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취임 이후 지난 2년 간 종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사회적으로 종단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최근 발생한 종단과 관련된 문제로 한순간에 그 위상이 추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4월 27일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과 4층 집무실에서 부처님오신날(5월 15일)을 앞두고 가진 교계 종단 출입 기자들과 가진 오찬에 앞서 중앙종회의원 영담 스님이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불교중앙박물관 불사에 관한 문제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화엄사 국고 보조금 횡령 사건에 이어 중앙박물관 불사 문제 등 최근 잇따라 터지는 종단의 문제로 종단의 위상이 실추되고 있는 데 대해 법장 스님은 “부덕해서 그렇겠지”라는 자책 섞인 말을 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1965년 4월 입적 주시경에 한글교육 받아 성철-광덕 등 제자 육성 철저한 지계정신 강조 “인간의 身病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소?” 조선총독부가 세운 의학전문학교의 졸업을 목전에 둔 청년은 용성 스님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혔다. 이 ‘마음의 병’을 어찌해야 하나. 결국 청년은 인간의 몸을 고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화두가 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법’을 찾아 출가를 결심한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 불교의 주춧돌을 세운 대선사 동산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이다. 스님은 1890년 2월 25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에서 정경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본명은 동규였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에 소년시절
89년 4월 13일 별세 7세에 출가 22세에 강주 「불교시보」창간 후 친일 내선일치·학도병 강권 등 이회광, 권상로 등과 더불어 일제식민지 치하의 대표적인 친일승으로 손꼽히는 대은 김태흡. 그는 한때 불교계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학승이자,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뜻을 이룬 인물로 주목받던 시절이 있었다. 1899년 강화도에서 출생한 김태흡은 세살되던해부터 할머니와 떨어져 강원도 산골의 한절에서 성장해야했다. 사찰에서 자라던 그는 7세에 심원사 계암을 은사로 출가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던 것과는 달리 김태흡은 대단히 영민했고 학문에도 큰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법주사 강원을 졸업한 그는 전국의 대강백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92
1937년 3월 출가 81년 조계종 종정 추대 철저한 원칙주의 고수 “수행자 본분, 수행”강조 퇴옹당 성철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해방 후 정화 운동 등 종단 안팎에서 발생한 각종 문제로 인해 쇠퇴기를 맞던 한국불교에 선풍을 진작시키면서 한국불교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위없는 깨달음을 위해 평생을 일관된 삶을 추구했던 수행자로서 불교 뿐 아니라 타종교인들 조차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191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성철 스님은 하이네의 시집을 통독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자주 갖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 20살 되던 해 결혼을 했고 두 딸을 낳을
1981년 3월 19일 입적 日 도쿄대서 ‘보조’ 전공 “조계종조는 보조” 주장 정화운동의 이념 제공도 불화 이재열 거사는 평생을 조계종사 정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조계종 종조(宗祖)를 고려 보조국사로 보아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는가 하면 1950∼60년대 청정 비구 승단 건설을 위한 정화운동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1915년 3월 1일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한 이재열 거사는 1931년 3월 대포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학업을 계속하고자 서울로 유학했다가 이듬해 당시 운허 스님이 주석해 있던 봉선사로 출가해 대허 스님을 은사로 운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3년 간 봉선사 홍법강원에서 운허 스님에게 사미과와 초등과 중등과를 수료한 그는 1935년
한용운과 3·1운동 참가 18세에 용문사 출가 조선의열단-임시정부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운암(雲岩) 김성숙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불교계 대표적 항일 투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한용운, 김법린 등과 함께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는가하면 이후 조선의열단, 재중조선 총동맹,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등의 항일단체에 참가해 주요 요직을 맡으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성숙은 어릴 때부터 가난과 함께 일본 식민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암울한 시대상황과도 싸움을 해야만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16년 김성숙은 집안의 삼촌이
33년 3월 개성박물관장 경성제대서 미술사 전공 10년간 150편 저술 남겨 불교미술사 중요성 일깨워 우현(又玄)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술사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 미술사학을 전공해 한국미술사 연구의 첫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등 그의 문하에 많은 학자들을 배출해 해방 후 한국미술사학계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05년 2월 인천에서 태어난 고유섭 선생은 1925년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재능을 보여왔던 그는 경성제대 예과 시절 유진오, 이효석 등과 문우회를 조직해 시작(詩作)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예과를 마친 고 선생은 이후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우에노 나오
