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1시간 좌선-1시간 어록 공부100일 정진 정해 놓고 입재·회향 반복 바른 스승을 만나 바른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익히는 것은 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물론 바른 스승 만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백봉 김기추 선생님을 만났듯이 인생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극한 원력이 있으면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지극하게 꾸준히,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줄기차게, 여유같은 의심이 들끓어도 과감히 떨치고, 어려움을 당해서도 꺾이지 않고 굳건히, 공부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어서 명료하고 분명하게, 좋은 도반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30여 년을 수행하면서 하루하루 지나는 일상 속에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
‘나는 누구인가’ 의문…대학 3년 때 불연백봉 선생 無色 법문에 눈물, 정진 시작 청소년 시절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고전적 의문에서부터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가치를 찾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성인도 위인도 아닌 평범한 내가, 기껏해야 80년 정도 살아가는데, 내가 태어나고 죽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왜 부질없이 왔다 가는 것인가.’‘내가 보고 듣고 인지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이 세상은 정말 있는 것인가.’ 등 스스로 해결할 수도 답을 얻을 수도 없는 요상한 물음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매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때인 1975년 5월 어느 날 남동생과 함께 울타리에
10만 독 후 탐·진·치 삼독심 점차 소멸2010년 5월까지 다라니 100만 독 발원 나에게도 기도의 힘이 생기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여동생도 지금은 매주 금요 철야에 함께 수행한다. 부모님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며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았다. 조상님께도 온 식구가 참석하여 여법하게 천도재를 모셔드렸다. 재를 지내며 나는 끝없이 우러나는 환희심으로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처음 이 기도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잠과의 싸움, 게을러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들이 무한히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기도가 계속되면 될수록 그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발원하는 마음도 예전에는 “부처님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변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 후에
스님 권유로 철야 1000독에 도전자신감 얻어 올해엔 10만독 회향 매주 금요 철야기도 시간 어김없이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이어진다. 그 열기는 금요 철야기도에 직접 참석해 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에어컨과 여러 대의 선풍기를 작동해야 할 정도의 열기다. 내가 결혼도 뒤로 하고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다. 2001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어릴 적, 부모님 따라 가끔 절에 다닌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었다. 물론 “부처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금강경 사경하고, 독송하기도 하고, 엄마 따라 그 추운 겨울날 조계사 법당에서 손과 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묘원법사 글 통해 ‘진짜 수행’만나좌선과 경행은 삶의 유일한 활력소 지난해 3월 29일, 위빠사나를 기초부터 차례대로 배울 수 있는 한국위빠사나 선원을 찾아갔다. 강의를 들으면서 ‘몸과 마음은 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아니다’라는 말이 강렬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배우려면 직접 수행처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원을 찾아가기에 앞서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위빠사나 선원의 인터넷 카페를 방문했는데 여러 게시물 중에서도 ‘옹달샘’이라는 코너를 보고부터 나는 그 코너에 중독이 되었다. 묘원 법사님이 수행자들에게 주는 글들이 올라와 있었는데, 삶과 수행이 일치한 글이었고 균형 잡힌 글이었다. 3일에 걸쳐 그 글들을 보면서 머리 속에 있던 먹구름이 확 걷혀나갔다. 그
고교시절 불교에 관심, 대학 3년 때 출가 속퇴 후 한의대 입학…보통 여인으로 살아 통찰지혜란 일종의 자기 치유력이다. 부처님께서 진실로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했던 가르침이란 바로 자기를 치유해 나가는 방법이다. 위빠사나를 만나고 나서 내가 사회를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나의 탐진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내가 옳다고 믿고 고집을 부려서 주위와 불화를 일으킨 것이나 결혼해서 시댁과 겪었던 갈등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나의 강직한 성격 때문인 줄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 성격의 근저에 자리잡은 탐욕과 성냄을 보고 나니 마치 병든 사람이 약을 먹은 것처럼 내 행동이 저절로 고쳐졌다. 이런 것을 일러 법에 의한 치유라고 하던가. 흔히 통찰에 의한 치유를 근본적
극락사 원일 스님 인연…지도자까지매주 수요일 사경하면서 행복 충전해 대구불교대학 2년 과정을 공부하며 부처님의 향기를 느끼며 사경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지혜를 베풀 수 있는 중생이 되게 해달라고 발원하며 사경을 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라도 찾아가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고나니 이럴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불도 배우고, 붓 사경도 배워보자는 마음이 일어났다. 사불도 공부하고 전통 방식의 붓 사경도 배우게 됐다. 그래서 대구 지천에 위치한 극락사 주지 원일 스님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우리들을 사경수행에 정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원일 스님께서는 사경수행을 보급해 보다 많은 불자들이 집에서 조용히 앉아 부처님 말씀을 새겨가며 정진 할 수 있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그 덕분에
