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불타는 산, '화염산'. 그 옛날 선지식들은 광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을 넘어 구법을 위해 목숨마저 내던지며 인도로 향했다.(법보신문 자료사진) 대불사(大佛寺)는 가오창고성의 성장 안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사원으로 『사기(史記)』에 의하면 현장법사가 이곳을 거쳐 인도를 향해 구법의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현장의 강당(講堂)이었다는 원형 건물이 복원돼 있는데, 현장법사가 6개월간 머물면서 설법한 곳이라 한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원의 규모가 당시로는 엄청난 크기였을 것이란 정도다. 인도와 시안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간 지점에 이렇게 큰 사원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 길을 통한 불교 문물의
막고굴과 함께 둔황의 대표적 명물인 명사산과 월아천. 명사산 안쪽 초승달 모양의 월하천은 3000년 동안 단 한 번도 모래에 덮인 적이 없다(법보신문 자료사진). 인상 깊었던 석실 몇 곳을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16호굴과 17호굴이다. 17호굴은 16호굴의 용도(甬道) 북벽에 위치해 있는데, 장경동(藏經洞)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막고굴 가운데 제일 먼저 발견돼 발굴한 곳이다. 17호굴을 장경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곳에서 수 만점에 이르는 귀중한 경서(經書)와 문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바로 이 17호굴에서 발견됐다. 신라의 승려인 혜초는 20세 무렵인 서기 704
세계 최대의 화랑으로 일컬어지는 둔황 막고굴(법보신문 자료사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점이었던 시안에는 화려했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것이 남아 있다. 특히 불교사원과 큰 규모의 탑이 많은 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 유입과 당시 조정에서 불교를 숭상했던 상황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안은 뭐니 뭐니 해도 현장법사와 진시황제의 병마용, 양귀비로 친숙하게 알려진 곳이다. 그런 탓으로 시안에는 6, 7세기에 조성된 뜻 깊은 대찰이 하나 둘이 아니다. 시안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대안탑을 찾았다. 대안탑은 자은사에 있는 네모꼴의 탑으로 높이가 7층, 64m에 이르러 시안의 이곳저곳에서 쉽게 눈에 띤다. 원래 자은사는 당고종이 어머니의
유럽과 중도, 서아시아, 중국 사이의 상품 교역의 통로였던 실크로드는 다양한 문물과 문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또한 이 길을 통해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불자들에게 실크로드는 상품 교역의 통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학산 이상규 변호사는 지난해 4월 7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전해진 자취를 거슬러 실크로드를 탐방했다. 본지는 그의 실크로드 대장정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실크로드는 인도 동북부로부터 광막한 사막과 험준하기 짝이 없는 산맥들로 가로막힌 중국의 서역을 거쳐 당시 중국의 수도인 장안까지 불교를 전하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중국과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