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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소신공양…더 이상 구할 것 없는 견처 보인 격외의 회향”

  • 교계
  • 입력 2023.12.08 17:12
  • 수정 2023.12.23 00:43
  • 호수 1708
  • 댓글 28

[파격의 입적, 자승 대종사와 한국불교] ①자승 스님 입적 어떻게 볼 것인가

“죽음에 끌려가지 않아야” 평소 당부…“보여주기·흉내 불가능한 경지”
유서·기자간담회·격려모임 등 주변도 챙겨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선사들 대부분 자발적 입적 선택…“행정·사판승 이미지에 가려진 이면”

12월3일 조계종 종단장으로 봉행된 해봉당 자승 대종사 영결식과 다비식. 
12월3일 조계종 종단장으로 봉행된 해봉당 자승 대종사 영결식과 다비식. 

‘생사가 없다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 구나.’(자승 스님 열반송)

12월3일, 겨울바람 시린 서울 조계사 마당에서 봉행된 자승 스님의 영결식장엔 안타까움과 무거운 혼란이 교차했다. 자승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던진 충격이 세간과 출세간 모두에 컸기 때문이다. 

11월29일 늦은 밤, 원적 소식이 알려지고 조계사에 분향소가 차려지는 동안 스님의 행적이 하나둘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성 칠장사 CCTV에는 입적 당일 자승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손수 차량을 운전해 오후 3시11분 안성 칠장사에 도착한 스님은 주지스님을 만나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주지스님이 요사채 문을 열어 주고 자리를 떠난 직후인 4시24분, 자승 스님은 몰고 온 차 트렁크에서 하얀색 플라스틱 통 2개를 꺼내 들고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1분 후 자승 스님은 다시 밖으로 나와 CCTV 쪽을 바라보다가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시간 반쯤 지나 다시 한번 밖으로 나왔다. 2분가량을 머문 후 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마지막으로 요사채 문을 한 번 더 열어 우두커니 밖을 내다본 후 곧 문을 닫았다. 1분 후 요사채에서는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후 6시43분이었다. 

자승 스님은 칠장사 요사채에 들어간 후 2시간 20분 남짓 동안 무려 3차례나 문밖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하늘을 응시하기도 했다. CCTV에 확인된 스님의 모습은 마치 그 모든 행위가 자유 의지에서 비롯됐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스님의 입적을 두고 설왕설래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신(燒身)’이라는, 범인의 상식을 넘어선 스님의 선택은, 갑작스런 입적에 대한 충격 못지않게 매스컴의 이목을 끌었다. 갖가지 의혹과 추측들이 ‘왜’라는 질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영상이 스님의 마지막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줬지만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세간의 혼돈을 가름하고 나선 이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었다. 종단장이 확정된 다음 날인 12월1일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 분향소에서 이례적으로 예정에 없던 말문을 열었다.

“수행자 스님들의 삶은, 세계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과 피안이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와 상대적인 세계로 떠나는 열반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우 스님의 일성은 자승 스님의 입적이 출세간과 수행자의 선상에서 이뤄졌음을 명확히 지칭하고 있었다. 이어 “자승 스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인연 연기에 따라 살면서도 근본적인 정법 깨달음의 세계를 항상 추구하셨기에 이런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셨다”고 밝혔다. “일반에서는 이해 못하겠지만 수행자 선상에서는 충분히 있는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덧붙일 문제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러한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셨다’는 진우 스님의 단언은 같은 날 오후 자승 스님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됐다. 유언장을 공개한 조계종 기획실장 우봉 스님은 “지난 3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마치고 자승 스님이 지인들과 차를 마시다가 ‘나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 방 어디를 열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그 말을 들었던 스님 한 분이 어제 숙소에서 여러 장의 유언장을 확인했다”고 전하며 그 가운데 3장을 공개했다. 자승 스님의 모습이 담긴 영상기록과 함께 오래 전부터 준비됐음을 유언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에 대해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자승 스님의 의중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언을 전했다. “소신을 준비하고 계셨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이 있었다”는 원명 스님은 “봉은사에 땔감을 쌓아 두도록 여러 차례 말씀하셔서 통나무 움막을 지어 놓았다. 다만 대중들이 그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며 회한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신공양을 준비했었지만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봉은사에서 불길이 오를 경우 순식간에 진화될 것을 예측해 칠장사를 선택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칠장사는 평소에도 종종 들려 기도하던 수행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만큼 칠장사 요사채 전소에 대해 자승 스님은 유서를 통해 칠장사 주지스님에게 거듭 미안함을 전했다. 상좌들에게 이를 복원하라는 철저한 당부까지 남겼다.

자승 스님은 상월선원과 함께 했던 사부대중에 대한 감사와 함께 건물 경비원, 사무실 간사 등 소소한 주변의 인연들도 하나하나 챙겼다. 동시에 출가자로서 수행 정진에 소홀했던 부분에 대한 참회, 선원 정진대중에 대한 존경까지 유언장에 담고 있었다. 

이러한 유서에 더해 자승 스님을 오랫동안 보필했던 박기련 동국대 건학위 사무총장은 “스님께서 11월27일 가진 기자간담회 일정을 2주 전부터 언론사에 요청해 준비했고 전례 없이 허심탄회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날 저녁에는 전법대회를 준비했던 13명의 직원들을 불러 함께 저녁공양을 하고 일일이 선물을 전하는 등 각별하게 주변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회고했다. 

