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坐)는 몸도 마음도 그 자리에 앉는 것, 선(禪)은 마음을 조절해서 잘 쓸 수 있는 작용!’한 문장에 한 호흡 가다듬을 때가 있다. 좀 더 깊은 사유 속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무각(無覺) 스님의 저서 ‘선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에서 본 저 한 문장을 마주했을 때 그러했다. ‘좌(坐)는 일상생활에서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경계를 보면서, 그 많은 현상이 다 공한 것이고 연기에 의해서 인연하여 잠시 일어나는 것임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제대로 앉는 것입니다.’무작정 앉는 게 아
5월의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날, 청주 혜은사 관세음보살 입상 점안식이 봉행됐다.(1992) 증명법사는 당대 선지식 청화(1924∼2003) 스님. 사자좌에 올라 법문 내리려는 순간 관세음보살상의 머리 위로 무지개처럼 영롱한 반원형의 띠가 나타났다. 야단법석에 운집한 300여명의 사부대중이 합장한 채 술렁였다. ‘저 반원형의 빛 또한 허상’임을 직시하고 있던 덕산(德山) 스님이었지만 차오르는 환희를 억누를 길은 없었다.군 제대 직후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을 때 극심한 오한을 동반한 부종이 생겨 진료를 받았다. 신증후군(Neph
‘가을 풀숲에는 지난 왕조의 절(秋草前朝寺)/ 남은 비석에는 한림학사의 글(殘碑學士文)/ 천 년 동안 물은 흘러가고(千年有流水)/ 해질녘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落日見歸雲)’(백광훈(1537∼1582)의 시 ‘홍경사’)고려의 왕자 안종(安宗·?∼996)은 불법의 대의를 전하고자 큰 절 하나를 세우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다했다. 그 꿈, 아들 현종이 실현시켰다.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으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각 불사를 일으킨 고려의 8대 왕인 그 현종(顯宗·재위 1009∼1031)이다.충남 직산에서 가까운
중국 시안(西安)에서 황허(黃河)의 서북쪽 고비사막을 지나 험준한 톈산산맥(天山山脈) 줄기를 넘어 로마까지 이어지는 7000㎞ 길. 고대의 동서문명을 이은 실크로드의 관문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의 동쪽 끝자락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이다.거친 모래바람을 뚫어가며 힘겹게 걸음을 내딛다 닿은 오아시스. 생의 끝자락일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 마신 한 모금의 물이 타들어가는 목마름을 적신다.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가던 대상(隊商),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 모험가 모두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흙산 절벽에 구멍을
一光東照八千土 (일광동조팔천토) 大地山河如杲日 (대지산하여고일) 即是如來微妙法 (즉시여래미묘법) 不須向外謾尋覓 (불수향외만심멱)한 줄기 빛으로 팔천토 비추니 대지산하가 해처럼 밝아지네. 이것이 여래의 미묘한 법이니 모름지기 밖에서 찾지 말라.하동 쌍계사 화엄전에 걸린 주련이다. 직역은 쉬우나 뜻을 새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앞의 두 구와 뒤의 두 구가 문맥상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광(一光)·미묘법(微妙法)을 간파하지 않고는 100년을 들여다보아도 그 깊은 뜻 꿰뚫지 못할 것이다. 법보신문에 연재 중인 ‘법상 스님의
8월26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이 입국했다. 명법사 주지 화정 스님은 이 소식을 들은 직후 1000만 원을 기탁했다. 생명의 위협 속에 흔들린 마음을 추스르고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뜻일 것이다. 아울러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데 이것은 일부 종교단체들에 의해 퍼져가고 있는 ‘난민 포비아’를 극복하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최근 명법사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지난한 과정 끝에 2007년 설립한 명법사 복지재단을 지원법인에서 운영법인으로 바꿨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사회의 그늘진 곳 더
