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이 대위산의 주인인 위산 화상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바랑을 팔에 끼고 법당에 들어가 동서를 왔다갔다 하더니 뒤돌아보면서 “없다, 없어” 하고는 나가버렸다. 덕산이 산문에 이르러 말하기를 “경솔하면 안되지.”하면서 위의를 갖추고 다시 찾아갔다. 위산이 앉으려 하니 좌구를 내밀면서 “스님!”하고 불렀다. 위산 화상이 불자(拂子)를 잡으려 하자 덕산이 “꽥” 소리를 지른 후 소맷자락을 흔들며 나갔다. 덕산은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나가 버렸다. 위산 화상이 저녁 무렵에 수좌에게 물었다. “아까 온 신참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때 짚신을 신고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훗날 고봉 정상에 암자를 짓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할 것이다.”
Q: 세상살이가 힘겨울수록 미륵부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륵불이 하생하면 질병과 늙음, 고통이 없다는데 그런 미륵세상은 언제입니까? A: 불교가 전파된 초기 삼국시대부터 미륵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는 기록과 유적을 볼 때 우리나라에서 미륵불은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특히 신라에서는 미륵신앙과 용화사상이 화랑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발전하여 김유신 장군이 스스로 용화도령이라고 칭한 것은 미륵신앙을 근간으로 한 것입니다. 그 후로도 자신이 ‘미륵이다’라고 자칭한 인간은 많았습니다. 미륵을 꿈꾸던 중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부린 궁예로부터 근세의 별난 종교지도자까지, 미래부처인 미륵불을 상으로 보는 어리석은 적(賊)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들 모두는 늙음과 병고, 업보를 따라 저승으
용아가 아직 납자일 때 취미 화상에게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선판을 가지고 오게. 그러면 일러주겠네.” 용아가 선판을 가져오자 취미 화상이 그것을 받은 즉시 내려쳤다. 용아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내려치는 것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조사가 오신 뜻은 없습니다.” 용아는 다시 임제 화상에게 찾아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다. “나에게 포단을 가지고 오게. 그러면 일러주리라.” 용아가 포단을 가져오자 임제 화상은 그것을 받은 즉시 내려쳤다. 용아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내려치는 것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조사가 오신 뜻은 없습니다.”
Q. 불교공부에서 경계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경계라고 합니까? A. 경계는 과보에 의한 지위나 처지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수행측면에서 경계는 반드시 지어야 할 마디며 그러므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일컫습니다. 마디를 통하여 자라고 지탱되는 대나무처럼 마음도 이와 똑같아 어떤 경계를 맞이하고 초월하느냐에 따라 그 어떤 시술이나 절대자도 모방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변화와 발전을 맞이합니다. 참선수행으로 드러나는 경계는 대체로 선이 굵고 분명합니다. 동기부여로 분심이 동하면 마치 산모처럼 심신을 뒤틀며 전생습인의 뿌리가 빠지는 인고를 겪지만 그만큼 시절인연을 당기는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넘어야하는 내면세계가 업이고 그 과정이 경계이지만 어떤 인연으로 머무름 없는 최상승법을 터득
조주 화상이 대중에게 이르셨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하는 것을 꺼리면 된다. 조금이라도 도의 경지를 말하려 한다면 바로 간택에 떨어지거나 명백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백한 그것 속에도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것을 아까워하고 지키려 하느냐.” 이 때 한 수행승이 물었다. “이미 명백한 데에도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합니까?” “나도 모른다.” “화상이 모르신다면 왜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고 하십니까?” 이에 조주 화상이 말했다. “묻는 것은 잘 하는구나. 그만 절이나 하고 물러가라.” 조주(778∼897) :산동성 조주부에서 출생. 14세에 남전보원에게 출가했다. 120세까지 살며 수많은 이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Q: 좌선(坐禪)이 참선(參禪)입니까. 참선이라 하면 화두를 잡거나 호흡을 조절하면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을 연상하게 됩니다. 조용한 절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참선이라면 아무나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부처되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까? A: 선(禪)은 일상입니다. 참선은 아무생각 없이 조용히 앉아 있거나, 공안을 들고 면벽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선수행은 말과 모습,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좌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앉은 부처는 없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간에 몸과 뜻,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부처이고 참된 좌선입니다. 또한 좌선은 오욕칠정이 들끓고 생사가 겹치는 삼계(三界)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을 없앤 무심한 경