박기련 사무총장을 비롯해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한 주변인들은 한결같이 “이같이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며 탄식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에서 순례단장 소임을 맡아 43일간을 함께 했던 조계사 주지 원명 스님은 “자승 스님께서는 ‘태어날 때에는 부모에 의지하지만, 수행자라면 결코 죽음에 끌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고 전했다. 스님은 “소신 현장에서 수습된 스님의 법체는 누운 자리 그대로 반듯했다”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하려 들기 마련이고 더구나 뜨거운 불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그 법체가 반듯하게 남아있었다는 점은 결코 죽음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평소의 신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교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승들의 입적이 일상의 연장선에서 일어났음을 감안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짐작할 특별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죽음이 일상다반사와 크게 다르지 않고 그 자체에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 숱한 고승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승 스님은 입적 당일 불씨를 당긴 직후 명료한 의식 하에 몇몇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짧게 향후 종단에 대한 당부와 소신 결행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사채에 불길이 치솟은 지 불과 5분여 만에 서울과 칠장사 등에서 소방서로 3통의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날 자승 스님의 전화는 몇 초에 불과했지만 인사와 당부, 그리고 짧은 영상통화, 무엇보다 ‘칠장사’라는 위치를 전하는 자승 스님의 목소리가 정확히 전달 된 후 끊어졌다는 것이 공통된 전언이다. 불길이 선명한 영상 속 자승 스님의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하고 여여했으며 삶과 죽음에 초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 2월 7일 상월선원 천막결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자승 스님. 
2020년 2월 7일 상월선원 천막결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자승 스님. 

불교에서 죽음은 회피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과 사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이 궁극적 과제다. 그렇기에 불교는 생과 사를 함께 언급하고 ‘생사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것을 수행 목적으로 삼았다. 

“종무행정의 중심에서 세속의 권력과 맞서거나 때로는 손잡아야 했던 자승 스님에게는 이판과 사판의 면모가 함께 존재했었다”는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오랜 시간 가까이서 지켜본 자승 스님에게서 선사의 면모를 읽어냈다. “스님은 역대 처음으로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지내는 입지전적 행적으로 세간인들에게는 늘 종권의 중심, 그 자체로 인식돼 있었다”며 “그러나 오래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승 스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속에서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심으로 일하며 대중 속에서 중도의 이치를 깨닫고 실행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상월결사 총도감 호산 스님의 전언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자승 스님에게 총무원장으로서의 모습, 행정승의 모습만 있었다면 상월선원 천막결사에 함께 할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총무원장 소임을 놓으신 후 수행자로 회향하려는 그 모습을 따르고자 했으며, 천리순례·인도순례를 하며 많은 대중에게 숨김없이 드러낸 자승 스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에게서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평가는 자승 스님의 일생 행적 곳곳에서 보여지는 치열한 수행자의 면모와도 상통한다. 젊은 시절 군복무를 마친 자승 스님은 ‘군대물’을 빼고 ‘중물’을 들이기 위해 1979년 겨울, 설악산 봉정암에 들었다. 사람 키만큼 폭설이 쌓이고 그치지 않는 칼바람이 체감온도를 영하 30~40도까지 끌어내리는 봉정암에서 25살의 자승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새벽·오전·오후·저녁까지 하루 네 번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했다. 꼬박 5개월을 정진하고 봄이 되어서야 봉정암을 내려왔다. 

그 혹독한 겨울과 맞섰던 결연함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사판승’ ‘입지전적 인물’로 세간에 각인된 후에도 몸속 깊숙한 곳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총무원장 소임에서 물러난 자승 스님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 무문관에 들었다. 굳게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스님은 하루 한 끼 공양에 의지해 정진했다. 유나 영진 스님은 “수행처에서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두 차례 났다”며 “곡기와 잠을 끊고 1주일간 정진하다가 두 번이나 쓰러졌다는 말을 해제 후에야 듣게 됐다”고 전한 바 있다. 영진 스님은 “무문관에서 나올 때 자승 스님의 몸무게가 17kg이나 줄어 있었다”며 “이처럼 혹독한 수행은 나로서도 평생 처음 보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생사를 건 수행은 2년 후인 2019년 11월 상월결사 천막결사로 이어졌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겨울 도심의 콘크리트 밀림 한복판 천막에 스스로를 가뒀다. 극한에 가까운 90일의 정진이 끝났을 때 자승 스님을 포함한 아홉 스님의 정진대중은 낙오자 하나 없이 산문을 나섰다. 혼자 이어왔던 치열한 수행이 대중의 수행으로 회향된 첫 순간이었다. 

이듬해 10월 ‘국난극복 자비순례’, 2021년 ‘삼보사찰 천리순례’, 2022년 ‘생명평화 방생순례’를 이어가며 움직이는 수행, 활발발한 대중정진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2023년 43일간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통해 그 모든 정진의 결실을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전법선언으로 회향했다. 세간을 향한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도 자승 스님이 남긴 말은 ‘부처님 법을 전하자’는 당부였다. 

동국대 건학위원장 돈관 스님은 “소신으로 보이신 그 뜻이 무엇인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잘 헤아려야 한다”며 “인도순례를 통해 전법 없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직접 보고 보여주고자 하셨으며 전법선언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또한 직접 보여주셨다. 불교의 미래를 위한 전법에 사부대중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확연히 보이신 것”이라고 말했다. 

세간의 눈에 자승 스님의 입적은 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왜’라는 온갖 추측이 넘쳐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라는 팩트에 집중해야 하고 어떤 ‘메시지’인지 묻고 물어야 한다. 이(理)와 사(事)를 넘나들었던 불교지도자이며 수행자였던 자승 스님이 던진 메시지에 불교중흥과 전법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수연 편집국장 namsy@beopbo.com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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