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동일적 자아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의 무아설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대개 '그럼 업보나 윤회는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라고 묻게 된다.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을 자 간의 자기동일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업보관계를 논할 수 있고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동일적 자아의 상정 없이 어떻게 전생과 현생을 잇는 윤회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업의 행위와 별도로 업을 짓는 자가 따로 있고, 보의 발생과 별도로 보를 받는 자가 따로 존재한다고 상정해놓고 묻는 물음이다. 각 주체는 따로 존재하고 업과 보는 마치 그 중 하나가 던지고 다른 하나가 받아야 할 공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정당한 업보가 되려면 공을 던진 자와 공을 받는 자가 동일인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본래(本來)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건만, 그러나 임오년(壬午年)이 온다 오대양(五大洋) 육대주(六大洲) 지구촌(地球村)의 기운(氣運)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세계(世界)의 평화(平和)와 인류화합(人類和合)의 기운(氣運)이 밀려온다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에 태양이 뜬다 임오년(壬午年)의 해가 뜬다
지난해 11월 20일 송추 계곡 한 켠에 천막을 치고 북한산 국립공원 관통터널 반대운동을 펼쳐온 지 143일째를 기록하고 있다. 꽃샘 추위가 다녀갔던 지난 주, ‘북한산 살리기 정진도량’이 있는 송추계곡엔 살얼음이 얼었다. 나무들이 잘려나간 등성이에는 오지 못하겠다는 것인지, 좀체로 봄이 더디다. 그러나, 산 하나 넘어 있는 서울과는 다르게 이 곳 밤하늘의 별빛은 총총하다. 그래도 봄은 봄이다. 3월 31일 ‘북한산 살리기 생명의 나무심기’에 동참했던 분들이 심은 ‘진달래’와 ‘산벚나무’, ‘물푸레나무’, ‘때죽나무’ 들은 여린 새싹을 동그랗게 키워 올리고 있다. 다음 주면 새끼손톱만큼 자라날 것이다. 며칠 전 다녀갔던 조계사 어린이 법회의 6학년 이준혁 어린이가 남긴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본다
정토회에서 매주 수요일 법회가 있는 날이면 좋은벗들 사무실은 보살들의 손길과 발길로 분주해집니다. 그 동안 모아 두었던 통일돼지저금통을 가져오시는 분들, 그리고 그것을 모아 사무실 한켠에서 오손도손 모여 저금통을 뜯고, 돈을 세는 분들의 따뜻한 온기로 사무실은 가득해집니다. 좋은벗들에서 96년부터 시작된 북한동포돕기운동은 올해로 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많은 국민의 관심사였으며, 또한 수많은 단체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이 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단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벗들은 이 자그마한 돼지저금통을 통해서 북한동포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따뜻한 손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작은 마음과 정
동국대 강사 조준호 박사가 본지 651호 16면에 게재된 김성철 동국대 교수의 “대승 사상-신앙 초기불교에서 나온 것”이란 주장에 대한 반론의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먼저 가장 최근의 김성철 교수의 주장을 중심으로 그 동안의 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본다. 김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한다. 이 점에 있어 분명 대소승 논쟁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시대착오적이지 않을 이유 또한 있다. 그것은 이 같은 김 교수 주장이 반복될 때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초기불교 배경 없는 대승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이 언뜻 보기에는 우리에게 당연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약 2000년에 걸친 복잡한 쟁점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대승 이전의 불
월드컵의 열기가 나라를 휩쓸고 있다. 그 동안 흘렸던 땀의 결실들이 하나하나 산물이 되어 나오고 있다. 월드컵 최초의 승리에서부터 강팀이라고 하는 국가들을 연달아 이기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 속에 가슴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아쉬움이 생겨난다. 1997년 가을 그때도 월드컵의 열기는 대단했었다. 예선에서 승승장구하던 한국팀. 그 연승의 이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차범근 감독이 경기도중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모 TV 방송에서 여과 없이 자주 방영하였고 이에 철학자 김용옥은 ‘기도는 골방에서 하렸다’라는 제목으로 모 일간지에 글을 쓴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글은 즉시 차범근 감독의 반론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김용옥과 그의 글을 실은 신문은 한동안 기독교인들로부터
건강칼럼 - 목 통증 동반한 두통엔 지압이 효과 최근에 긴장된 조직생활 속에서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직장인들이 목 주위의 통증과 두통을 호소하면서 병원을 찾는 사례가 많습니다. 즉, 평소의 과로로 몸의 진액이 부족한데다 스트레스로 기가 울체되어 화(火)가 생겨 이것이 위로 치솟으면서 목과 머리로 올라가 목과 머리의 근육이 뻣뻣해지면서 아프고 그것이 두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통증은 앞머리, 뒷머리 혹은 머리전체에서 느끼는데 둔탁하고 누르는 것 같은 통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테로 조이는 듯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는 갑자기 눈에 어른거리는 듯한 느낌이 있고 나서 속이 메스꺼운 듯도 하면서 두통이 오는데 지끈지끈 쑤시는 통증이 생기고 심하면 토하기도