1992년 2월 7일 입적 4만8천여권 율서 발간 한국불교 율 중흥에 헌신 81년 전계대화상 추대 자운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일제시대 왜색화된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청정계율을 근간으로 수행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는가하면 율장 연구와 한국불교 율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1911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나이 15세 되던 1926년 어머니를 따라 찾았던 오대산 상원사에서 혜운 스님이 들려준 ‘백년삼만육천일 불급승가반일환(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 세속의 100년 3만 6000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이라는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를 듣고 출가의 발원을 세우고 이듬해 해인사 혜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
2000년 1월 28일 입적 한암 스님 은사로 출가 해인사 안거 이후 40안거 동산-고봉 등과 선맥 이어 비룡 스님은 평생을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참선정진과 중생교화에 전념하며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맹정진에 나섰는가 하면 후학들에게 지계를 강조함으로써 종단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 비룡 스님은 1907년 4월 개성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그의 나이 22세 되던 1923년 강원도 인제의 한 사찰에서 열린 법회에서 ‘도 닦는 공부하는데 부처님 가르침말고 다른 것은 다 소용없다’는 한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처음 인연을 맺었다. 한암 스님의 법문에 깊은 감동을 받은 비룡 스님은 한암 스님에게 자신이
2001년 1월 21일 입적 日화엄종 신라 전래 밝혀 76년 대한전통불교硏 창립 화엄 사상 대중화에 앞장 “동아시아권의 불교도와 불교연구자 그리고 인문과학연구자들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견고한 교량을 놓아주시고 동아시아권 불교연구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신 선생님을 잃은 것은 정말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하루라도 빨리 보살로 환생하시어 꼭 저희들 앞에 그 자태를 나투시고 저희들을 인도해 주십시오.” 2001년 1월 23∼24일 일본 죠엔지(常圓寺)에서 봉행된 김지견 박사의 장례식에서 일본 도쿄대 기무라 기요타카 교수는 이 같은 조사를 통해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불교학 연구에 한 평생을 바친 김지견 박사는 한국 화엄학 연구의 선구자로 추앙 받는 인물이었다.
1979년 1월 16일 입적 운봉 스님에게 전법 경허-혜월-운봉 법맥 묘관음사 창건 후학양성 향곡 스님은 ‘깨달음의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자신의 구도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후학을 대하는 데도 남다른 면을 보였던 인물이다. 특히 ‘납자 제접에 있어 향곡 스님을 능가하는 이는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절 집에서 회자되는 것은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그의 뜻과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1912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난 향곡 스님은 불심이 깊은 집안에서 성장한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주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거나 고승을 친견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던 스님은 나이 16세 되던 해 이미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던 둘째
1957년 1월 10일 입적 현 조계종 초대 종정 환응 강백 법통 계승 후학 양성에 주력 만암 스님은 선과 교를 겸비하고 일제시대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고승 중에 한 사람이다. 특히 스님은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비구·대처간의 갈등 속에서도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종단의 안정적 변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또한 선농일치를 주창해 사찰의 자급자족을 구현했고, 일찍부터 교육 사업에 전력해 백양사 청류암에 광성 의숙(廣成義塾)을 설립하는 등 교학 분야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기도 했다. 187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와 사별하고 사숙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하던 중 나이 10세 되던 해 백양사로 입산, 취운 도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 후 만암 스님
1997년 12월 11일 입적 인욕-청빈-보시 실천 85년 청해문도회 결성 후학에 본분사 강조 장일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선승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수행처를 돌며 오후불식, 장좌불와 등 용맹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는가 하면 평생을 인욕과 청빈, 보시를 실천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스스로 엄격한 지계(持戒)를 몸소 실천하며 후학들에게 “진정한 수행인이 되지 않으려면 속히 환속하라”고 경책하며 수행자의 본연의 모습을 강조했던 스님이었다. 1916년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강성윤 씨가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위해 대구에서 황해도로 이사한 지 1년 후부터 스님은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었
