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하얘졌습니다. 법당과 요사채 기와지붕도, 마당 나무들도 소복소복 눈을 이고 섰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빨간 연등은 큼직한 산딸기를 빼닮았습니다. 도시에 내리는 눈은 천덕꾸러기라지만 산사의 눈은 다릅니다. 슬쩍 우리의 본래면목 보여주듯 티 없이 맑은 세상을 펼쳐냅니다.
선어록에도 종종 눈이 등장합니다. 혜가 스님이 숭산의 달마대사를 찾아가 싹둑 팔을 잘라 내려놓은 날 펄펄 눈이 내렸다지요. 원나라 선승 허주 스님의 “눈이 천산(千山)을 덮었는데 왜 한 봉오리만 희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몽산 스님이 “별천지이지요”라는 답변은 여전히 납자들의 화두로 전해집니다. 조선 청허휴정 스님이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라”는 시를 남긴 것도 분명 겨울이었을 겁니다.
순천 송광사에 눈 내리던 날, 두 스님이 빗자루를 들고 휘적휘적 걸어갑니다. 수행(修行)이 쓸고 닦는 일이듯 스님들은 꼭 필요한 만큼 비질을 하시겠지요. 그렇더라도 늘 발밑을 조심할 일입니다. 눈길이든 세상살이든 말입니다.
글=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사진=안홍범 작가 docuahn@naver.com
안홍범 작가는
신구대 사진과졸업, 광고 스튜디오를거쳐 92년부터 프리랜서로활동.
샘이깊은물 사진팀장(1998-2000), 외교부 국제교류재단(코리아나 사진전담), 대한항공기내지(모닝캄), 삼성그룹(삼성앤유), 현대자동차(모터스라인), 현 현대제철(푸른연금술사), 조계총림 송광사 전속사진작가
전시>
승경전(류가헌겔러리 2023), 두고온시간(서이겔러리2021), 이토록평화로운(인크루미술관2020), 시간의뒤편(류가헌겔러리2010), 나.0(파인힐겔러리1995), 탄천(한마당화랑1990), 다섯사람사진전(경인미술관1988)
출판>
사라져가는서정과풍경(웅진출판), 이색마을이색풍경(실천문학), 솜씨마을솜씨기행(실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