'지난해 12월 4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경부고속철도의 금정산-천성산 관통 백지화 및 대안노선의 선정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선 이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천성산 구간의 공사 업체 발주 취소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고속철도공단은 노 당선자의 천성산 공사 업체 발주 취소를 묵과하고 있습니다' 금정산-천성산 관통 도로의 저지하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 지율 스님이 단식을 하는 직접적인 이유이다. 2월 5일부터 겨울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무기한으로 단식에 든 것은 불교계와 국민에게 공약한 것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천성산-금정산 관통 백지화 공약의 이행을 위해 인수위를 만나고 천성산 관통도 건립 공사를 맡을 업체 선정을 위해 발주를 강행하는 고속철도공
지난 6월말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 이후 우리 사회는 ‘언론개혁’과 관련해서 적잖은 홍역을 치루고 있다. 명백한 탈법행위가 적발되었음에도 ‘언론 재갈물리기’라고 주장하며 연일 지면을 농단하고 있는 비리 언론사의 이성 잃은 태도도 그러하거니와 이에 동조해서 ‘케케묵은 색깔시비’와 ‘편가르기’까지 서슴치 않는 일부 정치권, 시민단체를 ‘홍위병’이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지식인, 심지어 ‘언론개혁’을 ‘태무제의 폐불’ 행위에 비유하는 한 원로 언론인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갈등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공종원 논설위원은 지난 호 칼럼를 통해 “먼 옛날 중국 북위의 태무제가 사찰의 부패와 승려의 비리를 꼬리삼아 폐불한 행태와 일부 언론사의 탈세 혐의를 구실로 일부 사주를 구속하고 과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그 견해가 탄압 받지 않고 지켜질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 이 말은 18세기 프랑스의 작가이면서 사상가인 볼테르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우익 보수를 대변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변호하는 말로 이 말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놔두고 이회창 총재와 기타 우익적인 인사들이 통일축전에 갔다온 방북인사들을 위해서도 이 말과 같이 탄압 받지 않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는 이번에 그 말 많은 8.15 통일 축전에 불교 대표단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음은 서글퍼지고, 보고 느낀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마음씀씀이가 좁고 이해심
스리랑카의 불교중흥의 계기가 됐던 '샤모파리 니카야' 창립 250주년 기념하기 위한 국제불교회의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1월 16일부터 19일까지 열렸다. 인도, 태국 등 상좌부 전통의 불교국 중국, 일본 등 대승불교 50여명의 고승대덕과 불교 학자들은 자국의 불교상황을 진단하고, 문제점의 도출과 그 해결방안 및 전망을 공유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는 진월 스님이 대표로 참석했다. 이번 국제불교 회의에서는 세계적으로 볼 때, 불교를 강화하기 위하여 교리적 연찬의 심화와 그 이상실현의 방법 계발 및 구체화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함을 확인하였다. 예를 들면, 불교학문과 교육을 위해서는 불교의 원전연구에 필요한 팔리어 등 전통언어교육과 문헌연구를 제도적으로 확충하고, 학자들의 교류로 그 분야에
인터넷 언론서 개혁요구 봇물 불교계, 자발적 정화 노력 필요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비리혐의로 인해 한국가톨릭과 인터넷언론계가 벌집 쑤시듯 시끄럽다. 오프라인 언론의 지면에서는 불과 2~3단 정도의 기사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온라인 언론의 선두, 오마이뉴스에서는 40~50쪽 분량의 잡지 한 권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많은 기사와 수천건의 관련 덧글들로 차고 넘쳐 일명 '꽃동네 사태'가 향후 수 주 동안은 충분히 언론의 강한 스폿 라이트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아닌 남의 종교 이야기를 이 난에서 굳이 언급하는 것은 사회 곳곳에서 몇 가지 주의 깊게 지켜볼만한 징후가 엿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꽃동네 사태'의 발생과 해결과정에는 종교개혁의 문제가 필히 함께 논의 될 것으로 보인다
'포교사단을 사랑해서 만들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위하여 투쟁 방법으로 만들어 졌는지….' 최근 조계종 포교사단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포사모(포교사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결성의 배경을 놓고 논쟁이 일고 있다. 논쟁의 발단은 한 포교사가 포교사단 홍보팀 게시판에 포사모 결성 배경에 의혹을 제기한 글을 1월 21일 포교사단 게시판으로 옮기면서 시작됐다. 이어 22일에 백운이라는 ID를 사용하는 포교사가 '포사모라는 괴 단체에서 현 집행부를 비방하는 문서를 유포하고 있다'며 포사모를 괴 단체로 규정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자신을 포사모 회원이라고 밝힌 이가 '단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사무국을 일시 폐쇄시킨 것은 누구의 횡포였는가'라며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포사모는 지난해 1
우리사회엔 양심의 소리를 거역한 채 더 이상 살생의 도구가 될 수 없다며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적을 죽이는 성스러운 전쟁은 물론 인간을 살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병역제도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과연 적을 죽이는 성스러운 전쟁은 물론, 인간을 살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병역제도는 정당하지 못한 것일까? 이런 물음을 놓고 두 갈래의 답변이 우리사회에서 맞붙고 있다. 한 갈래는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자유를 지켜낼 징병제는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 갈래는 군 복무는 국가의 의한 합법화된 폭력이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현실적으로는 비 전투 분야에서 살생의 도구가 아닌 비폭력을 실천하면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가 실시돼야 한다고 주
