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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 17편  달성 유가사 ‘괘불도’ 및 ‘삼불회도’  ‘나한도’

기자명 이숙희

일제강점기부터 근래까지 수차례 여러점 도난

827년 창건, 임란 후 수차례 중창…도성암은 영남 유명 수도처
인물표현서 조선후기 불화특징 보여준 괘불도는 2020년 회수
2007년에 도난된 나한도 8점 등 불화 10점은 아직 행방 묘연

사진1) 유가사 괘불도, 조선후기, 크기 4m. 필자 제공.
사진1) 유가사 괘불도, 조선후기, 크기 4m. 필자 제공.

대구 달성군 유가읍 유가사길 161 유가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괘불도’ ‘지장탱’ ‘후불도’가 1993년 7월에 도난되었고 나한전의 ‘나한도’ 8점은 2007년 5월, 산내 암자인 도성암의 ‘삼불회도’는 2000년 8월에 각각 도난되었다. 도난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20여년만에 서울의 한 개인 사립박물관장의 수장고에서 발견되어 2014년 6월 ‘삼불회도’를 먼저 회수하고 2020년 6월 ‘괘불도’도 되찾았다. 그 외 ‘나한도’를 비롯한 불화 10점은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대구 유가사(瑜伽寺)는 827년 도성(道成)이 창건하고 889년 원잠(垣岑)이 중건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중수된 후 한때 거느린 산내 암자가 99개나 되고 3천명의 승려가 머물렀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기 때문에 오래된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54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을 보면, ‘유가사는 비슬산 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시문집인 ‘유헌집(游軒集)’에도 1859년에 도동서원을 참배하고 유가사를 유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면 유가사는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 및 중창되면서 19세기 중반까지 사찰로서의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현재 산내 암자로는 수도암과 도성암이 있는데 도성암은 영남지역에서 수도처로서 유명하다.

유가사 대웅전의 ‘괘불도’는 길이 4m가 넘는 대형 불화로 사찰의 법회나 의식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사진 1). 전반적으로 덧칠되어 색감이 손상되어 있지만 화면의 구성과 인물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중앙에 석가불좌상을 크게 그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광배 양쪽에 보살형의 노사나불과 비로자나불을 작게 그려 넣었다. 크기에서 볼 때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에 비해 석가불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보신(報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석가불로 구성된 삼신불(三身佛)을 그리되 석가불을 중심으로 모든 권속을 생략하고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삼신불 형식의 괘불은 ‘영산회상도’나 ‘삼세불회도’ 처럼 많이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서울과 경기지역의 왕실 관련 사찰에서 그린 예들이 전해진다.

화면 아래쪽에 있는 화기(畵記)는 도난되기 전에는 녹색 바탕이었으나 지금은 붉은색 바탕에 묵서로 적혀 있고 인위적으로 글자를 지운 흔적도 있다. 아마도 도난된 이후에 새로 개채하면서 가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기에 의하면 ‘1748년(乾隆 49) 3월15일에 영산회상을 그렸다’는 내용이 확인되지만 그 당시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화면 전체는 밝은 주홍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법의와 문양 등에 밝은 청색을 일부 사용하여 18세기 후반 이후의 불화와 유사성이 보인다.

사진2) 유가사 삼불회도, 조선후기, 크기 176X146cm. 문화재청 제공.
사진2) 유가사 삼불회도, 조선후기, 크기 176X146cm. 문화재청 제공.

유가사 도성암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삼불회도(三佛會圖)’는 가로 176cm, 세로 147cm의 크기로 채색이 일부 박락되었고 화기도 절반 이상 잘려나가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사진 2).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단에는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가불과 아미타불이 크게 그려져 있고 하단 중앙에는 관음보살이 배치되었다. 비로자나불상 무릎 아래로는 문수와 보현보살이 서 있고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도 확인된다. 그 주위로는 여러 보살과 제자, 호법신들이 배치되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 석가불, 노사나불을 삼신불로 보고 있지만 노사나불 대신에 아미타불을 배치한 경우도 종종 있다. 이와 같이 비로자나불과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결합시킨 형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아미타신앙이 삼신불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불회도’는 조선 후기에 후불도로 제작되어 사찰의 대광명전이나 대적광전에 주로 봉안되었다.

유가사 나한전의 ‘나한도’ 8점과 지장탱, 후불탱은 아직까지 회수하지 못했다. 그중 ‘나한도’만 사진이 남아 있는데 크기는 대략 가로 81cm, 세로 63cm이며 손상된 부분이 거의 없고 채색 상태도 좋은 편이다(사진 3). 다행히 한 폭에 적혀 있는 화기를 보면, 1862년(同治元年) 11월 17일에 십육나한을 8폭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한 화면에 십육나한을 두 명씩 나누어 그렸는데 소나무를 배경으로 삼은 나한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이 다양하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채색에서도 붉은 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가사(袈裟)에 일부 청색을 사용하여 조화롭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나한의 모습은 18세기 나한도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이 전통은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전체 화면에서 나한과 배경의 크기가 거의 같고 나한이 불교적인 존재 보다는 신선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도 19세기 나한도의 특징이다. 이렇듯 십육나한은 불, 보살에 비해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친근감이 있는 존재로서 모든 사람들의 소원성취를 도와주는 신통력을 가진 분들이다.

사진3) 유가사 나한도, 1862년, 크기 81X63cm. 문화재청 제공.
사진3) 유가사 나한도, 1862년, 크기 81X63cm. 문화재청 제공.

대구 유가사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많은 불교문화재들이 있었다. 그러나 외딴 산중에 위치한 탓에 유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일제강점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도난의 위기를 겪어왔다. ‘동아일보’ 1933년 8월17일자 기사를 보면, “지난 7월 29일에 유가사에 괴한이 침입하여 금불상 1구를 훔쳐갔다. 현풍면 주재소에서 범인을 탐색했으나 아직 잡지 못하였다. 그 불상은 원래 도성사라는 절에 있었던 것인데 도난될 우려가 있어 유가사에 옮겨 놓은 것을 며칠이 되지 않아 도난되었다는 것이다(이숙희, ‘잃어버린 불상을 찾아서’, 미진사, 2015 참고).”라고 보도됐다. 이 불상에 대해서 이후 찾았다는 기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현재 유가사 경내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석탑 역시 1920년에 절 부근에 있었던 원각사 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유가사는 오랜 세월 탓에 절의 규모가 작아지고 이렇다할만한 유물도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서 상당히 번창했던 큰 사찰로서 중요 역할을 해 왔던 것 같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604호 / 2021년 10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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