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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은 소리치고 흔적 없이 죽어버렸잖는가”

  • 교계
  • 입력 2020.09.08 19:22
  • 수정 2020.09.11 21:23
  • 호수 1553
  • 댓글 9

법산 스님 ‘혜암 스님 학술대회’ 축사 화제
거침없는 언사로 후학들 수행풍토 비판
방장 원각 스님 “매섭고도 따뜻한 질책”

혜암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해 해인사 보경사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동국대 전 이사장 법산 스님. BBS불교방송 캡쳐
혜암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해 해인사 보경사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동국대 전 이사장 법산 스님. BBS불교방송 캡쳐

‘혜암은 뒷산 움막에서 뒤지라고 소리치고 흔적 없이 죽어버렸잖는가? 어디서 무슨 다람쥐 잣 까먹는 소리 어지간들 하고 자빠졌네.’

하루 한 끼에 수십 년간 눕지 않고 정진했던 ‘가야산 정진불’ 혜암성관 스님(1920~2001). 선수행자의 사표였던 혜암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보내온 축사를 본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국대 전 이사장 법산 스님이 게송 형식으로 쓴 축사였다. 법산 스님이 선학 연구의 권위자이고 정년퇴임을 앞둔 몇 해 전부터는 방학을 이용해 함양 벽송사와 남원 백장암 등에 방부를 들이고 화두를 잡았던 일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법산 스님의 축사는 시작부터 파격이었다.

‘가야는 꿈꾸는 곳인가요?/ 해인은 수영장인가요?/ 경허는 뭔 헛소리하고 갔나요?/ 성철의 주장자는 어디로 사라졌나요?’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한 가야산이 미몽에 쌓였고, 법성을 증득한 최고 경지인 해인(海印)의 의미를 상실한 것 아니냐는 에두름 없는 물음이었다. 다음 구절도 경허 선사와 성철 선사의 사자후를 찾아볼 수 없다는 매서운 질책으로 읽힐 수 있었다. 법산 스님은 거침없는 언사로 혜암 스님은 흔적 없이 죽어버렸고 다람쥐 잣 까먹는 소리한다고 지적했다. 직설과 반전이 다시 이어졌다.

‘허허!/ 대가리 들고 새벽별이나 한 번 쳐다봐/ 흔적 없이 사라진 반야의 초막/ 산새들 노래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성관의 외침/ 온 법계에 충만하여라.’

법산 스님은 게송을 마친 뒤 해인사 대중을 향해 견책과 당부의 말을 했다.

“오늘 우리 좋은 인연들은 혜암대종사 탄신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학술대회에 함께하여 입으로 이런저런 대종사의 선사상을 논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학술대회는 여기에 참가한 모든 대중은 몽땅 스스로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살아 그냥 피둥피둥 나가는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참으로 답답한 자들일 뿐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덕담 대신 축사 곳곳에서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날카로운 송곳이 번뜩였다. 법산 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설사 오늘 이 자리에서 죽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나가더라도 혜암대종사의 초막에 들었다가 나간 인연으로 언젠가는 오염의 일체 상을 싸그리 죽여 버리고 흔적 없는 반야의 혜암 초막에서 별빛에 빛나는 성관의 태평가를 함께 들을 찰라가 올 것입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면 이 세상 투쟁뇌고의 삼독심은 화탕지옥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스님은 축사는 게송으로 마무리됐다.

‘혜암대종사님!/ 텅 빈 초막은 어디에 두고/ 성관의 서릿발 같은 외침만/ 백로에 성성합니다.’

국제학술대회 관계자들은 법산 스님의 진심을 이해했고 선기 번뜩이는 축사를 책 뒷편 부록에 그대로 수록했다. 법산 스님이 국제학술대회 이틀째인 9월6일 오전 해인사 보경당에서 축사를 발표했을 때 뜻밖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방장 원각 스님은 “혜암 스님께서 치열하게 정진하고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셨지만 후학들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매섭고도 따뜻한 질책이 담긴 진심어린 축사였다”고 평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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