나는 어려서 어른들께 아침이슬은 좋은 약이 되지만 저녁이슬은 잘못 쓰면 큰일난다고 들었다. 저녁이슬은 식물이 낮동안에 땅으로부터 빨아들인 수분을 햇볕을 받아 발산하면서 만들어 진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빨아 올린 수분을 발산하지 못하고 밖으로 내보내 맺혀있는 것으로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기운이 있다. 새벽이슬은 풀잎에 맺혀있는 수분을 전부 흘려 보내고 위에서 내려온 수분이 응결하여 만들어 지는 것으로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기운이 있다. 이러한 이치로 태동환자에게 새벽이슬을 먹이면 통증도 조용히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이슬, 그러니까 상승기운을 품고 있는 이슬을 태동환자에게 먹였을 때 그 상승 기운 때문에 임산부가 즉사한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서 때를 기다리는 지혜,
‘기복 신앙은 불교의 범주에 든다, 안 든다.’라는 논의가 새해 들면서 시작해 계속됨에 따라, 우매한 필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처음엔 일회성으로 그치려나 했는데, 교계 내에서 교계 밖으로 그 논의가 확대되어 가는 양상을 띠며 자못 어르신들이 뜻하는 본질이 오도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낳게 하고 있다. 이 논의는 ‘기복 없는 종교가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할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와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는 법계 현상(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한 범부 대중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법인가’ 하는 문제부터 성찰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다. 우선 기복 없는 종교가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할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의 문제이다. 깨달음의 경지, 아라한의 경지에선 복을
대승, 사상적 공헌 크지만 불교 왜곡-타락도 시켜 역사적 부처님 내세워 불설 가탁한 것은 부정직 본지 3월 13일자(647호) 5면에 게재됐던 김용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의 특별기고문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란 주장에 대해 「불교평론」 홍사성 주간이 이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다. 이를 전문 게재하며 반론이나 이견이 있을 경우 다음 호에 게재한다. (편집자) 김용표 교수의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는 글은 대체로 세 가지 주장을 핵심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첫째,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한데 초기불교에서만 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문제다. 둘째 대승불교는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승경전을 비불설이라고 하는 것은 옳
'초기-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⑦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로 초기불교를 전공하는 전재성 박사가 최근 본지에서 열띤 논쟁이 오고가고 있는 ‘초기-대승불교 정체성 논쟁’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보내왔다. 이와 관련해 반론이나 의견이 있으면 다음 호에 게재한다.(편집자)대승불교와 남방불교의 논쟁에 대한 시시비비의 문제는 애초부터 질문의 화살을 잘못 던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역사적인 붓다의 불교 정신과 그 아비달마적 해석을 둘러싼 정신적 괴리가 불교형이상학의 발전을 가져오면서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괴리보다는 대승불교내에서의 각 종파적 시대적 교리의 괴리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소승불교의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교리와 대승불교의 유식불교와의 차
외양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바퀴가 튼튼하지 않은 수레는 쓸모가 없다. 수레의 생명은 바퀴이다. 수레는 바퀴에 의해 움직이면서 수레로서의 기능을 발휘한다. 바퀴가 부실하거나 망가지면 수레는 마침내 폐기되어 그 이름마저 잃고 만다. 그러므로 수레를 오래도록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바퀴를 잘 보존해야 한다. 수레를 지탱하는 바퀴는 바퀴통과 바퀴살과 바퀴테로 이루어져 있다. 바퀴테는 지면과 마찰하면서 굴곡이나 돌멩이와 같은 장애들을 감당하여 해소해 준다. 바퀴살은 이 바퀴테의 부담을 분산시키면서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탱해 준다. 이 바퀴살의 지탱력을 모아서 굴대에 전달하는 바퀴통은 바퀴가 원활하게 구를 수 있게 한다. 바퀴를 잘 보존한다는 것은 바퀴통과 바퀴살과 바퀴테를 항상 세
얼마전 법보신문에서 진행된 대승불교 정체성과 기복불교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면 과연 논자들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나아가 가장 기본적인 '불교'는 무엇이라고 보고 이 같은 주장을 펴는지가 대단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사실을 탐구하는 학자라면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연구대상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불교=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완전등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시대와 역사적 배경에 따라서 개개인의 불교인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구학자들은 문헌위주의 연구를 탈피해 고고학, 금석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 활용하고 있다. 그 결과로서 '초기불교??대승불교??밀교'라고 하는 도식적 직선적인 이해방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