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스님은 회계(會稽) 산음(山陰) 출신으로 천태지자(天台智者) 대사의 제자이다. 천태 대사는 그의 맑은 기상을 칭찬하며 “평생 좌선과 독송으로 과업을 삼으라”는 유훈을 남겼다. 북주 무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던 중국 불교는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문제(文帝)에 의해 찬란히 부흥했다. 문제는 수많은 사원을 재건했고, 승려들을 서울로 초청해 극진히 대접했다. 탄압을 피해 산간벽지에서 숨었던 승려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대지는 참여하지 않고 스승의 유훈에 따라 여산(廬山) 봉정사(峯頂寺)에서 오로지 ‘법화경’만 독송했다. 쓸쓸
긴 세월 수많은 불자들의 헌신으로 구축한 찬란한 불교유산이 황제의 폭압으로 한순간 잿더미가 되었다. 불법은 바람 앞 등불 신세였다. 서울에서 풀려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던 보안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면서 결심하였다.불교가 탄압받던 시절에도중생고통 덜겠다는 발원으로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놓으며평생 보살행으로 교화에 앞장“내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반드시 불법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보안은 숨어있던 고승들을 찾아 수소문하고 나섰다. 그러다 옛 스승인 애() 법사가 의곡(義谷)의 두영세(杜映世)라는 사람 집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낸다는 소문을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보살의 첫 번째 실천덕목은 보시이다. ‘나’와 ‘나의 것’에 꽁꽁 묶여 아득한 세월을 보냈으니, 그 견고한 아집의 밧줄을 끊기 위해선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선선히 내어놓는 보시가 곧 해탈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재산과 보배를 아낌없이 베풀고, 심지어 몸과 목숨마저 내놓길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불법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조차 보살의 위대한 보시바라밀을 경전 속 이야기로만 치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으로야 칭송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린다.“에이, 사람이 어
요흥은 구마라집의 권유에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했다. 후한 선물까지 더해 초청했지만 불타야사는 웃으며 거절했다. 구마라집에게 처첩과 많은 재산을 하사하여 파계하도록 강요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흥은 그의 신중함에 감탄하며 거듭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타야사는 요흥의 정중한 태도를 재차 확인한 후에야 장안으로 향했다.요흥은 직접 성문 밖까지 나와 불타야사를 맞이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소요원에 새로 아름다운 건물을 세우고, 옷·음식·와구·의약품 등 일상에 필요한 물품들을 빠짐없이 공급했다. 하지만 불타야사는 왕의
계·정·혜 삼학을 닦는 까닭은 해탈과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복락을 누리고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삼학을 열심히 닦다보면 명예와 이익이라는 세간의 복락 역시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세간의 복락에 취하기가 쉽지, 출세간의 복락을 고수하며 세간의 복락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간의 복락을 거부하면 간혹 비방과 비난이 따르기도 한다. 때가 꼬질꼬질한 산적들 틈에 낀 말쑥한 선비 하나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놀림거리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콤한 복락을 거부
신라에 이차돈이 있었다면, 티베트에는 구게왕국의 왕 ‘예세 외’가 있었다. 유약한 어린 생명은 어미의 젖[乳]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그의 잘려진 목에서 하얀 젖이 솟았다는 것은 미약하기 짝이 없던 신라의 불법이 그의 희생으로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불모의 땅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손첸감뽀(581~649) 왕 시기로 추정된다. 고원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토번왕국을 건설한 손첸 왕은 인근국가인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네팔의 티춘을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두 왕비
이차돈은 왕의 처소에서 물러나 신하들에게 선포했다.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세운다. 담당자는 왕명을 받들어 공사를 시작하라.”천경림은 신라인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다. 예상대로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들의 날선 추궁을 막기엔 왕의 방패가 너무나 허약했고, 기세등등한 그들의 위세를 꺾기엔 왕의 창이 아직은 무뎠다. 왕의 권위는 추락했다. 자칫하면 왕의 자리마저 위태로웠다. 법흥왕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책임회피였다.“짐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약속대로 이차돈이 나섰다.“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왕의 명령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걸 포기하는 것을 희생(犧牲)이라 한다. 희생의 값어치는 무엇을 목적으로 했느냐와 무엇을 포기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란 단어를 흔히 사용하고, 또 자신의 행위 중 일부를 ‘희생’이라 여기며 뿌듯해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속내를 꼼꼼히 따져보면 ‘거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행위의 목적이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고, 포기하는 것 역시 자신의 삶이 위협받지 않는 수준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희생은 차후에 대가, 즉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반골(反骨)이란 말이 있다. 권력이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기개, 혹은 그런 기개를 가진 자를 일컫는 말이다. 역사를 훑어보면 수많은 반골들이 등장한다. 때로 그들은 태풍의 눈처럼 한 시대를 휩쓸어 역사의 현장에 새로운 풍경을 펼치기도 하고, 때로는 산책길의 찔레덩굴처럼 성가신 존재가 되어 뭉텅뭉텅 쉽게 잘려나가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새로운 길을 걸었던 그들은 일의 성패(成敗)에 따라 영웅(英雄) 또는 난적(亂賊)이라 칭해진다.불교사에도 수많은 반골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출세간의 반골들은 세간의 반골들과
불법을 따르기는 쉽지 않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달려가 좇고 취하기가 쉽지, 애써 눈을 돌리고 버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화가 치밀 때 분통을 터트리고 싸우기가 쉽지, 애써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닥 모를 어리석음이 뱃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조금 잠잠하다 싶으면 곧바로 탐욕과 분노를 부채질하니, 세상 속에 살면서 불법을 따르기란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출가(出家)의 길을 선택하셨나 보다.하지만 이 출가라는 것이 또 쉽지 않다. 잠깐 욕심을 접기는 쉽지만 한 평생 모든 욕망을 접고 살겠
혜원 스님은 무제가 내세운 주장의 허점을 재차 파고들었다.“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법을 알 수 있다면 문자가 없던 삼황(三皇) 이전 사람들도 삼강오륜(三綱五論) 등의 법을 스스로 알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때 사람들은 금수처럼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몰랐답니까?”무제는 또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혜원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았다.“만약 ‘형상에는 마음이 없으니 섬겨도 복을 줄 리 없다. 따라서 폐지해야 한다’고 하신다면 나라의 7묘(廟)에 모신 형상들은 뭡니까? 거기 무슨 마음이 있다고 쓸데없이 받들고 섬깁니까?”
당랑거철(螳螂拒轍), 제법 빳빳하게 두 다리를 세워보지만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수레는 사마귀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면 제 분수를 모르는 짓이라며 만용을 꾸짖고,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짓이라며 어리석음을 탓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사마귀의 등 뒤에 알을 잔뜩 품은 암컷이 뒤뚱거리거나 철모르는 새끼들이 잔뜩 떼지어있다면 어떨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의 역량을 재빨리 간파하고 제 한 몸이나마 얼른 피하는 게 현명한 판단일까? 수레가 지나간 뒤 처참하게 널브러진 알들과 새끼들의 주검을 수습하면서 “내 힘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