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지령 1000호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1년이라는 시간과 신문의 나이 1000호라는 숫자만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마는, 적어도 불국정토 실현을 위한 파수꾼으로서, 불교 현대사의 굴곡과 성쇠의 현장에서 정론의 정신과 직필의 펜을 놓지 않은 역사적 의미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독립 언론으로의 결단과 변화의 어려운 현실마저 혁신과 독자정신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1000호의 지령을 맞이한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를 뿐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가 축하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가에서 ‘천’은 결코 숫자의 언저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천개의 손을 갖고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뜻처럼, 어떤 곳이라도 손길이 닿고 어느 한 곳 빠짐없이 살핀다는 무량의 의미입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
교계 유일의 독립신문으로 정론직필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법보신문의 지령 1000호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돌이켜보면 법보신문의 지난 세월은 불법을 알리고 홍포하는 교계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이정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난 1988년 창간 이후 20여 년 동안 기자들이 직접 발로 뛰며 수많은 선지식과 수행자, 학자와 불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발굴, 지면에 소개해 많은 이들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이끌었으며 불우 이웃이나 이주민, 자연재해로 인한 이웃 나라의 난민 등 소외받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보살행을 펼쳐 보였습니다. 특히 법보신문은 일부 공공기관이나 공직자들의 상식에 벗어난 종교편향이나 종교차별 문제에 있어서는 파사현정의 죽비를 높이 치켜든 호법신장의 역할도 톡톡히 해
법보신문 지령 1000호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법보신문은 1988년 창간이후 지속적으로 불교계언론의 저변을 확대하였고,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수많은 기여와 노력을 경주해 왔습니다. 지금껏 스스로의 역할을 다한 것처럼 앞으로도 불법홍포와 정론직필을 위해 더욱 노력해 주실 것을 간청드립니다. 항상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평등하고 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명으로 불법홍포와 실천에 앞장서며, 불교계 언론의 길에 모든 불자대중과 함께하는 도반이자 안내자로서의 역할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불교계를 넘어 우리사회를 위하여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더욱 큰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며, 중앙신도회도 항상 소중한 인연에 함께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법보신문’ 지령
법보신문 지령 1000호를 200만 부산 불자들과 함께 축하드리며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그 길이 외롭고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올해로 4년째 독립언론으로서의 길을 꿋꿋하게 가시는 모습에 불자로서 자긍심을 느낍니다. 법보신문은 1000번째 신문을 발행해 오는 동안 묵묵히, 쉼 없이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해 오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불의에는 파사현정의 가르침으로 맞서 정론직필을 구현했으며 이웃의 고통에는 관세음보살님의 위없는 자비로서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참으로 그 의미가 크고 깊겠지만 비록 그렇지는 못했다하더라도 발심을 하고 변함없이 수행을 하고 있다면 그 또한 이미 깨달음과
법보신문이 지령 1000호에 이른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불교계 언론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정론을 펴온 법보신문 가족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법보신문은 창간이후 20여 년 동안 우리 불교의 자주, 민주, 혁신을 위한 큰 흐름 속에서 불교개혁과 정법수호를 위해 앞장서왔고, 좌절과 상처를 딛고 희망을 만들어낸 종단개혁불사의 와중에서도 공명정대하게 정론을 펴고자 노력해왔으며, 또한 불법홍포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는 등 불교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지령 1000호를 맞아 불교의 미래를 선도하는 불교정론지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길 기원하며, 나아가 법보신문이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전체의 그늘진 곳을 밝히고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며 이 나라 민주주
한국 불교 언론을 선도하는 법보신문의 지령 1000호 발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법보신문은 지난 1998년 창간된 이래로 한국불교의 저변을 넓히고 불교문화의 토대를 만드는데 기여해 왔습니다. 또한 불교의 밝은 곳과 어두운 면을 골고루 다루면서 정론직필에 길을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고통과 시련, 때로는 찬사와 박수를 받아온 법보신문의 발걸음은 임직원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 법보신문이 정론직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준 파수꾼은 바로 격려와 애정을 아끼지 않은 수많은 독자와 불자들입니다. 법보신문이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며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당부 드립니다. 또 지혜와 자비, 파사현정과 자비무적의 정신으로 오탁악세와 사바세계가 희망의 땅, 청정한