2004년 12월 3일 별세 68년 보련각 문 열어 출간 불서만 600여종 이익보다 신심 앞서 한국불교 근현대 영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조계사 주변에는 종단사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명물 불교상점들이 있다. 조계사 앞 불교타운의 1호 점포는 자타가 공인하는 ‘불서보급사’다. 재단법인 진흥원을 설립한 고 장경호 거사가 문서포교를 위해 설립한 ‘불서보급사’는 오늘날 불교타운의 시발이 됐다. 그 뒤를 이어 불교타운에 발을 들인 보련각은 그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출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불교를 공부했던 젊은 학자들과 스님들에게 보련각은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그리고 아직도 건재한 불서 보급의 중심지였다. 보련각을 설립하고 이끌어온 대표 이봉수
불교·종단 정화 일심 발원 2003년 12월 4일 입적 불교정화 위해 한평생 생활 속에서 중생교화 소탈해도 계율엔 엄격 노천당(老天堂) 월하(月下) 스님은 조계종의 큰 어른이었다. 1950년대 정화운동에 나선 이후 종앙종회 의원에서부터 총무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종정에까지 오른 이력이 이를 말해준다. 스님은 그러면서도 50안거를 기록하는 등 이사(理事)를 겸한 선승이었다. 월하 스님은 1915년 4월 25일 충남 부여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희중(喜重). 스님은 어릴 때 집 근처의 고란사 스님들을 보면서 ‘절 생활을 해봐야 되겠다’고 출가를 결심했다. 이 때 속가 부모님이 세 번이나 설득했지만 결국 33년에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에서 차성환
한국불교 정통성 수호 앞장 78년 11월 26일 입적 학교설립- 후진양성 만해 교류하며 항일운동 불교 정화 운동 주도 청년기에는 항일 운동과 인재 양성에 몸을 바쳤고 해방 이후에는 불법수호를 위한 정화운동에 진력했던 추담 스님은 그 한 몸이 선원이요, 포교당이었다. 스님은 1898년 10월 27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정걸(定杰). 스님이 불교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함흥의 귀주사(歸州寺)를 자주 찾았던 까닭도 있었지만 함흥공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대정대학에서 불교철학을 전공한 이후부터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고베 선광사(善光寺)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귀국 후 귀주사 본말사가 운영하는 능인학원을 설립하고, 해동불교청년회를 조직해 한국
2003년 11월 12일 입적 미주 포교 선구자 장좌불와 수행 40년 계율 강조한 선승 “내가 가도 부디 화합해 청정가풍을 이어가야 한다. 수행 열심히 해 중생 구제하는 일이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다.” 지난 해 11월 12일 청화 스님은 상좌들에게 이 같은 간곡한 당부의 말을 남겨둔 채 이생과의 연을 마감했다. 평생을 하루 한끼 공양과 장좌불와 수행으로 일관하면서 중생구제에 앞장섰던 청화 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놓지 않았다. 스님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덜어주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무주당 청화 스님. 스님은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4세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5년제 중등학
1971년 11월 15일 입적 1966년 제2대 종정 1955년 제2대 총무원장 1902년 10월 진주 출생 파사현정(破邪顯正).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기수 청담 스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이 말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청년 시절에는 일제라는 적과 싸웠고, 해방 이후에는 조계종에 남아있는 일본불교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싸웠으며, 말년에는 조계종의 분열과 종권의 다툼과 싸운 그리고 평생을 자기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에서 물러설 줄 몰랐던 스님의 삶은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 그 자체였다. 청담 스님은 1902년 10월 20일 경남 진주에서 성산 이씨 이화식과 고부용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찬호. 진주농고 시절 ‘학우운동’ 이란 단체를 조직해 학교 밖에서
98년 11월 1일 입적 82년 해인사 주지 역임 회관 비롯 9동 중건 ‘염불제일’ 별칭 얻어 명진 스님은 오늘날 해인사가 법보 종찰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갖추게 한 장본인이었다. 40년 가까이 해인사에 주석하면서 쓰러져 가는 가람을 각종 불사를 통해 새롭게 일으킨 인물이었다. 명진 스님은 1939년 전북 정읍에서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우연히 스님의 집을 찾은 한 스님으로부터 “이 아이가 여덟 살만 되면 합천 해인사로 보내라”는 말 때문인지 스님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스님은 55년 16세 되던 해 계룡산 신원사를 찾아 영암 스님을 은사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불문에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60년 부산 범어사에서
1993년 10월 27일 타계 교계 3대 신문 창간 주역 정론직필 삼보 외호 앞장 경전 선원빈 거사는 교계 3대 신문의 창간을 주역한 불교 언론의 선구자적 인물이다. 1971년 불교기자로 첫발을 디딘 그는 이후 20여년을 ‘사부대중을 이끌어 자비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원력으로 교계 언론을 이끌었다. 그는 교계 언론이 종래의 종보(宗報)나 사보(寺報)의 틀에서 벗어나 종단이나 특정 집단에 예속되지 않은 객관적 사실 전달에 앞장섰다. 1942년 현재 북한 땅인 강원도 철원군 묘작면에서 태어난 선원빈 거사는 천성적으로 사색하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학창시설 문예 활동에 남다른 재질을 보여 온 그는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불교와 언론과의 인연 만들기에 들어갔다. 선원빈 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