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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세상을 바라보는 두 시각

기자명 마성 스님

비관·낙관 두 극단서 벗어나 알아차려야 한다

붓다, 현실에 바탕 둔 인생·세계관으로 제자들에 사물 직시 강조
우리는 부정적 측면·긍정적 측면 상존하는 현실세계 몸 담고 있어
어느 한 쪽 치우치지 않으며 중도로 바라보는 ‘두 눈 가진 자’ 돼야

스리랑카 갈 위하라(Gal Vihāra)에 새겨진 선정불(禪定佛). 붓다는 중도적 입장에서 중생들을 교화했다.
스리랑카 갈 위하라(Gal Vihāra)에 새겨진 선정불(禪定佛). 붓다는 중도적 입장에서 중생들을 교화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전자를 비관주의라고 하고, 후자를 낙관주의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두 가지 시각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비관주의도 아니고, 낙관주의도 아니며, 현실주의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둔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가르쳤다.

초기불교에서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덧없다[諸行無常]’, ‘모든 형성된 것들은 괴로움이다[一切皆苦]’, ‘모든 법들[諸法]은 자아가 없다[諸法無我]’, 그리고 ‘현상계 제법은 본질적으로 부정하다[不淨]’고 가르친다. 이 현상계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그렇게 보아야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현상계 제법은 무상이 아니라 상(常)이고, 고(苦)가 아니라 낙(樂)이며, 무아(無我)가 아니라 아(我)이고, 부정(不淨)이 아니라 정(淨)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상(常)・낙(樂)・아(我)・정(淨)을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주장을 초기불교에서는 ‘네 가지 왜곡된 견해’, 즉 사전도견(四顚倒見)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본질적으로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영원한 것을, 괴로움과 분리될 수 없는 것에서 행복을, 어떠한 자아와도 연결되지 않은 것에서 자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에서 기쁨을 찾거나 발견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반대의 주장이 나타나는 것은 현상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고관(苦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고(人間苦)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고(苦)를 극복한 낙(樂)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대승불교에서는 비록 중생들이 번뇌에 덮여 있지만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력, 즉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자가 부정적 시각이라면 후자는 긍정적 시각이다.

이상에서 보듯, 초기불교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고, 대승불교는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대승경전에서도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도 발견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T9, 13b)에서 “삼계는 불타는 집[三界火宅]”이라 표현했고, 다른 문헌에서는 “사생은 괴로움의 바다[四生苦海]”라고 표현했다. 반면 같은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대로 꽃으로 장엄된 아름다운 부처의 세계라는 것이다.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시냇물 소리 그대로가 광장설법(廣長說法)이거늘, 산 경치가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한밤에 들려온 팔만사천의 게송이여! 훗날 무슨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리오!(溪聲便是廣長說,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라고 노래했다. 이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시냇물 소리에 구현되고, 산 경치가 그대로 법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화엄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대승불교 내부에서도 부정과 긍정이라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금강경’을 비롯한 반야부 계통의 경전에서는 절대부정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른바 ‘즉비(卽非)의 논리(論理)’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다시 긍정으로 끝맺는다. 이를테면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T8, 749c)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T8, 751c) 등이다. 반면 ‘화엄경’은 절대긍정을 설한다. 이른바 꽃으로 장엄된 세계가 그대로 연화장세계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금경경’이나 ‘화엄경’보다 더 후대에 성립된 밀교의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에서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동시에 묘사하고 있다. 밀교의 교리와 사상을 보다 시각적이고 육감적이며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만다라(曼茶羅, Maṇḍala)이다. 만다라는 깨달음의 세계를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와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로 체계화시켰다. 태장계만다라는 ‘대일경’의 사상을, 금강계만다라는 ‘금강정경’의 사상을 각각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태장계만다라는 중생에게 원래 갖추어 있는 맑고 깨끗한 본성을 나타낸 것이고, 금강계만다라는 중생이 아직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의 상태에서 수행을 하여 그 본성인 보리심을 깨달아가는 수행의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전자가 불세계를 묘사한 긍정적 시각이라면, 후자는 중생계를 묘사한 부정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종류의 만다라, 즉 태장계만다라와 금강계만다라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본래 본체(本體)가 서로 같기 때문에 불이(不二)의 관계라는 것이다.

붓다는 ‘전법륜경’에서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 majhimā paṭipadā)를 완전히 알아차렸다(abhisambuddhā).” 그는 일생동안 중도적 입장에서 중생들을 교화했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지도 않았고, 또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았다. 비관과 낙관이라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실천했던 분이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7-1997)가 지적했듯이,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W.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p.17]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언제나 상존(常存)하고 있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지만 나쁜 사람도 있다. 어느 한쪽만을 바라보고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부정적으로 진단하거나 긍정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외눈박이’와 다름없다.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보면서도 중도적 입장에서 세상을 바르게 보는 사람이 바로 ‘두 눈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608호 / 2021년 11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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