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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완주 위봉사 목조관음보살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

기자명 이숙희

보광명전 목조입상…인적 드문 새벽에 훔쳐가

사라진 지 28년 만에 서울 사립박물관 한 수장고서 발견돼 회수
관음보살 쓰고 있던 보관과 지장보살이 쥐고 있던 석장은 사라져
17세기 초 조성된 삼존불과 배치된 칠존불 가운데 두 구로 추정

사진1) 위봉사 목조관음보살입상, 1605년,  높이 153.4cm. 문화재청 제공
사진 2) 위봉사 목조지장보살입상, 1605년, 높이 140cm. 문화재청 제공

본존불상을 양 옆에서 보좌하는 협시보살상만 도난당한 경우가 가끔 있다.

1989년 9월 25일 새벽 2시 50분경에 전라북도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관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이 도난되었다(사진 1, 2). 도난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인적이 거의 없는 새벽 시간을 이용하여 훔쳐간 것으로 보인다. 이 보살상 2구는 2016년 28년만에 서울 한 개인의 사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됐다.

완주 위봉사는 백제 무왕 때인 604년에 서암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다. 1868년에 기록된 ‘극락전중건기’에 의하면, 신라 말에 최용각이란 사람이 상서로운 빛이 비치는 절터에서 세 마리의 봉황이 노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말에 이르러 나옹화상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는데 당시엔 전각이 모두 28동이며 산내 암자도 10개나 되는 대규모의 사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선교(禪敎) 31본산 중 하나로 전라북도 일대의 46개 사찰을 관리하는 거찰이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보광명전, 요사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버렸다. 보광명전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는 큰법당으로 대웅전의 또다른 이름이다.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목조건물로 보물 제608호로 지정되어 있고 후불벽 뒷면에는 높이 3m의 백의관음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불단의 아랫부분이 유실되어 백의관음보살의 다리가 완전히 보이지 않지만 1476년에 제작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 벽화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벽화라 할만하다.

위봉사 보광명전 내부, 1989년 도난전 사진. 완주 위봉사 제공
위봉사 보광명전 내부, 1989년 도난전 사진. 완주 위봉사 제공

도난되기 이전의 사진을 보면, 위봉사 보광명전 안에는 석가삼존불상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관음과 지장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었다(사진 3). 도난 후 관음보살의 보관과 지장보살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석장(錫杖)이 없어진 것 외에는 현재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두 보살상은 높이 153.4cm, 140cm로 크기와 머리 형태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늘씬한 몸매와 작은 얼굴, 여래식의 착의법, 옷주름 표현 등은 거의 유사하다. 관음보살상은 머리카락을 묶어 틀어올린 높은 상투와 귀 양 옆과 양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있으나 원래는 꽃문양으로 장식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었다. 얼굴은 네모난 형태에 두툼한 눈두덩이로 인하여 무표정한 인상이다. 몸에는 양 어깨를 덮은 여래식의 옷을 입고 있는데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U자형으로 길게 내려온 옷주름이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가슴 위에 표현된 목걸이도 단순하면서 깔끔하다. 지장보살상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가슴 앞에서 무릎까지 늘어진 옷주름의 끝부분이 뾰족하게 처리된 점만 관음보살상과 다를 뿐이다.

그런데 위봉사 목조보살입상 2구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한 예들이 인근 지역의 익산 관음사와 혜봉원 대웅전에 1구씩 전해지고 있다. 모두 153cm 정도의 높이로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인 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무표정한 얼굴이나 여래식의 착의법, 단순한 형태의 목걸이와 옷주름 등에서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최근 익산 관음사 목조보살입상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을 통해 1602년 의암 스님이 위봉사의 산내 암자인 북암에 봉안할 삼존불상을 조성하고 1605년 8월에 조각승 원오(元悟), 충신(忠信), 청허(淸虛), 신현(信賢), 신일(神釰) 스님 등이 문수, 보현, 관음, 지장보살 등 4구를 조성하였는데 그중 2구가 회수한 불상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최선일, ‘17세기 조각승과 불상연구’, 한국연구원, 2009). 삼존불에 관한 내용은 없지만 보살상의 모습으로 볼 때 같은 조각승의 작품으로 볼 수 있어 꽤 설득력 있는 설이다. 그렇다면 위봉사 보광명전에는 17세기 초기에 조성된 삼존불상과 4구의 보살입상으로 구성된 칠존 형식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많지 않지만 1617년에 조성된 공주 갑사 소조삼불좌상과 사보살입상을 비롯해 하동 쌍계사 대웅전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에 조선 후기의 칠존불상이 남아 있다. 연대상으로 본다면, 위봉사의 불상이 칠존불 형식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셈이다.

칠존불일 경우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좌상과 4구의 보살입상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4구의 보살상은 그 존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석가불의 협시보살로 문수와 보현보살상을 배치하면서 당시에 유행했던 아미타불의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을 배치하는 것이 통례였다. 회수된 위봉사 목조보살상 2구는 조성 발원문과 도상적 특징에 따라 관음과 지장보살상임이 분명하다. 이는 고려시대 이후 지장보살 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아미타불의 협시인 대세지보살상 자리에 지장보살상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익산 관음사와 혜봉원의 두 상은 도상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지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으로 보는 것이 순리에 맞다. 이렇듯, 위봉사 보광명전의 칠존불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불상형식이나 삼존불상을 본존으로 하고 있어 삼세불상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이전에 등장하는 칠존불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위봉사 목조보살상 4구를 제작한 원오 스님 또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조각승으로 그 유파에 속하는 충신, 청허, 신현, 신일 스님과 함께 같은 해에 김해 선지사 목조불좌상을 제작하는데에도 참여하였다.

이런 완주 위봉사 법당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현재 보광명전에는 목조석가불좌상 좌우에 흙으로 만든 문수, 보현보살입상이 배치된 삼존불상만 남아 있다. 회수된 목조관음보살과 지장보살입상은 석가삼존불상 사이에 서 있고 문수와 보현보살상은 삼존불상의 바깥쪽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7구의 불상이 나란히 배열된 법당은 규모가 크고 장엄했을 것이다. 삼존불상의 후불도는 지금과 같이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로 구성된 3폭의 ‘삼세불도’가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이 4구의 보살입상은 그 자체로도 조선 후기의 보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다시 모여 한 짝을 이루게 되었을 때 칠존불의 원래 모습과 함께 위봉사의 위상을 더욱 잘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81호 / 2021년 4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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