남전 스님이 백장산(百丈山)의 열반(涅槃)스님을 참방하자, 백장 열반스님이 물었다. “예로부터 많은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었느냐?” “있습니다.” “무엇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인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외물(外物)도 아닙니다.” “말해버렸군.” “저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떠합니까?” “나는 선지식이 아니다. (남에게) 할 말이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리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너무 말해버렸구나.” 남전 보원(南泉普願,748∼835) : 마조도일 스님의 3대 제자 중 한 명, 30여 년 간 남전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밭을 갈며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Q: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성현도 삶의 장애는 있기 마련입니다. 중생구제 서원도 내려놓을 수없는 멍에이며, 병고와 늙음이 괴롭지만 성현은 이끌림이 없습니다. 속세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산속으로 피신하면 그치지 않는 새소리 물소리와 싸워야 합니다. 나[我]가 수행보다 앞서면 반목과 시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세속입니다. 목전의 현실이 곧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하면 번민할 이유가 사라지고 대안이 드러납니다. 진정한 수용은 좋고 반기는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맡길 때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생겨난다는 확신입니다. 이 세상을 이치가 아닌 상으로 보면 귀천과 의심이 겹겹이기 때문에 번뇌가 그치지 않습니다. 반하여 해탈자의 삶은 상이 맺히지
하루는 동서 양편 승당에서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자, 남전 스님이 이를 보고서 마침내 고양이를 잡으며 말했다. “말할 수 있다면 베지 않겠다.” 대중들이 대답이 없자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두 동강으로 베어버렸다. 남전 스님이 다시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 조주 스님에게 묻자 조주 스님은 문득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전스님은 말했다. “네가 그 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조주 종심(趙州從諶, 778~897) : 송대에 형성된 선종오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들의 수행 과제가 되었다. 『벽암록』에 전하는 100개의 화두 중 12개가 조주의 것으로, 특히 ‘무자화두(無字話頭)’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유명하
Q: 불자들에게 있어서 절은 큰 의미를 지니는 듯합니다. 적게는 3배부터 많게는 3000배, 10000배까지, 저 또한 무릎이 아파 걷지 못할 정도로 절을 해 보았습니다. 요즘은 정치인들까지 삼보일배를 하던데 절은 왜 하는 것이며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요. A: 옥그릇도 비워야 쓸모가 있듯이 규칙적인 108배는 잡념을 이기고 하심과 겸손을 실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정성을 기울여 절을 하게 되면 때에 따라 온몸으로 무아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진 참회는 물론 헬스효과까지 있어 절하기는 간단하면서도 아주 괜찮은 수행법입니다. 3000배 이야기는 산중에 누구를 만나 어쩌겠다는 치기를 없애기 위한 방편이었지 무턱대고 절 많이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근자 절하기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는 것은
어떤 스님이 마조 스님에게 물었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떠나서, 제게 조사가 서쪽으로 오신 뜻을 곧바로 가르쳐주십시오.” “내, 오늘 피곤하여 그대에게 말해줄 수 없으니, 지장(智藏) 스님에게 물어보게나.” 스님이 지장 스님에게 물으니, 지장 스님은 말했다. “왜 큰스님에게 묻지 않았느냐?”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골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스님이 회해 스님에게 여쭙자, 회해 스님은 말했다. “나도 그것은 모른다.” 스님이 이를 마조 스님에게 말씀드리자 마조 스님은 말하였다. “지장 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 스님의 머리는 검다.”
Q: 』경덕전등록』에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일세. 작년 가난은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 가난은 송곳마저 없다네.” 라는 글이 있는데 송곳을 꽂는 일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A: 육식(六識)으로 닿는 것은 부처도 상(相)입니다. 송곳 꽂을 여백은커녕 송곳마저 없다는 푸념보다 차라리 ‘지난밤 꿈속에 산적이 나타나 내 마음속 재산을 몽땅 빼앗겨 지금은 빈털터리가 되었다’라고 한다면 조금은 되었다 할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 더하고 빼는 것은 오도송이 아니라 영악한 중생의 셈법입니다. 없다는 상은 치유되기 어려운 고질병이며 한번 빤짝하였다고 단박에 중생습기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심안(心眼)이 열려도 혜(慧)가 분명해질 때 까지는 장애가 첩첩입니다. 몇 생일수도 있으며,
화산(禾山) 스님이 법어를 했다. “익히고 배우는 것을 들음(聞)이라 하고, 더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도에) 가까움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해야만이 참된 초월이라고 한다. 스님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참된 초월입니까?” “(나는) 북을 칠 줄 알지.” “무엇이 참다운 이치(眞諦)입니까?” “북을 칠 줄 알지.”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북을 칠 줄 알지.” “향상인(向上人)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북을 칠 줄 알지.” 화산 무은(禾山 無殷 : 891~961) 스님은 당나라 말기의 인물로 『벽암록』 제44칙에 나온다.
