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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반세기 불교문화재 연구 불교발전의 지남이 되다

 

▲ 홍윤식 교수는 “언제나 부족한 스스로를 깨닫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모지를 개척하는 사람들의 여적은 험난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 길을 ‘희망’이라는 등불에 의지한 채 나아갈 뿐이다. 때론 실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개척자들은 실패와 난관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포기하게 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은 일부 선각자들은 목표했던 결과와 마주하게 되고, 그들에 의해 역사는 바뀌곤 한다. 또한 그 지난한 노력의 여정은 많은 이들의 지남(指南)이 된다.

 

의례 등 유형문화 연구기반 마련
불미전·불교미술학과 기획 추진
정부도 실패한 ‘고려불화전’ 성사
불교민속학회 등서 왕성히 활동

홍·윤·식, 노 교수의 삶은 꼭 그러했다. 홍 교수의 지난 80여년은 한국의 불교문화가 국내를 넘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기까지 궤를 함께해 왔다. 유형문화재의 한 부분이었던 불상과 불탑, 전각 등에 성보(聖寶)의 개념을 접목해 새 생명을 불어넣었는가 하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영산재와 연등회, 수륙재 등 불교의례가 문화재로 평가받게 하기 위한 주춧돌을 세웠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분야를 반석에 올려놓기까지 홍 교수가 겪어야 했을 난관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그러나 부처님이 맺어준 지극한 인연으로 받아들이고 물러섬이 없었기에 지금 수많은 후학들이 그가 걸었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유무형의 불교문화가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기까지는 홍윤식 교수의 공이 지대하다. 특히 불교미술공모전과 고려불화전을 기획해 개최하고 동국대 불교미술학과가 설치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등 한국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시대에 맞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동산반야회 법주 법산 스님의 평가다.

김형우 안양대 교수는 “거시적 안목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안목이 탁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성보문화재를 연구하는데 있어 양식과 기법은 물론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찾아내 종합적으로 분석한다”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불교음악, 불교미술, 불교의례 등 무형의 불교문화가 지금의 평가를 받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경남 산청 사람이다. 집 앞에 솟은 황매산은 골골이 토굴 수행터라 할 만큼 친 불교적이었다. 바라만 보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꿈은 충만했다. 어린 그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가 수행한 곳으로 전해지는 황매산의 정기를 받아 반드시 훌륭한 선생(先生)이 되고 싶었다. 불심 돈독한 부모님은 그런 아들을 진주 해인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법보종찰 해인사가 운영하던 해인고등학교에서 3년간 불교성전을 공부했으니 그의 몸은 어렸을 때 불기(佛器)였으리라. 인연이 그러했으니 조계종립 동국대를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을 터.

“그때만 해도 저와 불교의 인연이 이토록 지중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꿈대로 사학과를 졸업해 국악예술고등학교 역사 담당교사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이지요. 당시 국악예술고등학교는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자 판소리, 민요, 승무, 살풀이 등 무형문화재의 지정과 육성을 담당하던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여러 분야의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고, 관심을 갖고 살피다 보니 전통문화의 상당수가 불교문화의 소산임을 깨달았지요. 결국 전통문화의 원형이 범패(梵唄)에 있음을 알게 됐고, 이에 불교의식에 대한 연구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시작은 그렇게 당차고 야무졌으나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적을 두고 불교문화를 조사·연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의식을 할 줄 아는 스님을 찾는 일은 더욱 그랬다. 당시는 불교정화 직후로 범패와 같은 의식은 무당들이나 하는 짓거리라며 금기시하던 때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사찰령에 의해 범패와 의식무용이 금지돼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비를 털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범패하는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불교의식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자 자연스레 의식의 대상이 되는 불상, 탱화, 번 등으로 눈과 마음이 움직였다. 무형문화재로 싹튼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이 이젠 유형문화재로 초점이 옮겨졌다. 조사하고 연구해야 할 대상은 어느새 태산처럼 쌓여갔으나 언제나 돈이 연구의 발목을 낚아챘다.

