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마을 인근 산에는 귀한 화초도 멋들어진 나무도 없다. 사람들이 가만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권세가들의 권유는 집요하고, 부와 명예의 향기는 매혹적이다. 그래서 지조(志操)는 지키기 어렵다.후진(後秦) 시절에 도항 법사라는 분이 계셨다. 그는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의 3000명 제자 가운데서도 발군의 역량으로 여덟 손가락 안에 꼽히던 인물이었다. 후진의 군주 요흥(姚興)은 그들 중에서도 도항과 도표 두 사람을 걸출한 인재라며 총애하였다. 요흥은 상서령 요현에게 명령을 내려 도항과 도표 두 사람을 환속시켜 관직
중국 남북조시대 말, 끊이지 않는 전란으로 광활한 대지는 피로 물들었고,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 용서와 화해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길과 핏물이 용솟음치고 신음소리만 메아리치는 곳, 그곳은 이미 지옥이었다. 그 시절 지옥문 앞 지장보살처럼 애타게 눈물지었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신행 선사다. 신행은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관세음보살께 기도하고 얻은 아들이었다. 네 살 어린나이에 수레바퀴가 수렁에 빠져 신음하는 소를 보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비정한 세상이다. 자본의 유혹과 폭력 앞에 인정(人情)은 고사 직전이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과 자살이 아침뉴스마다 빠지지 않는 실정이니, 돈 때문에 벌어지는 다툼과 배신쯤은 이제 예사라 하겠다. 생명존중과 인륜은 고사하고 이웃과 가족마저 아랑곳 않는 실정이니, ‘우리’ ‘함께’ ‘더불어’ ‘존중’ ‘배려’ 등의 단어는 조만간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 싶다. 과연 진심으로 나의 아픔에 공감하고 염려해 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래서 더욱 외롭고 삭막한 세상이다. 더불어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그래서 더욱 그립고 필요한 시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했다. 불제자에게도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은 명확하다. 하지만 모든 불제자가 길을 제대로 가는 것은 아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알면서도 궤도를 이탈해 발걸음을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일까?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첫째, 쾌락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표를 수정하는 경우이다. 더 이상 열반을 목적지로 삼지 않게 된 것이니, 이젠 그를 불제자라 칭할 수도 없을 것이다. 둘째, 주변의 회유와 종용에 넘어간 것이다. 이는 믿음과 판단력이 확고하지 못해 생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누가 당신 구슬을 가져갔다고 이러십니까?”“당신 말고 누가 있어. 그럼 딴 사람이 훔쳐갔단 말이야?”장인은 눈알을 부라리고 곧장 대문을 닫아버렸다.“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래, 꼭꼭 잘 숨겨봐라.”장인은 씩씩거리며 비구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하지만 비구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속살을 내보이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도 비구는 끝내 옷을 벗지 않았다.“지금 나와 싸워보겠다는 거냐?”“당신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구슬을 훔치지 않았다면 옷을 벗어서 증명해.”“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의지를 다지며 나선 길이라 해도 그 여정에는 예상했던 일보다 예상 밖의 일들이 훨씬 많다. 뜻밖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고난의 문턱을 쉬엄쉬엄 수월하게 넘어서는 사람은 사실 드물다. 대부분은 자신의 지혜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당황하고 번민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회의와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세월이 길어지다 보면 스스로에게 문득 질문을 던지게 된다.“내가 가려던 곳이 도대체 어디였지?”젊은 시절 너무나 선명했던 삶의 목표가 어느새 이맛살을
부루나의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은 매우 기뻐하셨다.“훌륭하구나, 부루나. 이렇게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고 고요함을 구족하였으니, 그대는 수나파란타 지방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고향 돌아가자마자 살해 위협두려움 없는 당당함에 감복수많은 우바이·우바새 교화청청한 언행이 전법 원동력불법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칼에 찔려 죽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던 부루나 존자의 결의는 만용도, 허언도 아니었다. ‘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부처님의 허락을 얻은 부루나 존자는 그 밤을 기원정사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사위성에서 걸식을 마치고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렸을 때, 선뜻 뜰 안으로 들어오라 권하는 이웃은 열에 하나도 드물다. 그럴 때, 상냥하지 못하다며 이웃을 탓한다면 오만한 태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초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집 대문을 다시 두드릴 수 있다.부루나 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간략한 가르침을 듣고 고향으로 떠나는 장면이 상윳따니까야 ‘뿐나경’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뿐나여, 나의 이러한 간략한 교계를 받고 그대는 어느 지방에 머물려 하는가?” “세존이시여, 수나빠란따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두 눈을 가로막던 캄캄한 장막이 단박에 걷히는 시원함,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훌쩍 내려놓은 홀가분함, 쇠사슬처럼 옥죄던 고뇌가 탁! 풀어지는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껴보았을 것이다. 깊건 얕건, 오래 지속되건 금방 사라지건, 완전하건 불완전하건, 그것이 열반(涅槃)이다.‘전법의 표상’으로 추앙되지만출신·행적은 전적마다 제각각공통점은 부족해도 전법 매진부처님께서 설법제일로 인가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하고 찬탄했던 것은 경전 속 관용구에
선가(禪家)에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 송곳이란 뜻입니다. 송곳은 아무리 깊이 감추려 해도 뾰족한 끝이 저절로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대학교수들이 간행하는 교수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2014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 누구 하나 반박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 각종 권력형 비리와 부정이 만연한 현 사회를 비판하는 말이겠지요. 또한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다들 입을 닫아버리는 비정한 침묵을 꼬집는 말일 것입니다. 거짓과 편법의 장막이 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