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는 소리가 많다. 물 흐르는 소리, 꽃피고 지는 소리, 범종·법고 소리, 염불 소리가 귀를 적신다. 곳곳마다 부처님의 그윽한 법언이 흐르고 있으며 빛 고운 단청과 천년을 머금은 불상과 탑, 마음을 적시는 스님들의 법문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바쁜 생활에 찌들려 마음의 안식을 구할 데가 그리 많지 않다. 한 달에 한 번씩, 산사를 찾아 마음에 묻은 때를 씻어 내고 선행을 하는 것도 하나의 복이다. 옛말에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행복’이란 말이 있다. 산사순례는 이와 같이 행복을 찾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대개 불자들은 종교생활을 하면서 소원성취 등 기복(祈福) 생활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복을 구하기 위해서는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구하
올 겨울은 한파(寒波)가 유독 심하고 눈도 많이 내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피 때문인지 정작 산사순례 때가 되면 어제까지 내리던 눈도 금방 그치고 날씨도 포근해진다.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아무래도 날씨의 변화가 가장 염려스럽다. 지독한 추위가 밀려오거나, 눈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나 순례기도회는 이러한 날씨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먼 길을 나선다. 순례는 수많은 인연공덕을 쌓는 일이며 하나의 보현행의 실천이다. 그럼, 무엇이 그러한 인연 공덕을 쌓게 하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자. 옛 조사의 말씀에 ‘시주공덕은 천년을 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산사순례를 하면서 시주를 올리는 공양미 속에는 공덕(功德)이 무궁무진하게 들어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계신 우리나라에 있는 사찰 1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불교 순례는 그 나라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달마 대사가 짚신 한 짝을 이고 동쪽으로 와서 혜가 스님에게 좌선을 통해 선(禪)을 전한 것이나 통일신라 때 중국을 거쳐 혜초 스님이 인도로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쓴 것이나 현장 스님이 인도를 갔다 온 후 집필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도 이른바 순례의 유산(遺産)이다. 만약, 인도 향지국의 왕자였던 달마가 선(禪)을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 선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각에는 달마가 선을 전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에 선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문화란 광대한 영향을 끼친 후 형성된다고 볼 때 동양의 선은 달마 이후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
불가(佛家)의 수행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외부와의 소통을 끊은 채 한정된 공간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몰입하는 무문관(無門關) 결사, 결제 정주(定住)하면서 정진하는 안거, 해제 후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구름 따라 걷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만행도 하나의 수행이다. 견주자면, 산승(山僧)에게나 회원들에게 있어 108산사 순례기도 법회를 나서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옛날 천목산 사자바위 서편 바위동굴 속에서 ‘사관(死棺)의 패(牌)’를 내걸고 비장한 마음으로 성불을 이루지 못하면 이곳에서 죽겠다며 정진에 들었던 고봉 원묘 선사와 같이 정주하면서 무문관 결사를 하는 선승(禪僧)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공부와 포교는 둘이 아닌 하나이기에 포교에 정진하여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도
옛 고승들은 목숨을 건 구도(求道) 여행을 자주 떠났다. 원효 스님이 구법(求法) 여행을 떠났다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보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그 유명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터득한 것이나 중국의 혜초 스님이 불교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장사꾼의 배를 타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 도착,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육로를 통해 십 년 동안 걸어서 당나라에 돌아와 쓴 ‘왕오천축국전’도 구법여행으로 얻어진 하나의 산물(産物)이다. 혜초 스님은 서역(西域)을 가는 데는 배로 단 1년 만에 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생과 죽음의 아찔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많이 직면했다. 그 때 스님은 ‘그대는 서역 길이 먼 것을 한탄하나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두려워한다. 길은 거칠고 눈은
‘108산사 순례기도’는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행(善行)이며 여행이다. 어머니의 태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장성하여 늙어 죽는 것, 우리는 이를 두고 사람의 일생(一生)이라 한다. 그러므로 삶은 하나의 여행이다. 부처님과 범인(凡人)의 차이점은 부처님은 생(生)의 여행 중에 깨달음을 얻어 성불을 하셨다는 데에 있다. 지금 우리는 생의 많은 날들 중, 그 여행의 절반을 훨씬 지나고 있으며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누구나가 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삶이 기쁨보다 후회로 점철되어 있음을 실감(實感)하게 된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또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남은 6년간의 긴 장정(長程)은 자신과 벌이는 하나의 진실한 약속이며 싸움이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부처이고, 일상 사물(事物)이 다 부처이다.’신심이 굳은 사람은 화신불과 보신불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직하게 생활하기 때문에 날로 발전한다. 이와 달리 신심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안정적이지 못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신심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부처님의 가피력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산사순례 회원들의 개개인들의 신심은 매우 깊어 일일이 설명하기조차 힘들다. 만약, 그들에게 간절한 신심이 없었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부터 그 먼 길을 달려와 법회에 참석하기 어려울 것이다. 천안 광덕사 순례 때였다. 그 날은 새벽부터 초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법회가 시작되고
사람은 일생 동안 많은 인연들을 만들고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업(業)을 짓는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해 제대로 참회(懺悔)조차 하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마치 시간을 여행하듯 느릿느릿 살아 온 것 같지만 찰나처럼 빠르게 흘러가 버린 세월에 스스로 놀란다. 그 순간 우리는 헛되게 보내온 세월에 대해 아쉬움과 후회에 젖지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다. 108 산사순례는 이렇듯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지은 업장을 지우고 세파에 시달려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때문에 9 년간의 긴 여정은 모든 산사순례 회원들에게 있어 결코 단순한 여행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생은 백년도 살지 못할 정도로 유한(有限)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상은 무한(無限)하다. 산사를 찾다보면, 우
‘108산사 순례기도회’의 가장 큰 의미는 보시와 선행 그리고 잃어버린 내 마음을 찾는 데에 있다. 부처님은 중생을 가엾게 여겨 불법을 스스로 찾도록 세상만물에 진리의 자취를 남겨 두셨으나 미련한 중생들은 찾는 방법을 모르고 찾을 수조차 없었으며 신심마저도 혹세무민(惑世誣民)에 시달려 어지러웠다. 하지만 뜻있는 선지식들은 진리의 불씨를 찾는 그 마음을 손에서 결코 놓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선지식이 바로 나의 은사이신 청담대종사였다. 큰스님은 평생 무지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역경·도제육성·포교 이 세 가지의 서원을 세우셨다. 내가 ‘108산사 순례기도회’를 결성한 것은 큰스님의 그러한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 이다. 이 기도회의 핵심은 ‘무주상보시(無住常報施)’의 실천에 있다. 회원들이 하고 있는 ‘군
108산사순례기도회 현장. 순례 후 혜자 스님은 동참 불자들에게 염주알 한 알씩을 직접 나누어 준다. ‘108산사순례기도회’는 이른 새벽, 경주·울산·포항·부산·대전·대구·원주·일산·인천·서울·경기 일원 등 전국의 법등(法燈)에서 시작된다. 어린불자부터 팔순의 노(老)보살까지 배낭을 짊어지고, 화안애어(花顔愛語)로 마주하는 그들을 보면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그들이 부처이며 그들의 얼굴이 염화미소이다. 그동안 나는 ‘108산사순례기도회’를 이끌면서 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왕자 직(職)을 버리고 29세 때 성불을 위해 6년간의 고행(苦行)을 떠났던 그 마음으로 2006년 9월 도선사에서 입재 후, 그 해 10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 영축산 통도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