 수 없었는데 딸려있는 전용 입체 안경을 쓰고 보니 화면의 차원이 확실히 달라 보였다. 다시 안경을 벗고 똑같은 화면을 보니 생생함이 확 떨어져 보인다. 지혜라는 안경이 있다. 그 안경을
해마다 연초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재미 삼아 그 해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점이나 토정비결이라는 것을 본다. 개중에는 재미 수준이 아니라 심각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간혹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 내용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살면서 어떤 때는 우리에게 힘든 시절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삶이 본인의 뜻대로 풀리지 않고 미래가 불안할 때 사주나 역학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답답함과 불안함을 해소하려 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 선생에 의해 비롯되었다. 미래를 예시한다는 소문을 듣고 숱한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를 찾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무언가 절박하고 힘들고 불안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명상 수행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편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아마 수행해서 어디에 써먹느냐라는 인식이다. 흔히들 명상 수행을 하면 현실에 대한 열정이 줄고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만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표면적으로 명상의 모습을 보았거나 머리로만 생각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수행의 결과인 지혜가 세상살이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 또한 예전에 이러한 시각을 참으로 오래 가져왔는데, 수행이라는 것을 올바로 하여 지혜라는 것이 조금씩 생겨나면서부터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부정적이고 편협 된 견해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행의 힘은 우리의 인생 최고의 성공 파트너임에 분명하다. 왜 명상하면 오히려 우리를 성공하게 해 주는
출가하여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출가의 이유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극히 감상적인 충동으로 출가한 것 같은데 다행이도 출가생활이 길어지면서 점차 출가의 이유가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다양한 사연들이 있겠지만 진정 출가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해 본다. 부처님 당시 꾸루국이라는 나라에서 랏따빨라 스님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감화되어 출가하였다. 그 스님은 고향 도시에서 제일가는 갑부의 아들이었으며 여러 명의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스님을 출가 전부터 알고 있었던 꼬라비야왕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물었다. “존자여, 보통 사람들은 몸이 늙었을 때, 큰 병이 들었을 때, 재산이 없어졌을 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어떤 사람이 높은 감나무 위의 감을 먹고 싶어 했다. 그는 나무에 올라 갈 힘도 없고 어떻게 올라가는 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누군가 말했다.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누워 있으면 언젠가는 감이 떨어질 테니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보라고.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옛날에 그런 방법으로 감을 먹어 본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그 말을 믿고 그 사람은 용기를 내어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이제나 저제나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지치고 포기하려 들다가도 다시 지나가는 사람 말을 되새기고 묵묵히 누워있기를 계속한다. 감을 먹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무에 오르는 방법을 연구하고 힘을 키웠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에 올라 감을 따 먹었다. 어떤 방식이 더 현명한 길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
늦은 오후, 온 몸의 기력이 떨어지고 눈에 힘이 빠지면 어딘가에 편안히 몸을 기대고 싶어 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저녁시간, 몸의 기운이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영양 많고 몸에 좋다는 맛있는 음식으로 잔뜩 배를 채운다. 배가 부르지만 여전히 몸은 무겁고 정신의 작용 속도는 절반으로 뚝 떨어져 있다. 이번에는 카페인이 풍부한 커피나 차를 마셔 무뎌진 정신을 반짝 날카롭게 세워본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증상은 나아지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만성적인 상태로 굳어져 간다. 특별히 통증이 있거나 건강상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의 기력이 떨어지고 편안하지 않은 상태를 만성피로 혹은 미병(未病)이라고 부른다. 상당히 많은 현대인들이 요즈음 이러한 상태에 빠져 살고 있는데 삶의 활력과 정신적 만족
명상 강의 중에 가장 많이 받는 대표적인 질문은 수행이 처음엔 쉬운 것 같은데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 일이 뭐하나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마음 편해 보자고 명상하는 건데 그 배움과 실천의 과정이 좀처럼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는가 보다. 그러나 수행이 무조건 다 어려운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또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제대로 알고 나면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다. 수행이 어려운 이유는 첫째, 무엇 때문에 수행하는지 수행의 목적이 불분명해서 일 것이고 둘째, 어떻게 하는지와 어떤 원리로 목적한 바를 얻게 되는지 정확히 원리를 알고 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셋째, 꼭 해야겠다는 열의가 충분하지 않아서이다. 명상은 이론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운동처럼 실천 그 자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
기업에서 쓰는 용어 중에 생산성이라는 말이 있다. 가끔 뉴스를 보다보면 생산성을 높여야 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생산성이란 생산의 효율성을 측정하는 척도로서 생산하기 위해 들어간 것과 결과적으로 나타난 산출량의 비율을 말한다. 적게 들이고 많이 생산하면 생산성이 높다고 한다. 2006년 기준으로 미국은 주당 34.5시간을 일하지만 한국은 평균 42시간을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생산성은 20.4로서 미국 생산성인 50.4에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OECD 평균인 38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 수치대로 본다면 분명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생산한다는 말인데 결국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생산성은 산업이나 농업, 교육 등 사회 모든 분야에 해당된다. 생산성과 연관되는 요소는 많이
절에 오래 다녔다지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속 시원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는 원래 수행 그 자체였기 때문에 불교를 알려면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수행의 원래 목적과 사람들이 불교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달라지면서 불교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본질이 왜곡되곤 한다. 불교는 일련의 수행 실천 과정이며 그 과정은 계(戒, 절제), 정(定, 삼매), 혜(慧, 통찰지혜) 삼학(三學)으로 표현된다. 절제수행은 기본 오계를 지키는 것과 감각 기관을 단속하는 것, 항상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삼매 수행은 호흡과 기타 삼매수행법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다섯 장애요소를 차단하며 몸과 마음의 경안을 이루고 강한 기쁨을 체험한다. 강한 기쁨을 원인으로 첫
