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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청송 대전사 영산회상도 및 신중도, 지장보살도

기자명 이숙희

도굴꾼, ‘권선징악’ 강조한 불화마저 훔쳐가

청송 대전사서 2000년 9월 영산·신중·지장도 도난
사립박물관장 은닉처서 발견…장황·화기 등 훼손돼
화면 구성·인물 표현 등 18세기 불화 특징 보여줘

사진 1) 영산회상도, 조선후기, 크기 315X365cm.
사진 1) 영산회상도, 조선후기, 크기 315X365cm.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442-6에 위치한 대전사(大典寺)에서 불화 3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영산회상도’와 ‘신중도’는 2000년 9월4일 저녁 9시부터 새벽 4시 사이에 도난됐고, ‘지장보살도’는 다음날인 9월5일 도난됐다. 그중 가장 먼저 회수한 것은 ‘신중도’로 2014년 5월29일이며 ‘영산회상도’는 2016년 10월, ‘지장보살도’는 2020년 7월에 서울의 한 개인박물관장의 은닉처에서 각각 발견돼 도난문화재임을 확인했다.

청송 대전사는 67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919년에 주왕의 아들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에 ‘청송 주방산에는 주방사(周房寺)라는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 제33권에 의하면 주방사는 지금 없어졌고 그 아래 ‘신증’ 항목에 대전사가 주방산에 있다고 한다. 더욱이 경내의 보광전(보물 제1570호)은 1976년 중수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72년에 중창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대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당시에는 주방사라 불렀으나 17세기 후반에 중창하면서 절이름도 대전사로 바꿨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조사된 재산대장을 보면, 청송 대전사에는 소조삼존불상과 석조불상 1구, 철조불상 3구, 나한상 16구, 시왕상 19구, 불탱 1점, 지장탱 2점, 신장탱 1점, 후불탱 2점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일제강점기 경북 사찰재산대장 집성’상, 경상북도·(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18). 지금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보광전의 석조여래삼존상과 명부전의 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지장탱화가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회수된 ‘영산회상도’는 크기가 3m가 넘는 대형 불화로 보광전(寶光殿)에 봉안되었던 것이다(사진 1). 도난 후 장황이 일부 잘라져 있고 화기는 원봉안처를 감추기 위해 검게 칠하여 알아볼 수 없다. 화면은 4단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석가불좌상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아래쪽에는 문수와 보현보살을 배치했으며 그 주위로 관음과 지장보살을 비롯한 6구의 보살, 나한, 신장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상을 2구씩 그려 넣어 외호하고 있다. 이 그림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인도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40명이 넘는 권속들은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는데 크기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고 위로 갈수록 상반신만 그려 넣었다. 위계에 따른 원근법을 사용한 존상 및 권속들의 병렬과 좌우 대칭적인 구도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불, 보살상을 제외한 나한과 신장상의 얼굴에 선염법이 사용된 것도 서양채색법에 영향을 받은 시대적 특징이다. 아쉽게도 화기는 훼손되었으나 수화승 밀기(密機)가 확인되어 그가 활동했던 18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 2) 신중도, 조선 후기, 크기 265X205cm.
사진 2) 신중도, 조선 후기, 크기 265X205cm.

‘신중도’는 가로 265cm, 세로 205cm의 액자 형태로 보광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사진 2). 신중이란 부처의 정법을 수호하고 지키겠다는 여러 호법신을 그린 것으로 제석천, 범천, 위태천, 사천왕, 팔부중 등을 말한다. 본래 인도의 고대 신들이었지만 불교에 수용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민간신앙의 신까지 융합하여 독특한 형식으로 변하였다. 화면은 4단으로 나누고 여러 존상을 그려 넣었는데 본존과 권속들의 크기가 비슷하다. 대부분의 신중은 상반신만 그리되 제일 앞에 서있는 권속만 전체 모습을 묘사하였다. 또 조선 후기 불화로는 예외적으로 좌우대칭의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 상단에는 제석천을 중심으로 왼쪽 편에 꽃을 들고 있는 보살과 날개깃이 달린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는 위태천(韋駄天), 그 위로 천동, 천녀 등이 배치되었다. 제석천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그외 권속들은 모두 측면을 하고 있다. 제석천 아래로는 다양한 투구를 쓰고 무기를 들고 있는 사천왕을 비롯하여 팔부중 등 신장상들이 상하로 배열되었다. 신중들은 각자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듯이 과장된 표정과 다양한 몸짓을 하고 있다. 제석천이 주존이라면, 불화의 명칭을 ‘제석도’라 해야 하지만 위태천도 함께 등장하고 있어 ‘제석천룡합위도(帝釋天龍合位圖)’ 또는 ‘신중도’로 부르는게 맞다. 제석과 위태천을 상단, 신중을 하단의 중심에 배열한 이런 형식의 ‘신중도’는 18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많이 그려졌다.

사진 3) 지장보살도, 조선후기, 크기 332X275cm. 문화재청 제공
사진 3) 지장보살도, 조선후기, 크기 332X275cm. 문화재청 제공

‘지장보살도’는 가로 332cm, 세로 275cm의 크기로 명부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사진 3). 전체 화면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많은 권속들이 4단으로 배열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제일 아랫단에는 지장보살의 협시인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서있고 그 옆으로 시왕이 배치되어 있다. 2단과 3단에는 문관복을 입은 시왕과 검은 복두를 쓴 판관, 천중(天衆)들, 그리고 최상단에는 용수보살 등 6보살, 신중, 천동, 천녀들이 모여 있다. 이처럼 화면 구성이 이전과는 달리 상하 2단에서 4단으로 변형되고 많은 권속들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 불화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또 지장보살의 자세가 반가부좌에서 결가부좌로 바뀌는 것도 이 시기 불화의 특징이다. 특히 지장보살 아래쪽에 표현된 선악동자는 19세기의 경기도와 경상북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권선징악의 윤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그림 역시 지장보살과 시왕이 결합되어 있는 점에서 정확하게는 ‘지장시왕도’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봉안되는 전각도 명부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나 극락전과 같은 주불전의 좌측 또는 우측 벽에 걸리게 된다.

청송 대전사 불화 3점은 화기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화면 구성이나 존상들의 배열 방식, 인물 표현, 새로운 도상의 등장 등으로 볼 때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화면은 붉은색과 초록색이 주조를 이루며 밝은 코발트빛의 청색이 더해져 있다. 채색이 두껍고 진하게 칠해져 있는 것도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다. ‘영산회상도’와 ‘신중도’는 독특한 구성과 화풍으로 인해 최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600호 / 2021년 9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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