사업실패 후 무작정 경전 쓰는 연습1000일 기도회향…신이한 경험 느껴 내가 사경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년 전쯤이었다. 사업에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항상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커져 어찌 할 도리가 없을 때 즈음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사경. 처음에는 사경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마냥 부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읽고 쓰기 시작했다. 가만히 마음속으로만 하는 것보다 직접 글을 쓰면서 하면 나의 마음을 부처님이 좀 더 알아주실 것 같다는 생각에서 사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작하게 됐다. 1986년도에 시작한 식당 영업을 시작하기 전 일일장부 첫 장에 사십이수주진언을 일곱 번씩 사경하며 소리 내 염송하며 사경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라니 108독 15분 만에… 하루 3천독 100일 10만독 후 자신감-위신력 체감 가행정진을 거듭 할수록 내면의 힘이 세어진다. 독송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 독을 하는데 이제는 15분이면 족하다. 입으로 내는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함께 내 안에서 굴러가면서 염불삼매에 빠져 든다. 하루에 3,000독이 가볍게 이뤄진다. 하루에 3,000 독을 하고 나면 한량없는 성취감에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진을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10만 독을 돌파하였을 때에는 환희심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이 밀려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높은 길이었다. 힘든 길이었다. 그
잠자는 4시간 빼고 20시간 정진가행정진 후 환희심·희열 솟구쳐 나는 오랫동안 불자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시절을 살펴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하기 전에는 거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수준에서의 신행이었다. 남편이 잘되길 바라고 자식이 건강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기원하고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전부였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텅빈 법당에서 홀로 3000배를 하기로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배 절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 공덕의 힘으로 많은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 시기에 덕양선원을 알게 되었고 법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을 시작하였다. 독송목표는 100만 독으로 잡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10
4년 전 정림사에서 본격적 수행 시작몸 힘들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즐거워 날마다 절과 능엄주 기도를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겨우 할 수 있음을 알기에 주변 인연들이 못 마땅하다가도 조금씩 이해가 됐다. 정림사에서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연습해온 것이 있어서인지 불교 수행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물고기가 물 만난 듯, 힘은 많이 들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즐거웠다. 절, 능엄주 주력, 사경을 날마다 일과표에 동그라미를 치고 틈틈이 법문을 경청한지도 만 4년이 넘었다. 4년 동안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여러 번 바뀐 것 같다. 날마다 기도하기가 힘이 들어 어느 날은 울면서 하기도 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작은 마음을 갖고 인생살이 살기가 너무도 힘이 들어 세상을 외면하려 기도에 매달렸는지도 모
10년 전 능엄주·절수행…성격 극복집착 욕심 버리니 포용력, 이해 생겨 어느 날 법당에서 새 초에 불을 켰다. 심지가 새 것이라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심지의 불은 가물가물 흔들리며 꺼질듯 말듯 초 몸을 향하여 가는데 마치 꺼질듯 하던 작은 불꽃이 초를 만나는 순간 불꽃이 ‘우뚝’ 제 모습을 하고 여여하게 웃는 듯 보였다. 마치 애쓰고 기도하는 내 모습이 그곳에 있는 듯하다. 시댁이나 친정이 불교집안이라 일 년에 한두 번 절에 가곤 했었는데 10년 전 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스스로를 좁은 세상에 가두어 힘들게 살았는데 불교를 알고 절 수행을 접한 이후 그러한 욕구불만을 아마도 절을 하며 풀었던 것 같다. 108배, 300배, 500배,
매일 밤 다라니 21독-108배로 하루 회향매월 철야정진…항상 가족-주변에 감사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불을 밝히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21회 독송한다. 이어서 108배를 하고 관세음보살 3000 염송과 마하반야바라밀 독송을 한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공덕으로 원이 성취되고 바른 행을 하여 자비 보시할 수 있는 공덕자가 될 것”을 발원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주말을 맞아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일상에서 분주하기만 했던 내게 있어서 불교방송 포교사업팀을 따라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을 하는 시간은 어느새 내 삶에 없어서는 안될 감로수가 되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은 참회로 시작해서 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밤이 새도록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결혼 생활 꿈 남편 발병으로 좌절시아버님 덕에 불법인연 주력수행 시작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 한데 쉬어간들 어떠리.’ 시아버님의 육성이 담긴 시조창 테이프를 들으니, 꼭 생시인 듯 아버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밤이면 한바탕 세차게 비를 뿌리고, 아침이면 쾌청하게 맑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요즘에 제법 어울리는 시조이기도 하다. 아버님은 짚신과 나막신을 파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처럼, 팔십 평생을 땅 일구고 논밭 농사지어가면서 무려 팔 남매를 뒷바라지 하는 동안 바람잘 날 없으셨다. 그렇게 살다 홀연히 가신 아버님의 자취가 더욱 그리워지는 때이기도 하다. 지난 5월 3000배 정진 때는 법당에 가득한 부처님 모습 뒤
