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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끊이질 않던 근현대기, 사부대중 인재 양성에 기꺼이 헌신

불교의 스승 - 4. 근현대 불교에서의 스승

현실 직시해 승가오칙 세운 한암, 개방적 교육철학 고수한 탄허
비구니 교육에 철저했던 만공, 남녀노소에게 긍정 전파한 경봉
대학생에게 희망 찾은 성철까지…스승들 행보 우리가 계승해야

1) 경허 스님(1849~1912). 2) 만공 스님(1871~1946). 3) 한암 스님(1876~1951). 4) 경봉 스님(1892~1982). 5) 성철 스님. 6) 탄허 스님(1913~1983). 근현대 불교 스승들은 상좌나 사찰 대중만이 아닌 수많은 사부대중을 위한 교육에 주력했고 헌신했다.
1) 경허 스님(1849~1912). 2) 만공 스님(1871~1946). 3) 한암 스님(1876~1951). 4) 경봉 스님(1892~1982). 5) 성철 스님. 6) 탄허 스님(1913~1983). 근현대 불교 스승들은 상좌나 사찰 대중만이 아닌 수많은 사부대중을 위한 교육에 주력하고 헌신했다.

스님은 스승이다. ‘인천(人天)의 사표(師表)가 스님’이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참다운 스님은 상좌, 후학, 재가불자가 불법을 따라 살도록 알려준다. 경책하며 교육을 시킨다. 자신의 상좌가 승려 본분을 행할 수 있도록 안내하며 그 연후에는 다수의 후학, 재가불자에게 법을 일러주고 가르친다.

근현대기 불교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라를 빼앗겼고 승가공동체는 무너졌으며 계율은 이완됐다. 이에 산중불교에서 도회지 불교로,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로 나가야 한다는 슬로건이 강력히 제기됐다. 승려 정체성 회복을 위한 정화운동과 교단 재건을 위한 포교·역경·도제양성 등 불교 현대화 활동이 시작되긴 했으나 불교 좌표는 여전히 불안했다. 불교 정체성과 진로가 풍전등화와 같았던 그 시절. 그럼에도 참다운 스님들은 각처에서 불교를 수호했고 후학을 안내했으며 불조 혜명을 계승했다.

참다운 스님이 사부대중을 가르친 내용은 다양했다. 이는 직계 상좌들을 안내했던 ‘미시적 측면’과 다수 스님 및 재가불자를 가르쳤던 ‘광의적 측면’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후자를 교육으로 인식하고 일부 사례를 들추어 그에 담긴 의의를 주목해보겠다. 

최우선으로 살펴볼 사례는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했던 한암 스님(漢巖, 1876~1951)의 행보다. 한암 스님은 1910년대부터 도인으로 명망이 높았다. 스님은 봉은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식민지 상황에 부화뇌동을 하는 지식인 행태에 분노하고 1926년 산중 은거했으니 그곳이 바로 상원사였다. 

한암 스님은 상원사 선방에서 수좌들을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가르쳤다. 대중방에서 참선을 하고 어록을 읽어주고 운력도 함께하며 일상을 지도했다. 그런 스님 모습에 선방에서 칼잠을 자고 감자를 먹으면서도 배우려는 수좌들이 몰려 들었다. 이때 한암 스님은 전통과 현실을 직시해 스님들을 가르칠 교육 준칙을 성안했다. 승가오칙(僧伽五則)이었다. “출가사문이라면 참선·간경·염불·의식·가람수호 가운데 반드시 하나 이상은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한암 스님이 강조한 승가오칙은 오대산에서 공부했거나 다녀간 스님이라면 누구나 들었던 가르침이었다. 올바른 ‘스님 노릇’을 위한 경책이기도 했다. 또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실에 맞게 창조한 교육 이념이었다. 지난 100년간 스님들의 훈육을 위한 준칙을 제시한 스님이 있었는가? 