하얀 암석 덩어리 하나 자체가 산으로 우뚝 서 있는 백암산(白巖山) 백학봉(白鶴峰)은 압도적이다. 산 아래 펼쳐진 산사와 쌍계루, 계곡과 숲이 어우러지며 계절마다 빚어내는 풍광 또한 절경이다. 하여 옛 시인들도 ‘백암의 풍경은 그림으로도 그리기 어렵다’며 ‘천인(天人)의 솜씨’라 감탄했고, ‘남녘에서 또 다시 금강산을 구경한다’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렀다.특히 물 위에 떠 있는 백학봉을 품은 쌍계루(雙溪樓)가 자아내는 운치는 ‘백암 12경’ 중에서도 묘경(妙境)으로 꼽힌다. 그 풍취에 한 번만이라도 젖어 본 사람들은 안다. ‘
‘두 손 모아 귀의, 마음 모아 정진, 지혜 모아 성불’창원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불지사 일주문 앞 돌에 새겨진 글이다. 성심과 간절함이 농축돼 있다. 그래서일까?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다 보면 세파에 출렁거린 마음도 가지런히 다독여진다. 불지사 건물의 이채로운 외관도 눈길을 끈다. 두 날개를 활짝 편 형상으로 마감한 지붕은 시원스럽게 창공을 가르는 극락조다. 법당 내부로는 자연광이 들어찬다. 천장 한가운데를 길게 가르는 천창(天窓)이 품었다가 내려놓은 빛은 불보살님의 숨결과 만나 성스러움을 더하며 곳곳으로 스며든다. 한밤중에
5명의 비구와 야사를 포함한 61명의 아라한 교단이 형성되었을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고서, 천신과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로 가겠다.”2500여년 동안 내려온 부처님의 ‘전도선언’이다. 여기서의 전도는 ‘성인의 가르침을 편다(聖人之布敎)’는 포교(布敎), ‘설법으로 지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한다(敎導化益)’는 교화(敎化)와 직결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대에게 알리는 차원을 넘어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 사람은 외로움에 흔들린다/ 흔들림은 살아있는 한 모습이다. …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죽은 이가 간절히 느끼고 싶은 모습이란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로담 시 ‘이유는 없다’ 중에서)무심히 툭 던진듯하지만 외로움의 끝에서 처절하게 사무쳐 본 사람만이 토해낼 수 있는 시정이다. 그렇다. 아파서 눈물 흘리는 것도 살아서의 일이요, 삶의 징표이다.로담 정안(路談 正眼) 스님. 길(路)과 이야기(談)를 조합한 법호 로담이 이색적이다. 경기도 가평에 세운 절이 아가타 보원사(阿伽陀 寶園寺)인데 이
‘산문에 발 멈추니/ 극락이 저만치 속세에 있는데/ 이끼 낀 섬돌/ 닫혀진 법전(法殿).// 열두 돌층계를 올라가면/ 먹장삼 엎드린 비구 있어/ 여기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들려옴직도 한 발자취 소리. …’(박기원 시 ‘범어사’ 중에서)범어사 대웅전·관음전·3층석탑의 도량과 계곡을 구분하는 돌담길 끝나는 곳에 너덜겅이 있다. 절 입구 등나무 군락지부터 범어천을 따라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폭 70m·길이 2500m의 암괴류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바위들이 20여만m²에 널려있는데 옛 선지식들은 일러왔다. ‘솟아 있는 저 바
은하수(漢)에 떠 있는 별 하나쯤 가볍게 낚아 당겨(拏) 품을 만큼 높게 치솟은 뫼(山) ‘한라산(漢拏山)’. 산정에서 사면으로 흘러 내려간 기운들은 제주 들판에 368개의 오름을 솟게 했다. 곱게 빻은 쌀 수북이 쌓아놓은 듯해 미악산(米岳山)이라 했다는 ‘솔오름(쌀오름)’은 서귀포 남쪽 땅에 불쑥 드러나 있다. 그 오름에서 시작한 물길(동홍천)은 정모시를 지나 폭포수로 응집된 직후 곧장 바다로 떨어진다. 아시아 유일의 해안폭포인 ‘정방폭포’다.‘정방폭포의 못(수원)’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정모시의 쉼터 곁에 정방사가 자리하고 있다.