먼저 법보신문의 1000번째 발행을 축하드립니다. 일이란 시작하기는 쉬워도 꾸준히 이어나가기는 어려운 법인데 한 주 한 주 불교계의 역사를 담아 온 것이 20여 년,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꾸준히 정진해 온 결과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뒤 처음으로 설법한 후 깨달음을 얻은 60인의 제자를 모아놓고 “수행자들이여,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안락을 주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하여 속히 길을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법보신문도 부처님의 뜻을 살려 정법의 의지를 매 호마다 담아 왔고 그로 인해 많은 불자들의 안목을 넓혀주었습니다. 특히,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많은 문제들인 평화, 복지, 환경 등의 주제에
법보신문 지령 10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1988년 창간이후 법보신문은 존경진리(尊敬眞理) 굴복아만(屈伏我慢) 공명정대(公明正大)라는 창간 정신을 잘 지켜왔습니다. 이는 법보신문 구성원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독립언론으로서 공정성과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양질의 기사를 통해 이제 불교계 바깥에서도 주목받는 언론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지난해 적극적인 취재활동으로 정부의 종교편향 사례를 지적하고 소개하여 8. 27 범불교도대회를 이끌어내는 등의 성과로 불교언론문화상을 수상한 것도 이런 노력의 산물인 것입니다. 법보신문 1000호 발간을 축하하며 당부도 함께 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재물로 보
먼저 법보신문 제호 1000호가 발행되기까지 오로지 정론직필의 한 길을 갈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신 불보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20여 년이 넘는 긴 시간을 남다른 노력과 신념으로 부처님 법을 알리고 수호하는 호법신장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법보신문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법보신문은 1998년 한국불교의 큰 어른이었던 성림당 월산 대종사님의 문서포교의 원력으로 창간된 이래로 지금까지 바른 법을 전달하는 유능한 포교사로서, 소중한 불교전통문화를 알리는 해설사로서, 불의에 당당히 맞서는 호법신장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맡겨진 소임을 다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동안 법보신문의 지면에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자비가 곳곳에서 묻어났고 행
법보신문, 즈믄을 넘어 희망찬 미래불교의 언론이 되길 바랍니다. 법보신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대정신으로 담고 옳고 그른 현대불교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맑은 거울과 같습니다. 그 거울은 오직 비춤이 있을 뿐 좋거나 싫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함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분별이 아닌 무분별의 정도를 지면에 담았기에 오늘 우리는 법보신문 1000호를 두 손으로 펼쳐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어렵고 힘든 불교계 언론의 현실 속에서 법보신문 1000호를 잡은 두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고 흑백을 구분하는 두 눈에서 잔잔한 미소가 묻어납니다. 법보신문 지령 1000호, 이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비추는 진리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는 지난 서원의 실천이자 다가오는 미래의 약속입니다.
창간호부터 1000호까지 법보신문 제호에는 파사현정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교계 첫 독립 언론 「법보신문」이 지령 1000호를 맞았다. 불법홍포와 파사현정의 신장이 되기를 자처하며 출범의 닻을 올린 지 어느덧 스물한해. 본지는 ‘대전환의 시대 불교언론사명 추구’라는 기치를 내걸고 불퇴전의 사명감으로 불교 개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신행의 등불을 처처에 밝히기를 서원하며 지난 1988년 5월 16일 창간호를 낸 ‘법보신문’은 그동안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전법과 청정교단 구현’이라는 교계 언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며 불교언론의 선구적 매체로 불교 발전을 이끌어왔다. ‘법보신문’의 제호도안 변경과 8-12-16-20-24쪽으로 이어지는 증면 발행은 불교 언론의 내용성과 나
최근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가 경제적 대공항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와중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져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고통의 끝이 언제일지 장담할 수 없는 긴 암흑기의 터널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법보신문은 지령1000호를 맞아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일본 도쿄대 기무라 기요타가 명예교수에게 현 인류가 겪고 있는 유례없는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불교적인 해법을 듣고 글로 정리했다. 이번 인터뷰는 동양대 강사 사토 아츠시 박사가 4월 15일 일본 현지에서 기무라 기요타카 명예교수를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편집자 국가중심자본주의가 빈부 격차·갈등 불러 풍요가 곧 행복이라는잘못된 편견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액(扁額)의 본 뜻은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다. 하지만 사찰 편액이 가진 의미는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편액은 해당 사찰을 대표하는 하나의 표식이자 멋을 내는 수단인 동시에 사찰의 내력, 역사와 인물에 얽힌 일화 등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를 담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액은 사찰의 얼굴이자 심장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지난해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될 때 불을 끄기에 앞서 편액을 황급히 떼어내고, “그래도 숭례문의 심장만은 건져냈다”고 평가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편액은 사찰 얼굴이자 심장 때문에 예로부터 글씨 꽤나 쓴다는 문인들과 역대 왕·대통령을 필두로 한 정치인들은 사찰 편액에 자신의 글씨를 새기는 것을 즐겼고, 사찰 역시 유명 인사의 편액에 자부심을
