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에서 “‘출가인’이 외전을 익히는 것은 마치 칼로 진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진흙은 쓸 곳이 없는데 칼만 저절로 상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용수(150~250)의 ‘대지도론’에서 “‘계’를 수지하지 않는 사람은 영리한 지혜가 있을 지라도 ‘세상의 일’을 ‘경영’해서 여러 가지 ‘생업’의 일을 구하려고 한다. 지혜의 뿌리가 점차 둔해지는 것이 마치 예리한 칼로 진흙을 베는 ‘도공’과 같이 둔한 그릇만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제바(提婆, Āryadeva, 170~270)의 ‘백론’에서 ‘내도’는 불교도고, ‘외도
한 승이 투자에게 물었다. “겁화가 밝게 타오를 때는 어떤 상황입니까.” 투자가 말했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린다.”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선사는 호흡을 관찰하는 안반관(安般觀)을 수습하였고, 화엄교학도 연찬하였다. 취미무학(翠微無學)에게 참문하여 선법의 종지를 돈오하였다.여기에 제시된 문답은 어떤 승이 찾아와 ‘인왕경’ 호국품의 게송을 가지고 질문한 것이다. 천라국이라는 왕에게 반족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어서 왕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태자의 스승인 나타(羅陀)라는 외도는 태자에게 왕의 머리 천 개를 취하여 천신에게 제사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함께 수행해 모든 존재가 안락함을 누리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깨달음이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으로 이뤄진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으며, 그 안에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이러한 것에 집착하면 끝없는 고통만을 받는다.모든 존재나 주변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아 그 안에 나라는 존재, 나의 것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것이 바른 가르침이지만, 그 안에 속한 구성원들은 아직 미혹한 범부들이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사
도선의 ‘사분율행사초’에 따르면 승가를 구성하는 조건은 이화(理和)와 사화(事和)이다. `이화'는 불교 교의를 함께 따르는 것으로 열반해탈을 목적으로 한다. `사화'는 계화동수(戒和同修), 견화동해(見和同解), 이화동균(利和同均), 신화동주(身和同住), 구화무쟁(口和無諍), 의화동열(義和同悅)로써 육화합을 의미한다. 위 두 가지 화합을 조건으로 하기에 승가를 화합중이라고 부른다.육화합 가운데 세 번째까지는 특정구역을 대계(大界)로 정한, 현전승가 대중이 보편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화합이다. 동일한 계를 지키고, 견해가
룸비니를 떠나 포카라 공항에서 카트만두로 올 때는 12명 정원의 경비행기를 탔다. 돛단배만 한 비행기다 보니 조종실과 객실이 한 공간이었는데, 조종사가 여성이었다. “와~ 멋진데!” 하는 감탄사도 잠시, 비행기에 내려 마주하는 일반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쓰레기가 산이 되도록 방치된 마을 길에서 한 블록만 나서면 카트만두 명품거리, 거기서 잠시만 내려가면 북한식당도 있다. 수일간 인도 음식만 먹다가 평양냉면과 김치가 몹시도 반가웠지만 그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종업원들의 모습에 왠지 모를 씁쓸한 여운이 남았다.신성한
한때 지구촌 시대 혹은 세계화 시대가 앞당겨졌다고 좋아한 적이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network)로 연결되었을 때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구촌 소식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경제도 점차 세계화 추세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같은 세계적 대재앙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오히려 세계화가 전염병 확산의 주범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국경 봉쇄를 통한 방역은 곧 경제적 몰락의 자초를 의미한다. 이처럼 세계화는 장점과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들리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식하고 싶은 것만 인식한다.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모두 지극히 주관적인 삶을 살 뿐이다. 가끔 “객관적으로 보면…”이라며 말하는 사람이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말한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보편적인 다수의 의견으로 위장해서 타인을 설득하고자 한다.불교는 참 편안하다. 무엇보다 억지 주장을 하지 않는다. 억지 주장을 하
멀미는 영어로 ‘motion sickness’라 표기되듯이 움직임과 관련된 병적 증상으로, 어지럼증이나 두통, 메스꺼움 등을 수반한다. 우리 몸에는 세반고리관이라는 전정기관(前庭器官)이 평형감각을 주관하는데, 귓속 세반고리관 안에 있는 림프액에 의해 얻어진 정보와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가 일치하지 않을 때 멀미가 발생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경사가 심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거나 파도가 거센 망망대해를 항해할 때, 시각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데 림프액은 몸이 전후좌우, 상하로 심하게 움직인다고 뇌에다 보고함으로써 뇌가 균형감각을 잃는다
8월 중순 수도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 재확산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더욱 강력해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한 지 여러 주째다. 사업장 일시 폐쇄로 소상공인 자영업자 분들이 겪고 계실 고통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도 공공장소에서의 의무적 마스크 착용이 몹시 불편하실 줄 안다. 그래서일 것이다.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는 시민과 이를 거부하는 시민 사이의 갈등이 언론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것은.정부 시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또는 세대별 문화 지체 등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막연하게 떠오르는 몇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비록 신체적으로 꼽추라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나아가 한국전쟁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한창인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보면 건강상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만, 최소한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력을 보면 그는 매우 열정적이었다.그가 불교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미술을 처음 배운 것은 종로 YMCA(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였고, 당시 그의 삼촌인 구자옥(具滋玉)이 YMCA의 총무였다고 하니 혹 그의 집안은 기독교에 더 가
전통적으로 우리는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여겨왔다. 한국어에서는 “몸과 마음”이라는 표현이 일상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언급하는 순서가 흥미롭다. 영어권에서는 “mind and body”라고 하지 “body and mind”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과 마음을 동일시해 온 서구인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이 몸보다 더 중한가 보다. 몸과 마음이 한자어로는 심신(心身)인데, 중국어로도 마음이 몸보다 먼저 오기는 한다. 그런데 ‘心’자가 마음을 뜻하지만 원래 그리고 지금도 몸의 일부인 심장
우리는 종종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전환을 하거나 어떤 진한 감동을 느끼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 빠른 템포의 열정적인 음악을 들으면 자극을 받거나 쾌감을 느끼고, 서정적이고 달콤한 선율에 매료돼 행복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음악이 주는 대표적인 정서적 효과이다. 하지만 여러 복잡한 관계에서 피곤한 생활의 연속인 현대 사회에서는 따뜻한 위로가 되는 음악이 필요할 때도 있다. 20세기 들어 바그너로 대표되던 후기 낭만주의 이후, 독일음악이 지배적이던 시기에서 벗어나 드뷔시, 라벨 등 새로운 종류의 음악이 두각을 나타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