▲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의 Q&A

세상사 지극하고도 간절한 기도에 이끌린다고 했던가. 그의 간절함이 통했다. 반가운 소식이 연이어 찾아왔다.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위촉됐고, 조계종으로부터 불교문화재 현황 파악 요청이 들어왔다. 또 당시 전통불교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총무원장 영암 큰스님께서 그를 사회부 문화과장으로 임명했다. 펼치고 싶었던 멍석이 불연으로 펼쳐졌으니 크게 한판 놀아보고 싶었다. 그동안 품어왔던 사찰 단청문양 조사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다. 불상과 불화, 불탑, 건조물 등은 나름의 연구 성과가 축적돼 있었으나 단청문양에 대한 조사는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진행하는 국책사업이다 보니 예산과 시간 등을 잘못 배정해 조사 자체가 부실해졌다. 온갖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부실조사에 대한 책임추궁이 쇄도했다. 사업 책임자로서 재조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 사채를 얻어 재조사를 진행했다.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났다. 책임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빚까지 지게 되니 살림살이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았지요. 단청문양을 조사하다보니 단청은 물론 불화를 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일 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전국 불화조사에서 제가 책임연구원으로 동참할 수 있는 바탕과 능력을 갖추게 해 주었습니다. 불화를 중심으로 한 불교미술 전문학자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었죠.”

단청문양조사의 실패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이젠 불교문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성보의 의미를 되살리면서 문화적 가치를 주체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불교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화두삼아 문화계 인사와 수없이 접촉하고 수시로 스님들을 만났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불교미술공모전’ 개최였다.

올해로 44회째인 불교미술공모전, 명실상부한 불교미술인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또 재정이 문제였다. 당장 공모전 주최인 조계종마저 많은 비용을 이유로 손사래를 쳤다. 첫 불교미술공모전을 기획했던 1969년은 국민 대다수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했을 정도로 극빈한 상황이었다. 피폐한 경제상황으로 문화사업과 기부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기에 공모전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불교문화의 미래를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 문화재관리국과 사찰, 불자기업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미술공모전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도움도 요청했다.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도 움직인다고 했던가. 1970년 드디어 첫 불교미술공모전을 열게 됐다. 작품성과 예술성을 갖춘 수작들이 공모전에 밀려들자 불교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치솟았다. 이러한 관심은 후일 불교미술공모전이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이 됐다.

불교미술공모전의 성공적 개최는 또 다른 도전으로 이어졌다. 불교예술 분야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동국대에 불교미술학과를 설치하겠다고 발원했다. 내친김에 문교부에 불교문화재의 효율적 보전관리와 활용을 위해 학과 설치를 요청했다. 문교부 역시 그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일이 잘 진행되자 시기와 질투가 잇따랐다. 화가 곧 복이 되고 복이 곧 화가 된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증명이라도 하듯 불교미술학과 설치가 확실시되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격 없는 사람이 교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총무원 문화과장으로서 불교미술공모전을 기획하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미술학과 설치를 추진했는데 돌아온 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예기치 않은 비방이었죠.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총무원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지요.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불교공부를 결심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본유학은 불교사와 불교문화사, 불교사상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채우고 폭을 넓히는 시간이었다. 또 일본 불교계 학자들과의 폭넓은 교류는 훗날 일본에 있는 고려불화가 한국에서 전시될 수 있게 한 배경이 됐다. 1993년 호암미술관에서 개최된 ‘고려불화특별전’은 홍 교수의 노력과 인맥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려불화전은 정부조차 몇 차례 추진하다가 결국 포기한 사업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원광대 교수로 다시 교단에 섰다. 또한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을 맡아 미륵사지 발굴조사와 왕궁리 유적발굴조사 등을 지휘했다. 이후 동국대 국사교육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서는 동국대박물관장 소임을 맡아 불교문화재와 불교문화사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50대 초반에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연구성과에서도 학계에 인정을 받았다.

만 65세 되던 2000년 2월 홍 교수는 동국대를 정년퇴직했다. 그러나 그의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었다.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었던 국악예술고등학교가 그를 교장으로 모셨다. 4년간 학교장으로 일하며 중국과 일본, 몽골의 전통문화학교와 결연을 맺어 국악예고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매진했다. 국악예고를 떠나서는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으로, 규슈대학 특임교수로 한일 양국이 갈등과 미움을 넘어 화해와 협력으로 나갈 수 있는 디딤돌 구축을 위해 헌신했다. 지금도 불교민속학회장, 동방대학원대 석좌교수, 한국전통예술학회장, 진단전통예술보존회 이사장 등을 맡으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물론 불교문화에 대한 연구는 일과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이 사는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늘 배우면서 살아야 하고, 받으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에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부족합니다. 언제나 부족한 스스로를 깨닫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심하고 실천하는 삶이 나와 이웃, 그리고 사회를 맑고 향기롭게 행복하게 합니다. ”

밀림의 성자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알버트 슈바이처는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밖이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라고 했다. 쉼 없이 달려온 80생, 지금도 하심을 방편으로 불교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화두로 정진하기에 홍 교수의 하루는 언제나 밝게 빛난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60호 / 2014년 9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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