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하면서 업(業)을 짓는다. 그 중에서 입으로 짓는 행위, 즉 말과 글이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고 산다”는 속담이 있다. 실제로 말 한마디로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소원했던 관계가 개선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 즉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이라고 경계했다. 전당서(全唐書) 설시편(舌詩篇)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반대급부로 온라인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런데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올라오는
요즘은 교학보다 수행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낀다. 수행에 있어서 사띠(sati)의 중요성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bhāvanā)에서 사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한마디로 사띠 없는 수행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만큼 사띠가 수행에서 중요하다는 뜻이다.‘아난다 숫따(Ānanda-sutta, 阿難經)’(AN10:82)에서 붓다는 열 가지 불가능한 경우와 열 가지 가능한 경우에
‘아리야와사-숫따(Ariyavāsā-sutta, 聖居經)’(AN10:20)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성자들도 ‘열 가지 성스러운 삶’을 살았고, 현재의 성자들도 ‘열 가지 성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며, 미래의 성자들도 ‘열 가지 성스러운 삶’을 살 것이라고 했다. 이 경과 대응하는 ‘증일아함경’ 제42권 제2경(T2, 775c)에서는 성현들이 사는 곳에 ‘열 가지 일’이 있다고 설해져 있다. 두 경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아리야와사-숫따’에 의하면, ‘열 가지 성스러운 삶’이란 “다섯 가지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전자를 비관주의라고 하고, 후자를 낙관주의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두 가지 시각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비관주의도 아니고, 낙관주의도 아니며, 현실주의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둔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가르쳤다.초기불교에서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덧없다[諸行無常]’, ‘
세상 사람들은 형상을 통해 부처를 보려고 하고, 소리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형상이나 소리로는 부처를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 나오는 유명한 사구게(四句偈)다. 불자들은 이 게송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형상이나 소리로 부처를 구한다. 이를테
대법원 청사 정면에는 자유・평등・정의라는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평등・정의를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사법기관이 대법원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자유・평등・정의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평등・정의는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즉 ‘자유’와 ‘평등’은 대립되는 이념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 등으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된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어떤 가치에 토대를 두느냐에 따라 정의의 개념이 달라진다. 존 롤스
붓다의 가르침인 법(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재물(財物)을 따를 것인가? 다시 말해서 법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 출가자라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붓다는 ‘담마다야다-숫따(Dhammadāyāda-sutta, 法嗣經)’(MN3)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대들에 대해 ‘어떻게 나의 제자들이 재물의 상속자가 아니라 법의 상속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불쌍히 여긴다. 비구들이여, 만일 그
승가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난다. 승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승가쟁사(僧伽諍事)’라고 한다. 줄여서 ‘승쟁(僧諍, saṅgha-adhikaraṇa)’이라고 부른다. 승쟁에는 크게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른바 언쟁(言諍), 멱쟁(覓諍), 범쟁(犯諍), 사쟁(事諍)이 그것이다. 언쟁이란 말다툼으로 인한 쟁사이고, 멱쟁은 교계(敎誡)로 인한 쟁사이며, 범쟁은 범계(犯戒)로 인한 쟁사이고, 사쟁은 잘못된 갈마(羯磨)로 인한 쟁사이다.승가 내부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때 재가신자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그 해답을 율장 구섬미
불교승단은 보름마다 실시하는 포살(布薩, uposatha)과 함께 자자(自恣, pavaraṇa)라는 훌륭한 제도를 갖고 있다. 자자는 3개월 안거(安居, vassa)의 마지막 날, 전체 대중이 한 자리에 모여 법랍이 가장 높은 장로부터 지난 3개월 동안 자신의 허물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지적해 달라고 요청한다. 만일 지적을 받으면 잘못을 참회하거나 해명해야 한다. 이러한 갈마를 통해 자체적으로 승단을 정화하고 승단의 화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그러면 ‘자자건도(自恣犍度)’는 어떻게 제정되었는가? 붓다께서 사위성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기존의 정치인은 물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권력욕]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다. 대선에 출마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과연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느냐 하는 것이다.정치에 대한 유혹은 참으로 뿌리치기 어렵다. 깨달음을 증득한 붓다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증거를 초기경전에서 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니까야를 읽는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대응하는 아가마와 대조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 선명하게 이해될 때도 있다. 초기경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동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에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경이 요즘에는 가슴에 와 닿는 경우도 있다. 연륜이 쌓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최근 ‘빱바뚜빠마-숫따(Pabbatū pa ma-sutta, 산의 비유경)’(SN3:25)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 경은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王) 왕과 붓다의