부처님이 어느 날 지독한 고행을 하고 있는 한 수행자에게 고행의 이유를 물었다. 그 고행자는 자신의 스승이 이렇게 고행을 하면 전생에 지은 업이 소멸되고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따라 지금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고행하면 전생의 업이 소멸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당신은 전생에 어떠한 업을 지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얼마의 업이 소멸되었고 또 얼마의 업이 남아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고행을 통해 전생의 업이 어떻게 소멸되는지 압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고행을 하면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태어나는지 압니까?”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이런 수행을
우리는 습관적으로 현재의 의식작용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간주한다. 그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행복하다고 하고, 그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우면 불행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애쓰고 산다. 사람들은 마음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마음을 훈련시켜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거나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다거나 간절히 한 가지 생각만을 하여 마음을 훈련시킨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마음이 편안해 지려면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은 의식작용에 불과하며 의식작용은 여섯 감각기관(육근)과 그에 해당하는 여섯 감각대상(육경)의 접촉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한다. 마음은 육근이나 육경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다. 두 손이 만날
우리는 어딘 가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삼매경’에 빠졌다고 한다. 무척 재미있거나 혹은 절박할 때 우리도 모르게 정신은 온통 한 가지 상태에 머문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이나 상태에 온전히 모아져 있으면 이 상태를 삼매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익하게 마음이 모아져 있는 상태만을 삼매라고 한다. 마음이 대상에 깊이 몰입하려면 강한 기쁨이 밑바탕 돼야 한다. 수행에서 말하는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냥 단순한 재미와 기쁨에서부터 전기가 흐르는 듯한 자극이나 몸이 뜨는 것 같은 느낌, 황홀감, 환희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기쁨이 일어나면 마음은 저절로 어떤 하나의 상태가 진행된다. 보통 일반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느낄 때, 하고자 하는 일이나 바라고자 하는 일 등이 성취되었을 때 기쁨이 일어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집에서는 밥을 하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다. 때문에 나무와 마른 솔잎을 긁어 오려 근처 작은 동산에 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새로 지은 집에서 연탄보일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나 다시 석유보일러로 교체했던 것 같다. 우리 집 말고 동네 다른 집들도 보일러를 교체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동네 공터 한 구석에는 낡은 연탄보일러 뭉치가 놓여 있곤 했다. 낡은 연탄보일러 뭉치에 올라서서 이런 저런 장난을 치다보면 삭아서 얇아진 겉 통이 부서지면서 속의 내용물이 삐져나왔다. 호기심에 겉 철판을 벗겨내니 노란 솜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게 보였다. 노란 솜은 특이하게도 불에 잘 타지 않았는데 아무튼 불에 타지 않는 특별한 유리솜이라고 하여 서로 그 솜을 가져가려
존재하는 한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결국 ‘만족’의 상태에 불과하다. 중생들은 존재하는 한 한시도 쉬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만족의 상태를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생겨난 ‘존재물’들에게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고 일종의 운명이자 본능이다. 만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시지포스가 형벌의 하나로 커다란 바윗돌을 뾰족한 산꼭대기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정상에 올라가는 즉시 반대편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영원히 바윗돌을 굴려 올려야하는 처지처럼 생겨나 존재하는 이상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의 사실적 현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의 과정을 ‘괴롭다’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살면서 왜 사는가에 대해 한번쯤 물음을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답을 알기에는 너무나 막연하고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지레 문제풀기를 포기한다. 그것보다도 더 재미있고 또 더 중요한 일들이 생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어느 새 그런 고민은 삶을 살아가는데 거추장스러운 시간 정도로 여겨진다. 왜 사는지는 잘 모르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싶거나 해야 되는 일을 위해 살고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가끔 스트레스와 무기력에 빠지곤 하지만 희망이라는 당근을 보고, 또 절망의 강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거창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무엇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매 한가지다. 뚜렷한 목적이 있거나 따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가만히 살펴보면 매 순간 끊임없이 무언가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으면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지 혹은 배가 고픈지, 추운지, 더운지도 모른 채 몇 시간을 책의 내용에 빠진다. 흔히 이러한 상태를 두고 ‘무아경’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오직 대상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직 대상만이 존재하는 깊은 집중의 상태에서는 몸의 느낌이나 상태, 시간의 흐름 등이 인지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이나 감정, 생각도 없고 오직 대상의 내용 따라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평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만 생각이나 감정, 느낌들이 일어나 우리를 괴롭게 한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원한 것도 아니다. 단지 금단현상처럼 기억과 습관, 주위 조건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상황
전에 시골에 있는 한 절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젊고 잘생긴 한 청년도 잠시 동안 절에 기거하고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밥 먹을 때 서로 눈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는데 주지 스님과 함께 공양 후 같이 차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 때 그 친구가 무슨 일로 절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의 전직은 제비족이었다. 일찍이 춤추고 노래하고 노는 일에 소질이 있어 공부는 멀리하고 춤추는 곳을 배회하였다고 한다. 군대를 다녀오고 난 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곳 바로 유흥가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차츰 따르는 여자들이 생겨났고, 별 수입이 없었던 그는 사귀는 여자들로부터 넉넉히 용돈을 받아쓰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도 한창 젊은 나이에다 강한 욕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