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실 불국토의 꿈 미륵사 창건으로 표출전륜성왕 권위 의탁해 왕실 존엄 제고 의도 ▲백제 무왕 40년(639)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지난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미륵사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의 발원과 정재 희사로 창건된 왕실의 원찰임이 밝혀졌다. 어느 날 백제의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기 위해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도착했다. 이때 못 속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일행은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며 경의를 표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은김유신이 추진했던 정략선덕여왕 후원 가능성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의 전경. 경내의 비각에는 비석의 몸체는 없고 귀부(龜趺)와 이수(首)가 남아 있으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신라왕릉 중 묘 주인의 신원이 확인되는 유일한 능이다. 신라 진평왕 47년(625) 무렵. 정월 보름 김유신(金庾信)의 집 앞. 김유신과 김춘추(金春秋)가 함께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이때 김유신(595~673)은 31세, 김춘추(604~661)는 22세였다. 유신은 춘추의 옷고름을 일부러 밟아서 떨어뜨리고는 말했다. “우리 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진흥왕 화랑제도 설립인재 발굴의 새 창구 젊은 화랑과 낭도들나라 위해 충성 다짐 ▲1934년 경주시 금장리 석장사 터 부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 신라의 두 화랑이 학문에 전념하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 내용으로 총 74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크게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흥왕과 여러 신하들은 인물을 알아보기 어려움을 근심했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인재의 발굴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에 진흥왕은 화랑제도를 설립했다. 미모의 남자를 골라 그를 단장시켜 화랑이라 했는데 수많은 낭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로 도의(道義)를 닦고, 혹은 가악(歌樂)으로 즐기며, 혹은 산수(山水)
수문제 이어 양제도 3차례에 걸쳐 침공을지문덕 살수에서 30만 정예군 섬멸 ▲수나라는 대규모 군사력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을지문덕 등 고구려 명장들과의 싸움에서 대패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디오라마. 전쟁기념관 제공. 7세기 초, 고구려는 4차에 걸친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이 부분 서술도 대부분 ‘자치통감’ 등 중국 기록으로 재구성한 정도다. 을지문덕 관련 서술조차 마찬가지다. 고건무가 이끌었던 결사대 기록은 ‘수서’에만 전한다. 이처럼 중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만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어렵다. 수나라의 장수와 전략과 패배 등
유교·도교에도 깊은 이해신라 최고의 문장가 명성 진평왕 등 성인으로 존숭국내 정치·외교문제 자문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지도하는 모습의 청도 운문사 대웅전 벽화. 7세기 초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로는 원광(圓光)과 지명(智明)과 담육(曇育)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국 유학을 다녀온 고승이지만 지명과 담육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원광의 전기는 ‘속고승전’과 ‘삼국유사’ 등에 전한다. 원광(542~640)은 이 무렵 신라의 대표적 고승이었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불교는 물론 유학과 노장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대제국으로 등장하던 시기에 유학을 다녀옴으로서 수나라의
신라, 오랜 동맹 깨고한강유역 백제땅 점령 백제의 젊은 왕자 여창뺏긴 땅 찾으려다 참패 ▲백제 위덕왕은 자신을 구하려다 무참히 죽어간 아버지 성왕을 위해 능을 조성하고 그 가까운 곳에 성왕의 추복과 능의 수호를 위해 능사(陵寺)를 창건했다. 사진은 1993년 이곳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 고구려가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 동맹으로 대비했다. 그래도 불안했던 백제는 472년 북위에 고구려 남침을 호소하며 군사 원조를 청했지만,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장수왕이 거느린 3만 고구려 군사가 백제 서울 한성을 공격한 것은 475년 9월, 포위 7일 만에 한성은 함락되었다. 개로왕이 성을 나
전란의 소용돌이에서충성·배신·욕망 난무 피로써 피를 씻어내는참혹한 살육도 잇따라 ▲7세기 중반 한반도 지도. 지나간 세월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시기란 없지만, 그래도 더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더 큰 변화를 수반했던 시기는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7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7세기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급격한 변화가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동 삼국간의 극심한 항쟁이 꼬리를 물었던 시기이면서 동시에 길고 긴 전쟁이 신라의 삼국통일로 막을 내린 때이기도 하고, 영웅적인 인물들이 활동했고 뛰어난 사상가가 배출되기도 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7세기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