지난 50년 동안 불교 언론은 양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뤘다. 신문을 비롯해 방송, 텔레비전, 인터넷까지 다양한 언론매체가 형성됐다. 그러나 이런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불교 언론은 여러 가지 한계에 직면해 있다. 그 중에서도 언론이 특정 종단, 스님에게 점유돼 홍보 매체로 전락한 결과 ‘비판과 견제’라는 언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감안, 법보신문은 지령 1000호를 맞아 ‘불교 언론의 역할과 과제’라는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5월 26일 법보신문 사장실에서 진행된 이번 대담에는 채한기 상임논설위원의 사회로 조계종 기획실장 장적 스님과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 참여했다. 편집자 사회
누구나 별일 없이 살고 싶다. 모진 일들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왕이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 게다가 누구나 더 많은 돈과 큰집, 멋진 차 등을 소유하는 것이 소망이다. 인생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물질의 소유는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움켜쥐려하고 손아귀에 들어 온 것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더 가질수록 다른 사람의 몫은 줄어들고 그로인해 갈등이 생긴다는 사실은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망각하고 만다. 매일 금강경 독송-108배 마음공부 허나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섬기는 법을 갈구하여 발견한 사람이다. ‘나’라는 욕심을 비우고 그 자리에 주변 사람들을 담고 행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30년 동안 세상에 꼭 필요한
지리산 홍서원 스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채식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 행위 자체가 가장 훌륭한 방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 스님은 우리가 마음을 잘 다스리고 늘 선하고 다른 존재를 이익 되게 하는 쪽으로 마음을 쓴다면 간소한 채식으로도 얼마든지 위대한 원력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광우병, 조류독감 등 현대 질병들은 우리가 단지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과보일 뿐, 내 입에 쏙쏙 들어맞는 온갖 맛나고 편리한 현대 생활 이면에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는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게 이들 스님의 설명이다. 매년 온갖 육류 제품을 사고팔고 먹는 사람들에 의해 수백 억 동물들이 생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상. 또 채식 동물에게 동물 사료를 먹이고 잔인하게 도살하는 일들이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든 탐욕의 시대. 세상의 욕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맑은 눈길로 뭇 생명을 존중하며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이들 스님에게선 그 어느 향수보다 짙고 그윽한 계향, 정향, 해탈향이 묻어난다. 사진제공=불광출판사 하지권 작가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하동 운수리 맥전마을. 이곳 사람들에게 정봉 스님은 처음부터 별나게 비춰졌다. 지난 94년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뒷산 가파른 동굴에서 꼬박 3년을 지내더니 대여섯 가구가 전부인 이곳 마을에 터를 잡았다. 기와지붕 번듯한 대웅전 대신 뚝딱뚝딱 널빤지로 손수 지은 인법당(因法堂). 허름한 한두 평 남짓의 작은 판잣집 법당에서 어찌 오뉴월 뙤약볕과 동지섣달 매서운 황소바람을
“복지를 통한 포교의 효과는 매우 큽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관광사찰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신흥사복지원의 활발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릴 생각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한층 더 발전된 방향의 불교복지 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강원도 일대의 복지사각지대를 촘촘히 메우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설악산 신흥사 신임 주지이자 복지법인 신흥사복지원장 영오(법호 우송) 스님은 사찰이 이끄는 복지의 필요성과 그로 인한 포교 효과에 대해 거듭 강조하며, “강원도 전역에 불교복지 기반을 굳건히 닦아나가겠다”며 포부를 보였다. 영오 스님은 “지금까지 속초시 일대의 복지는 신흥사복지원을 필두로 한 불교복지가 단연 선두주자가 되어왔다”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원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한편, 기존에 형성돼 있는 불교복지 네트워크를
매달 종사자 연수로 불교 자비정신 무장노인복합시설 반야요양원, ‘선호도 1위’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 5000평 대지에 위치한 신흥사복지원 산하 반야노인요양원 전경.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본사 속초 신흥사(회주 오현, 주지 영오)가 강원도를 대표하는 복지, 포교본사로 발돋움하고 있다. 설악산의 뛰어난 경치와 가람의 공간 배치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도량으로 손꼽히는 신흥사, 그 동안 관광사찰이라는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강원도를 대표할 만큼 복지와 포교불사에 도량의 역량을 결집해 왔다는 사실이다. 1996년 설립, 올해로 14년째를 맞이하는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신흥사복지원’(대표이사 오현·원장 영오)은 현재 반야어린이집을 비
‘통계로 본 한국불교 현주소’는 통계청이 매년 실시하는 전국사업체기초통계조사와 10년마다 진행되는 인구센서스 종교인구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분석됐다. 전국사업체기초통계조사는 통계청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매년 3월경 전국 사업체의 명칭과 소재지, 조직형태 및 종사자 수 등을 전수 조사해 이듬해 그 결과를 발표한다.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이 조사는 읍·면·동 단위로 세분화해 조사원이 직접 자료를 수집하는 방문면접조사 형태로 진행된다. 전국사업체기초통계조사에서 사찰은 ‘불교단체’ 항목으로 분류된다. 불교단체의 정의는 불교 사찰과 포교당 등으로 교계 비영리 종교법인과 비법인단체도 이 항목에 포함된다. 이에 전국사업체기초통계조사 결과에는 사찰과 포교당뿐 아니라 교계에서 운영하는 NGO 단체 등과 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