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와 그리스철학에서 우리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네 가지 물질이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작용까지 포함하여, 밀교계통에서는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6가지로 나타내어 물질적 존재인 오대(五大)와 물질적 대상에 대하여 인식 작용을 하는 심법(心法)인 식(識)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점들을 현대식으로 풀어보면, 인간은 몸, 인식능력 및 정신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셋은 상호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고 순환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이 있기에 인식작용을 하고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역으로는 한 생각을 일으켜 기억이 떠오르고 몸을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방향의 심신작용은 동양학에서는 원형의 순환궤도로 표현되고 있으며, 오행(五行
뇌과학 “마음은 의식과 동일한 뇌 작용”동양의학 “경락으로 몸-마음 상호 영향 모든 종교는 그것이 유일신교이든 다신교이든 간에 인간의 마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설을 가지고 있다. 유일신교의 경우에 인간의 마음은 오로지 신을 향해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만, 근자에는 니체 같은 서양철학가의 반론에 의해 한풀 꺾인 상황이 되었다. 동아시아 종교로 통칭되는 유불도의 경우에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며 전개되어 왔다. 예를 들어 원시유가의 경우에는 상제(上帝)를 인정하고 있지만, 후일 성리학에 들어오면 이기설(理氣說)로 바뀐다. 도교의 경우도 도가와 도교로 나누어 보면 그 궁극적 대상이 차이가 나고 있다. 단지 불교만이 시종일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붓다의 교설에서 나타나듯이, 스스로 진리를 구현할
‘마음=뇌’ 주류속 동양사상 관심 집중 유식은 현대인지과학의 불교식 버전 최근에 학제간 연구로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라 불리는 인간의 마음과 앎의 과정을 연구하는 분야일 것이다. 인지과학의 태동을 보면 과거 2차대전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미영연합국의 시도에서 비롯되었고, 연후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급속도로 인지과학분야가 발전되어 왔다. 그 후 불과 60년 정도의 세월 안에 그간 컴퓨터와 관련된 과학발전의 역사는 참으로 엄청나다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IT(정보과학), BT(생명과학), NT(나노과학)와 함께 CT(인지과학)를 4대 핵심융합기술로 선정하여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인지과학을 활용한 응용기술이 이미 알게 모르게
불교는 흔히 서양에서 ‘마음의 과학’이라 일컬어진다. 물론 서양에서도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이 오래되었지만, 마음을 벗어나는 세계까지 다루는 불교와는 어느 정도 괴리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와 동양사상이 19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에 전래된 이래 서구심리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양 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켄 윌버(Ken Wilber)의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 혹은 ‘초개인심리학’이라 할 것이다. 이는 용어표현 그대로 ‘나’와 ‘나를 벗어난 세계’까지 총체적인 의식체계를 전일주의(全一主義, Holistic)의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이론 중에 현대인의 이해에 쉽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세 개의 눈’ 혹은 ‘세
易은 우주 존재-운동원리 표상 화엄법계는 주역의 세계와 일치 주역(周易)에 대한 연구는 그야말로 동양학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천 년간 동양에서의 학문적 연구 및 실천수행 측면의 정점은 바로 주역의 해석에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역이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기록된 경전으로서만 그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된 사상 때문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우주의 이치를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즉 역(易)이란 우주의 존재원리와 운동 원리를 표상하는 것이자, 현대식으로 말하면 복잡계의 다른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역학에서 태극 음양 사상 팔괘 64괘로 표현되는 기호학으로서 세상의 보이는 질서와 보이지 않는 질서를 총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마치 현
근자에 들어와 복잡계란 용어가 심심치 않게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각 학문분야에서도 복잡계란 말을 붙인 신조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 학제 간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서, 가히 복잡계란 용어는 신지식인의 대명사처럼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와 철학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종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복잡계란 용어의 사용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서구 과학계에서는 일대 혁명이 일어나, 그동안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서 확립된 기계론과 분해 위주로 치닫던 환원론 등의 전통적인 단순성과학(science of simplicity)에서 전일론(全一論)적인 복잡성과학(science of complexity)으로
과학 발전사는 신해행증의 다른 표현신과학은 과학-종교 절충한 퓨전과학 현대는 과학문명의 시대라고 하지만, 기실 무엇이 과학적인지 명확하게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을 인간이 이성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본다면, 과학은 다름 아닌 나와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가설이라 할 것이다. 즉 과학이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3승의 방편론이자, 보이지 않는 실상을 알기 위한 일종의 사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의 발전상에는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나타나 있고, 동시에 변화하고 있는 생각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을 방편이자 가설이라고 정리해보면, 결국 이고득락(離苦得樂)하려는 생각의 흐름인 것이다. 우리가 과학은 서양에서 전래되었다는 편견을 벗어던지면, 동양과학과 서양과학으
역대 불교는 무한 경쟁 체제서 우위과학문명 속 현대적 교상판석 절실 저간의 불교관련 출간물을 보면 불교학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결실로 인하여 마치 인간이 생명의 비밀을 거의 장악한 듯 한 오만함도 엿보인다. 그런 배경 하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등이 모두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에 유전학, 진화학 및 뇌과학을 기반으로 재해석하고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불교도 인간학의 범주임에 생명과학으로 재해석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지만, 과연 그런지는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할 수 없으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