뜨거운 기운 느낀 뒤…통증 사라져 약 없이 3시간 앉아 결가부좌 정진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결가부좌수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되묻곤 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느냐고. 하지만 고행이 몸을 상하게 하는 것과는 달리 결가부좌는 오히려 몸을 건강하게 변화시켰다. 결가부좌를 시작한지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한 번에 20여 분 정도씩 앉아있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 즈음 나는 몸속에서 실 같이 가늘고 뜨거운 기운이 온 몸을 S자로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늘 퉁퉁 부어 있던 온몸의 붓기가 가라앉았다. 그러자 결가부좌 시간이 1시간여로 늘어났고 다시 두 달여가 더 지난 후 장에서 엄청난 양의 숙변이 빠져 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0여
악화된 몸상태서 만난 결가부좌 수행몸에 느껴지는 고통 참아내는 게 과제 원망하는 마음을 털어내고 참회와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하나 둘 새로운 인연들이 맺어지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겠다는 사람들도 나서 새로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생활은 다시 안정됐지만 한번 망가진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여전히 약을 달고 살았고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은 탓에 체중까지 늘어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그러던 중 평소 가까이 지내던 도반 자재행 보살의 권유로 결가부좌수행을 시작하게 됐다. 그 도반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서 결가부좌 수행을 배웠는데 그 스님은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셨던 법장 스님으로부터 결가부좌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면 수행방법을 알려주셨다.
10년 전 빚보증으로 전 재산 잃은 뒤21번 봉정암 오르며 자학하듯 고행 “스님, 앉는 자세가 특이하시네요. 왜 그렇게 앉으세요?” 처음 뵙는 스님께 나는 따지듯이 대뜸 질문을 드렸다. 그런데 그 스님 참 맘도 좋으시다.“보살님도 한번 이렇게 앉아보실래요? 이렇게 앉으면 참 좋습니다.” 결가부좌 수행법과의 첫 만남이었다. 버릇없다 꾸중 하실 법도 한데 오히려 한 수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고마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동안 나름대로 기도하고 참회한 공덕이 티끌만큼이라도 쌓여서 이런 수행을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지난부터 10년 전, 우연히 서준 친구의 빚보증 때문에 나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편 뒷바라지며 아이들 양육, 그리고
한때 욕심과 아상 가득했던 삶염불 후 ‘하심=행복’ 깨달아 그때 거울처럼 보이는 나의 마음은 사람을 대할 때 음탐심으로 끌어들였다 붙였다 하며 부와 명예가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고자 했던 욕심들과 상대를 존중하지 않은 행동과 말씨, 마음씨 그것이 내 인식의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이 꼴로 부처님 전에서 입을 열 수 없는 미천함을 보게 되었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과 마음 씀씀이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껴졌다. 내 자신의 무서운 용심의 세계를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 닦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이렇게 죄 많은 중생을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께서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아프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생각하면 일상생활을 대하는 마음의 태
중학시절 ‘금강경’ 읽고 한없이 눈물염불하며 가르침 실천하는 기쁨 느껴 중학교 2학년 시절, 집주변에 있는 절에 놀러갔다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게 됐다. 법당 안은 49재를 지내고 있었는데 누구의 49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스님을 따라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읽으면서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그때 당시에는 엄마 따라 절에 다녔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꼭 금강경을 꼭 공부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금강경 독송회에 인연 닿아 매일 금강경 7독과 정진하며 아상닦으며 마음 들여다보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그 사실을 양심으로나마 느낄 수 있지만 사실 금강경독송회에 가입할 당시만 해도 오직 나만 좋아지기 위해 부처님에게 다가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혜로운 삶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알아차림 하겠다 다짐하며 하루 시작 수행도 이제는 웰비잉이어야 한다. 길거리를 걷다보면 단전호흡, 명상, 요가 혹은 마음보는 수행이라고 적힌 간판이 많이 눈에 뛰는데 이는 요즘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으면 수행을 갈구하지 않는다. 괴로워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수행처를 찾는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 같은 번뇌를 안고 출가를 하셨다. 그러나 수행을 한다고 해서 다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시작한 것이 더 큰 문제를 만들 수도 있고 한없이 먼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수행도 수행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