2015년 10월의 가을.쌍계사 새벽예불을 마치고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 봉안돼 있는 금당(金堂)으로 향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도량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금당까지 길게 놓인 돌길! 성스러웠다. 중국 남종선(南宗禪)을 이끈 육조 혜능 스님에게 연결된 태고(太古)의 탯줄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참배 때마다 마주했지만 이토록 압도적으로 느껴보는 건 처음이다. 돌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연거푸 일곱 번의 절을 올렸다. 고개를 들었다. 기둥에 걸린 육조 혜능 선사의 선시가 새겨진 주련이 시야에 명징하게 잡혔다. 菩提本無樹(보리
2020년 9월3일 새벽 2시 태풍 마이삭(MAYSAK)이 부산·경남에 상륙했다. 해발 1189m의 재약산(載藥山) 깊은 골짜기까지 휘몰아친 폭풍은 산사 일주문 앞 거목들의 뿌리를 뽑아내고는 전각, 삼문(三門), 담 등을 파훼시켜 갔다. 무자비한 바람에 도량 내 45개 건물 중 30여개가 대파됐다. 4일 오전 10시 대웅전 앞에 섰다. 전면에 보이는 범종루는 운판, 목어, 법고, 범종의 소리들을 삭이며 숨죽이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용마루에서 처마에 이르는 지붕 대부분이 파손돼 있었다. 작은 담과 함께 산내의 공간을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시아본사(是我本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해인사 대중의 새벽예불 소리가 가야산을 휘돌았다. 어제 갓 입산한 청년도 대적광전 한 구석에서 절을 올렸다. 예불은 태어나 처음이었기에 스님들이 절 할 때마다 곁눈으로 보아가며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어색한 몸짓의 연속이었지만 불보살을 향한 수행자들의 찬탄 소리가 깊어질수록 환희로운 경이감에 사로잡혀 갔다. 학창시절, 서울 성수동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건국대 부속중학교에 가려면 ‘일감호(一鑑湖)’를 지나야 했다
‘푸른빛 나는 보석이 박힌 보관을 쓰고, 목걸이를 하고, 허리와 목을 꺾은 삼곡(三曲) 자세를 취해 부처님을 시봉하고, 왼쪽 팔뚝에는 끈을 묶어 고귀함을 상징하고, 오른쪽 손에는 하얀 연꽃을 들고 아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시는 보살의 시선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온 중생들을 연민해 마지않는 대비(大悲)의 모습 그 자체이다.’(각전 스님 저서 ‘인도 네팔 순례기’ 중)‘인도 서부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의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에 들어섰다. 가로 35.7m, 세로 27.6m 규모의 제1굴. 중앙광장을 둘러싼 20
오산(鼇山)에서 떠오른 달이 휘어진 섬진강을 넘어가려 한다. 밤새 내려앉은 11월의 달빛에 암자의 새벽은 더 깊어진다. 멀리 내다보이는 산하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완전함과 온전함 사이의 간극을 체득한 때부터 시작됐다.1998년 태국으로 떠났다. 선방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완벽한 낯섦에 자신을 떨어트려 거기서 이는 파문을 안아보고 싶어 떠난 길이었다. 정한 곳은 없다. 발 닿은 데로 가고 싶었던 곳이다. 날 것 그대로 보고 싶어 큰 사원을 지나 산속 깊
‘몸을 풀어서/ 누에는 아름다운 비단을 짓고// 몸을 풀어서/ 거미는 하늘 벼랑에 그물을 친다.// 몸을 풀어서,/ 몸을 풀어서,/ 나는 세상에 무얼 남기나.// 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이수익 시 ‘오체투지’ 전문)인도의 오월은 뜨거웠다. 들이킨 숨 내 뱉기도 버겁다. 그렇다해도 오체투지 10만 배만은 멈출 수 없었다. 서울 서소문 지방검찰청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통근버스 안 법원 여직원들의 담소를 들으며 광덕 스님(光德·1927∼1999) 존재를
2020년 동짓날, 극락세계에서 법을 설하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량에 서 있는 지장보살상의 품을 지나 허름한 계단을 오른 찬바람이 무량수전을 밝히는 촛불에 닿았다.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말 없는 말’이 흘렀다.“21년 지장기도를 지금 시작합니다!”세납 6살 때 아버지는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공양주를 자처한 어머니를 따라 대전의 한 작은 절에 들어서고는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가슴은 늘 먹먹했다. 가난해서 먹먹했고, 절에만 머무는 것도 먹먹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자괴감에 분노도 일었다.어느
고요했던 고운사에 선풍(禪風)이 휘몰아 쳤다.(1980) 통도사 극락선원, 묘관음사 길상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해 온 현봉근일(玄峰勤日) 스님(현 고운사 조실)이 주석하며 승가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선의 길을 열어 보였는데, 월말이면 어김없이 참선법회를 열어 철야정진으로 이끌었다. 안동대 미술학과에 입학(1979)해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청년은 2학년 때 고운사를 찾아 큰스님을 처음 친견했다. 선기 충만한 세납 40대의 근일 스님 위모(威貌)는 고산 속 설원을 활보하는 호랑이를 보는 듯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이뭣고’ 화두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