재가신자로서 초기불교교단에 크게 공헌한 인물은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장자이다. 그의 본명은 수닷따(Sudatta)였지만, ‘아나타삔디까’ 즉 ‘외로운 이를 돕는 자’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를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고 부른다.그는 꼬살라국에서 제일가는 부호였다. 그가 사업차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붓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붓다를 뵙고 싶은 마음에 밤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성문이 열리자 세존이 계신 곳으로 달려
‘앗따나락키따-숫따(Attānarakkhita-sutta, 自護經)(SN3:5)’에서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은 붓다에게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다. 붓다는 왕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었다.한때 빠세나디 왕이 한적한 곳에 앉아 있을 때, ‘누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자이며, 누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자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으로 가서 붓다를 친견하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붓다의 제자 가운데 마하깟사빠(Mahākassapa, 大迦葉) 존자와 아난다(Ānanda, 阿難) 존자는 성향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마하깟사빠가 보수적 성향을 지닌 엄격주의자였다면, 아난다는 진보적 성향을 지닌 온건주의자였다. 붓다 재세 시에도 두 사람이 몇 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불멸후에는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승가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던 것 같다.마하깟사빠를 비롯한 보수적인 비구들은 처음부터 여성의 출가를 반대했다. 그러나 아난다가 붓다에게 여성의 출가를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아난다의 간청으로 마하빠자빠띠
인터넷상에는 정제되지 않은 험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사람의 언어가 거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성이 거칠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사람들의 심성이 황폐화 되어가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특히 정치인들과 시사평론가들의 막말은 상대방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반사이익을 얻고자 한다. 저질 중의 저질이다. 무심코 내뱉는 말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하고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한때 붓다는 아바야 왕자(Abhaya rājakumāra)에게 말을 해야 할 때와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때를 가릴 줄 알아
붓다는 ‘삽바사와-숫따(Sabbāsava-sutta, 一切漏經)’(MN2)에서 번뇌의 종류에 따라 그것을 제어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번뇌를 제어하는 것이 곧 수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경에서 붓다가 제시한 일곱 가지 번뇌와 그 대처 방안은 다음과 같다.첫째는 봄[見]으로써(dassanā) 없애야 할 번뇌들이다. 이른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kāmāsava, 欲漏), 존재에 기인한 번뇌(bhavāsava, 有漏), 무명에 기인한 번뇌(avijjāsava, 無明漏)가 그것이다. 여기에 ‘견해에 기인한 번뇌(diṭṭ
쭌다(Cunda)는 말라(Malla)국의 수도 빠와(Pāvā)에 살았던 금세공인(kammāraputta)이었다. 그를 흔히 ‘대장장이의 아들’이라고 번역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금속을 다루는 자를 모두 대장장이(kammāra)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금・은・쇠 등 주로 어떤 금속을 다루는지로 더욱 세밀하게 장인의 종류를 구분했다. 쭌다는 금을 주로 다루는 장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쭌다를 ‘금세공인’이라고 번역한다.붓다는 만년에 꾸시나라(Kusināra)로 가는 길에 빠와에 도착하여 쭌다의 망고 숲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붓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 악에 맞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악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악에 맞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악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에릭 매택시스의 ‘디트리히 본회퍼’ 전기에서)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모략을 꾸밀 때 독일 안에서부터 나치를 무너뜨리려고 은밀히 움직였던 소수의 독일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히틀러 암살 공모에 가담했다가 1945년에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
많은 사람은 과거가 가장 살기 좋은 상태였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현재 상태는 불만족스럽고, 미래는 더욱 나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과거 지향적 현상을 ‘과거 지상주의(至上主義)’라고 부른다. 특히 종교인 가운데 과거 지상주의자들이 많다. 과거 지상주의는 종말론 혹은 말세론과 관련이 있다. 인류는 처음 지상낙원에서 살았는데, 점차 타락하여 결국에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불교도들도 성자나 아라한은 과거에 많았고, 현재는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
한때 아난다(Ānanda, 阿難) 존자는 웃띠야(Uttiya)라는 유행자(paribbājaka)에게 불교의 수행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래는 ‘세상으로부터 [열반으로] 인도되었고, 인도되고, 인도될 자들은 모두,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제거하고, 지혜로써 마음의 번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에 마음을 잘 확립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 요소[七覺支]를 있는 그대로 닦은 뒤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열반으로] 인도되었고, 인도되고, 인도될 것이다’라고 압니다.”(AN.Ⅴ.195)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