Q : 자기만 깨달으면 일체가 성불한 것으로 여기는 참선과 현실참여를 하면서 포교 및 보시에 매진하는 보살도가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닌지요. 내면에 침잠하는 참선수행과 보시, 포교, 재보시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와의 차이에서 갈등을 갖게 되었습니다. A : 불법은 인연법으로서 태초로부터 끊어진바 없는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심법입니다. 말과 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삼라만상과 통해지는 마음이 곧 깨달음이기에 불교수행은 시절인연을 위한 각고의 노력일 것입니다. 중국이나 고대 인도 언어로 된 불서와 해괴한 종교행위를 불교의 전부로 보기 때문에 뒤틀리고 어려워진 것입니다. 선(禪)과 교(敎)가 다르지 않듯이 참선수행과 대승불교 실천 또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선과 교라는 이름에 속고 지킬 내면과 외경을 달
문수가 무착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삼백 명 또는 오백 명 정도입니다.”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앞도 삼삼[前三三], 뒤도 삼삼[後三三]이지.” 문수 : 암두·설봉 스님과 함께 덕산선감에게 배웠고 뒤에 동산 양개 스님의 제자가 되어 법을 이었다. 무창 : 원오극근 스님의 자(字)
Q :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즐길 것 다 즐기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처럼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수행을 지어 가는 것이 바른 것인지? 아니면 출가하여 꾹 참으면서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올바른 수행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A : 즐기고 싶거나 꾹 참을 것이 있으면 오백생을 닦아도 헛방입니다. 마음밖에 뜻을 둔 성불은 없습니다. 마음이 평정된 사람은 담배 술 도박 등 잡기에 의지하여 달리 즐거움을 찾을 필요를 못 느낍니다. 찰나를 저버린 깨우침은 불조이전에도 없었습니다. 현실과 괴리된 부처공부는 그 이름에 상관없이 득실거리는 번뇌 망상과 수미산 보다 더 높은 아상만 쌓게 됩니다. 그리하여 깨달았다면 틀림없이 무기(無記)에 빠졌거나 환(幻)에 사로잡힌
부산 선암사에 주석할 당시 혜월 스님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명검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스님의 명검이 '법의 요체'였음을 일본인들은 상상도 못했다. 혜월 스님이 부산 선암사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가끔 대중법회를 열고 설법을 하셨는데“나에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활인검(活人劍)과 사인검(死人劍), 두 자루의 명검이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검도, 사람을 죽인다는 사인검도 스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실제로 보여준 일이 없었다. 그래서 혜월 스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두 자루의 명검 그야말로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직접 보여준 두 자루의 칼 천하의 명검에 대한 소문은 신도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방거사가 약산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자, 약산 스님이 열 명의 선객을 문 앞까지 전송하도록 했다. 거사는 허공에 날리는 눈(雪)을 가리키며 말했다. “멋진 눈! 송이송이 딴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구나.” 이 때 선객들은 말했다. “어느 곳으로 떨어집니까?” 거사가 따귀를 한 차례 때리자 선객 들은 말했다. “거사는 거칠게 굴지 마시오.” “그대가 그래 가지고 선객이라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하지 않으리라.” “거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사가 또다시 따귀를 친 후 말했다. “눈은 떴어도 장님 같으며 입을 벌려도 벙어리 같다.” 설두 스님은 다르게 평했다. “처음 물었을 때는 눈덩이를 뭉쳐서 바로 쳤어야지.”
Q : 꽃과 나비, 물, 태양 등 지구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 존재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다가 살생과 파괴, 오염을 일삼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에서 미궁에 빠졌습니다.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저에게는 매우 절실한 문제입니다. A : 인간 역시 동·식물처럼 연기(緣起)의 산물로 이 지구에 존재하며, 절대 진리인 무위자연을 이해하면 순리를 그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전생 업(業)을 다 멸하지 못한 원인[根]이 있어 부모인연 지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금생에 인간 몸 받은 것은 그나마 전생 공덕이 있어 축생이나 미물이 아닌 만물의 영장이 되어 해탈열반에 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부여받은 것이기에 탄생 그 자체는 분명 축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특화된 소행성이기에 역동적이며
마조(馬祖)스님이 백장 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스님이 “이게 뭐지?” 라고 하니 백장스님이 말했다.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날아가느냐?” “날아가 버렸습니다.” 스님이 마침내 백장스님의 코끝을 비틀자, 백장스님이 고통을 참느라 신음했다. 스님은 말했다. “뭐 날아가 버렸다고?” 마조도일 : 중국 당나라 스님. 남악 회양스님의 제자로 평상심이 곧 도(道)라고 주창해 일상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선풍의 기틀을 세웠다. 백장회해 : 마조 스님의 제자로 ‘백장청규’가 유명하며 문하에 위산영우, 황벽희운 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