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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백호 전북불교신도회장

“여든생 부처님께 받은 가피, 포교·나눔으로 회향해야죠”

▲ 김백호 회장은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라는 마음 하나로 살아간다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북불교신도회장, 전북신행단체협의회장, 금산사 신도회장, 금산사복지원 이사, 화엄불교대학 이사, 전북불교연합대책위 공동대표….

청광 김백호 회장이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이다. 가히 전북지역을 대표하는 재가불자라 해도 틀리지 않을듯하다. 직함만이 아니다. 그의 일상은 새벽 5시 향을 사르고 예불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극히 정성스러운 몸과 마음으로 시작된 하루, 이제 그의 발길은 전북지역 단체 사무실로 향한다. 전북지역 불교계의 현안을 꼼꼼히 살피다보면 해가 진다.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귀가한 그는 ‘천수경’ 독경으로 하루를 회향한다. 시간을 쪼개 부처님 책을 읽고, 법회가 있으면 먼 길 마다않고 찾아가 법을 청한다. 올해 83세의 고령이 무색할 만큼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력과 원력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삼보를 외호하는데 진력한다. 신체 나이는 팔순을 넘겼지만 신구의(身口意)가 맑은 김 회장의 일상은 말 그대로 ‘청년불자’다.

부모님께 받은 불심 최고의 유산
수처작주 마음으로 매사에 최선
불법수호·삼보외호 재가자 의무
지구촌공생회 등 보시행에 앞장

“30여년간 지켜봤지만 한결같다. 언제나 깨어있으며 기도를 놓지 않는다. 또 지구촌공생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통해 자비와 나눔을 실천하는데 앞장선다.”(조계종 전 포교원장 도영 스님) “불법을 수호하고 삼보를 외호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신다. 전북에서 신행활동을 하는 불자 가운데 김백호 회장님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전북 재가불자들의 기둥과 같은 존재다.”(유지원 전북불교시민연대 공동대표) “불교계에 대한 보시는 물론 한국로타리클럽 총재단 의장을 역임하는 등 보살행의 적극적인 실천으로 불교의 대사회적 위상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이원일 전북불교회관 사무국장)

그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촌살림이지만 부모님은 한 해 농사를 수확하면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부터 챙기는 독실한 불자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찾아간 절은 참 즐거운 곳이었다. 절집 마당은 그대로가 놀이터였고, 떡이며 과일 등을 챙겨주는 스님도 좋았다. 한편으론 부처님을 향한 부모님의 지극한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부처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도 해 보았다.

부처님과의 인연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중학교가 있는 읍내까지는 30리길.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 읍내에 방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학비를 내기에도 빠듯한 살림이었다. 사실상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백방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가 어려운 시기라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중 한줄기 희망의 빛이 드리웠다. 마침 곡성중 교장선생님이 읍내에 포교당을 지어 부모님이 다니던 사찰에 보시한 것이다. 이러한 시절인연으로 포교당에서 먹고 자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불교를 믿는 집안 아이들 10여명이 포교당에서 함께 생활했어요. 스님들처럼 아침예불을 모시고, 염불을 하고, 운력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해요. 당시 포교당이 없었다면 학교를 포기해야 했고, 그러면 제 삶도 달라졌을 겁니다. 포교당에서의 3년, 향내가 몸에 배듯 자연스럽게 불자로 성장하게 된 셈이죠.”

광복의 기쁨도 잠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힘겨운 시절이었다. 다행히 토목 일을 배워 건설회사에 취직해 그럭저럭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막막했던 시기라 언감생심 불교를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웠을 때였다.

나이 40을 앞두고 지금껏 배워온 것들을 자산삼아 전주에 건설회사를 세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북은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다. 토목이 필요한 곳은 수로정비와 저수지 축조 등 농사일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전북지역 경지정리가 시작됐다. 너른 김제평야에 대한 경지정리가 시작되자 일감이 쏟아졌다. 실적이 쌓이자 도로나 교각 건설 등의 공사로 이어졌고 회사도 자리를 잡게 됐다.

회사가 반석 위에 오르고 숨을 좀 돌리니 여유가 생겼다. 가장 먼저 로타리클럽의 문을 두드렸다. 중학교 진학부터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회사를 일으켜 세우기까지 어느 것 하나 부처님 가피 아닌 것이 없었다. 그 가피를 부처님의 가르침인 보시행으로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나눔활동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뤄져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습니다. 불교계의 역할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어요. 우연히 세계와 공유하는 나눔네트워크 로타리를 알게 됐고 불자임을 드러내며 적극 동참했습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저로 인해 불교의 위상이 조금이라도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실제 김 회장은 로타리 활동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에 전북로타리클럽 총재와 한국로터리 총재단 이사를 역임한데 이어 2004~2005년 한국로타리 총재단 의장을 맡기도 했다. 로타리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웃종교 성직자들과의 만남도 빈번해졌다. 로타리 내에 기독교인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개신교 목사는 물룬 가톨릭 신부들은 그를 끌어안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때마다 “나는 불교신자”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웃종교 성직자들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그가 흔들리지 않았던 데에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불심 유전자’가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북불교대학과 화엄불교대학이 1988년과 1989년 연이어 문을 열면서 알음알이로 익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실참하며 정법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93년 회사경영에서 손을 뗀 이후 오로지 불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일에만 매진했던 그였다. 마음 곳곳에 부처님을 위한 대웅전을 짓고 요사채를 세우니 ‘불자 김백호’는 대웅전 현판처럼 변함이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계에도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김 회장의 자비나눔행도 불교계의 행보에 발을 맞췄다. 승가원, 금산사복지원, 동국대 등을 지원하고 자비를 들여 고승초청법회를 열고 합창단을 후원했다. 특히 2003년 금산사 조실 월주 스님이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한 후에는 지구촌공생회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지구촌공생회의 대표적 개발사업인 ‘생명의 우물’ 사업은 김 회장의 원력에서 비롯됐다.

“어느날 월주 스님이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주는 사업을 하려는데 어떻겠냐고 여쭤왔습니다. 퍼뜩 월천공덕(越川功德), 급수공덕(汲水功德)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우물을 파주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자비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지원을 약속했어요.”

2004년 캄보디아 캄폿주에 첫 번째 우물이 완성됐다. 물론 지구촌공생회의 첫 우물은 김 회장의 보시로 이뤄졌다. 그렇게 그의 자비행은 생명의 우물 사업의 마중물이 됐고, 지구촌공생회는 지난해 12월 우물 2000기 완공 기념식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학교를 짓고, 도서관을 세우고, 도서를 전달하는 일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말 그대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교실에 낡은 책상, 부족한 교재 등…. 그럼에도 맑은 눈망울로 꿈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월주 스님과 합심해 아이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일불제자 아닙니까.”

그는 남은 생 지금처럼 불교와 사회를 위해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다고 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생이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 흩어짐이란 뜻입니다.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면 후회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 머무는 곳마다 주인인데 어찌 내일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이 마음 하나로 살아간다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전북불교신도회를 맡은 지도 벌써 15년. 내려놓고 싶지만 “더 계셔 달라”는 청을 거절하지 못해 올해도 “1년만 더”가 이어질듯하다. 그의 바람은 올해 어린이·청소년 포교기반을 굳건히 하고 후회 없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나눔과 포교의 자리가 이어지는 한 김 회장의 불국정토로 향하는 그 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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