여기에서 한암 스님의 진실성이 드러난다. 스님의 교육철학은 상수 제자였던 탄허 스님(呑虛, 1913~1983)에게 전해졌다. 한학 전문과정을 마친 후 출가를 한 탄허 스님은 10년 간 한암 회상에서 경전과 어록을 독파했다. 그로 인해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상원사에 설립된 삼본사연합승려수련소에서 중강을 하며 한암 스님의 가르침을 지켜봤던 탄허 스님은 1956년 월정사에 오대산수도원을 세웠다. 불교정화운동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는 5년간 무료로 불교를 배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후  수도원은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이전됐으나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물론 행자, 의사, 문학평론가, 대학생 등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수십명이 찾아왔고 스님 가르침을 배웠다. 탄허 스님의 교육은 개방적이었다. 이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원력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광폭적인 교육 결사와 교육 철학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이와 유사한 사례는 덕숭산 수덕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덕숭산 천장암,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에는 근대 선풍을 연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만공 스님(滿空, 1871~1946)은 근세기 선풍을 진작한 후 삼수갑산으로 은둔의 길을 떠난 경허 스님(鏡虛, 1849~1912)에게 가르침과 전법을 받았다. 만공 스님은 1905년 덕숭산에 토굴(금선대)을 짓고 수행하며 찾아온 후학들을 지도했다. 1920년대에는 수덕사 내 능인선원에서 비구 수좌들을, 견성암에서 비구니 수좌들을 가르쳤다. 후학 지도는 수덕사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서울 선학원,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등 각처를 순방하며 후학을 지도했다. 스님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갔다. 고된 발걸음의 수고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이 가운데서도 비구니스님들을 향한 지도는 눈물겨울 정도로 지독했다. 만공 스님은 ‘정법 옹호’ ‘자리이타 실천’ ‘선문화 진흥’이라는 3대 발원을 표방하고 ‘도량(道場)’ ‘도사(道師)’ ‘도반(道伴)’ 3대 요건이 갖춰진 곳에서 수행할 것을 당부했다.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고 스승에게 의지해야 하며 탁마를 해줄 도반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만공 스님은 “도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니 내 법문을 들은 나의 문인들은 도절(道節)을 지켜 내가 가르치던 방식을 잊지 말고 지켜 갈지니, 도절을 지켜가는 것이 법은(法恩)을 갚는 것이 되고 정신적·시간적으로도 공부의 손실이 없게 되나니라”고 했다. 스님 어록에 나온 이 투철한 수행 철학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스님의 교육 철학은 민족 운동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만공 스님은 일제 식민 통치가 엄혹해지자 1942년부터 서산 간월암에서 ‘일제 패망’ ‘조국 독립’을 발원하는 1000일 기도를 수행했다. 일제의 죄악 7가지(우리말 못 쓰게 한 죄, 징용·징병을 자행한 죄 등)가 멈춰지길 기도했는데 정진이 끝난 3일 뒤 일제는 항복을 선언했고 우리 민족은 해방됐다. 이때 스님이 무궁화 꽃잎으로 쓴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유묵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스님의 정진에는 비구니스님들도 함께 했다.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은 만공 스님의 철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법희, 일엽, 응민, 대영, 선경, 본공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스님이 덕숭산에서 배출됐다. 아! 만공 스님의 가르침이 그립다.  

비구니스님을 지도한 행적은 한암 스님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요컨대 한암, 만공 스님의 비구니 교육에 담겨진 정신을 찾아 숨결을 불어넣을 시절이 왔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재가불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사례는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경봉 스님(鏡峰, 1892~1982)은 현대 불교 선승으로 명망 높았다. 스님은 통도사 주지와 강원 원장,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근현대기 통도사를 지켜낸 주역이었다. 이 가운데 극락암 호국수도원(1953~1982)에서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고 불법을 일러준 행적들은 밤하늘 별과 같이 선명히 남아있다. 

경봉 스님은 수좌들이 깨칠 수 있도록 늘 안내했고, 스님을 찾아온 남녀노소 대중에게도 인간으로서 멋있게 살 수 있는 방책을 다양하게 알려주었다. 그 방책에는 일필휘지의 유묵도 있었다. 

경봉 스님은 인간이 가진 고통의 근본은 ‘사람’과 ‘재물’ 두 문제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업보로 고통을 받지만한 생각을 돌이켜 새로운 삶을 개척할  능력도 동시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법문에서 “사바 세계를 무대 삼아 연극 한바탕 멋있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면서 “일상 생활의 도둑놈인 탐·진·치 삼독과 함께 살지 말고, 망상·근심·걱정을 털어버려 쾌활하고 낙천적인 기분으로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사바 세계를 무대로 멋진 연극, 멋진 삶을 살아 참 생명을 누리자는 말씀이었다. 

경봉 스님의 생생한 교육 철학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스님 법문에 감동을 했고 극락암은 몰려든 인파로 쉴 새가 없었다. 스님의 법 향기가 극락암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지 궁금하다.

재가불자를 지도하고 인재 양성에 몰두한 행적은 해인사 성철 스님(性徹, 1912~1993)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스님의 사상에 대해선 다양하게 다뤄졌으나 재가불자 양성에 대한 모습을 주목한 연구는 희박하다. 

성철 스님은 인재 양성 차원에서 대학생 불자들을 무척 아꼈다. 봉암사 결사(1947~1950)와 성전암 은둔 수행(1955~1964)을 거쳐, 성철 스님이 사회로 나온 시점은 운달산 김룡사 시기(1965~1966)였다. 이때 스님은 대중들에게 공개 법문을 했다. 이를 운달산 법회라고 부른다. 

1966년 1월 김룡사 사부대중과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소속 학생 등 20여명은 이곳에서 성철 스님에게 50일 간 최초 특강을 들었다. 스님은 1967년 해인총림 방장이 된 직후에도 대불련 학생들을 위해 몇 차례 특강을 했다. 이는 다시 주목되어야 할 역사다. 이런 행보는 대학생 불자들을 인재로 만들겠다는 의도처럼 보인다. 그 무렵 성철 스님은 “젊은 불자들이 새로운 불교, 대중 불교, 인간 종교를 만드는 데 역군이 되어 줄게야”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스님의 의중을 살펴볼 수 있다. 대학생을 매개로 새로운 한국불교를 꿈꾸었던 성철 스님의 지성은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

김광식동국대 특임교수
김광식동국대 특임교수

지금껏 살펴보았듯 근현대 공간에서 큰스님들은 상좌와 사찰 대중만을 위한 교육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부대중을 위한 교육에 헌신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찾지 않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제 그 정신을 찾아 정리하고, 이를 계승하는 행보를 걸어가야 한다.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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