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무릎까지 서서히 차오르더니 턱밑까지는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그리고는 속도가 뚝 떨어지기는 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외딴섬 한 모퉁이에 있는 절벽이었다. 굴러 떨어지다시피 어떻게 내려오기는 했는데 옆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고 기어오르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오묘한 절벽공간에 갇혀있었다.시간은 물처럼 빨리 흐르고얼마나 살지는 아무도 몰라몸은 반드시 마침이 있으니헛된 밤낮 말고 일생 닦아야그래 이렇게 한생을 마감하는 것도 뭐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바닷물이 깨끗하게 씻어주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경전 사구게 수지독송 하면좋은 인연 맺는 것과 같아냉철한 전문가 세계에서는반야의 지혜와 슬기 필요해寶滿三千界 (보만삼천계)齋持作福田 (재지작복전)唯成有漏業 (유성유루업)終不離人天 (종불리인천)持經取四句 (지경취사구)與聖作良緣 (여성작양연)欲入無爲海 (욕입무위해)須乘般若船 (수승반야선)보석을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우고 / 그것을 가져다가 복전이 된다해도 / 유루의 업이 될 뿐이니 / 끝내 인간과 천상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네 / 경전의 사구게 만이라도 취해서 수지하면 / 성인의 경지에 좋은 인연을 맺는 것이라 /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고
메아리이야기가 금강경에 많이 나온다. 메아리는 산골짜기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강의할 때 듣는 사람들의 반응도 메아리이고 운동선수가 묘기에 가까운 솜씨로 골을 성공시키거나 헛발질 했을 때 나오는 관중의 반응도 메아리이다. 메아리없는 강의나 메아리없는 운동경기는 생각만해도 팍팍해지는 느낌이 든다.실체 있고 없음은 자성 없으니메아리같은 생각 집착 말아야인생은 드라마틱한 영화 같아실감나고 씩씩하게 진행시켜야골짜기가 메아리를 울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메아리는 사실 실체가 없다. 그런데 그 실체없는 메아리가 거꾸로 사람을 잡기도 한다
당나라의 대학자 한퇴지 선생은 천리마에 대한 글을 썼다. 세상에 천리마는 항상 있는데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백락을 만나지 못한 천리마는 마굿간에서 그저 그럭저럭 지내다가 죽게 된다. 또 천리마는 엄청난 양의 영양분을 섭취해야 천리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영양섭취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 평범한 말보다도 비리비리하게 된다. 한퇴지는 “진실로 말이 없는 것인가,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장탄식을 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천리마는 항상 존재하지만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냐모든 분야 상생할 수 없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관세음보살이 어떤 모습으로 사바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는가 하는 내용이 있다.세간의 온갖 소리 속에관세음보살 음성 있어자신이 듣고 못 들음은얼마나 열려있나에 달려사람사람에게 각각 알맞은 모습을 나타내서 설법을 하는데 부처님의 모습을 나타내서 제도해야하는 중생에게는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을 하고 소년이나 소녀의 모습을 나타내서 제도해야하는 중생에게는 소년이나 소녀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을 한다.지하철에서 구석자리에 앉았다가 옆자리가 비면서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가 들어오시길래 한칸 옆으
금강경 강의시간에 강의를 듣고 계신 한 법사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약간 각색해서 요약하면 이렇다.은산철벽 뚫어야 할 화두가공양 목탁소리에 무너지기도밥 구하는 창자의 심정으로법 구해야 하는건 아닌지동자스님들이 불단에 올려진 떡이 먹고 싶어졌다.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허락을 받지 않고 먹으면 불벼락이 떨어진다. 한 동자스님이 꾀를 내었다. 떡고물 가루를 부처님 입에 살짝 발랐다. 그리고는 떡을 얼마간 덜어내서 동자스님들은 맛있게 먹었다. 주지스님이 돌아와 누가 떡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동자스님들은 우리는 먹지 않았다고
금강경야부송(金剛經冶父頌)을 쓴 야부 스님은 중국 송나라 때의 스님이다. 당나라의 뒤를 이은 시대이다. ‘야보’로 읽는견해도 있지만 관용발음을 존중해서 야부 스님으로 부르기도 한다.모든 법 공하단 금강경 가르침집착이 공함 일깨우는데 있어세상 부질없다는 뜻도 있지만내면의 색안경 부질없단 의미도중급 관리로 있었는데 참선에 몰두하느라고 맡은 바 업무를 태만하게 하는 바람에 곤장을 맞게 되었다. 치는 사람이 잘 쳤는지 맞는 사람이 잘 맞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분은 곤장을 맞다가 온몸의 전생수행세포가 확하고 깨어나 버렸다. 그리고는 관리직
11월을 눈동자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쓸쓸한 표정을 지을 일도 없고 쓸쓸한 표정을 구경할 일도 없지만 쓸쓸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르는 시점이다. 우리말 자체의 의미를 연구하는 분을 만나게 되면 쓸쓸함의 의미를 한번 진지하게 질문드려야겠다.가을 쓸쓸함 망상 불과하지만사색이 깊어지는 쏠쏠함 있어길 잃고나서야 고개 들어보니잃어도 베풀 수 있는 가을 속“앉고 일어서는 것은 돼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후배가 전화기를 통해 보내준 말이다. 앉고 일어서는 일을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복감을 아는
“Were all living beings free from the sickness I also would not be sick, because the sickness of Boddhisattva arises from great compassion. 모든 중생들이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나도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병은 대자비심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난·고통은 이곳에 있고희망·행복도 여기서 시작문제의 핵심은 바로 사람스스로 일어나 걸어야 해대학시절 유마경 영역본을 읽다가 가슴에 휘몰아쳐왔던 구절이다. 문
가을이라는 운동장의 한 가운데를 향해 시간도 공간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야기이다. 중동지방에 무슨 단풍이 있겠는가. 내가 들어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릇 속에서 그 그릇의 모양을 이리저리 쓰고 그리고 두드리고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니 때로는 그릇을 확 분해해버리고 싶은 생각도 슬며시 꾸물거릴 때가 없지 않다.율곡 이이 선생이 8세 때 임진강 화석정서 지은 시단풍잎 가득한 정취 물씬‘단이부단’의 경지 표출분해한들 별 수 없다는 사실이 도사리고 있으니 목을 부풀린 코브라의 목치듯 확 쳐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저
시골 마을 운동회에서 모든 사람이 집중해서 보는 경기는 운동회 끝무렵 저녁 어스름에 벌어지는 이어달리기이다. 다른 경기는 한눈도 팔고 어디 다녀오기도 하면서 보다가 여러 선수가 이어달릴 때는 화장실이 간절하게 불러도 어지간하면 꾹 참고 보게 된다.이어달리기의 특징은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선수들의 등수가 경기가 끝났을 때의 등수와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선수까지 꼴등으로 달리다가 마지막에 달리는 선수가 몇십미터 앞서있는 선수까지 추월하면서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갈 때 추월하는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은 하늘 끝
제법 오래된 이야기이다. 어느 큰스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고향 마을 근처를 지나시다가 우연히 택시를 타게 되었다. 택시 기사분이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벌이 꽃에만 날아간다고그를 탓할 수는 없는 법대상을 알아보는 안목을모두가 갖추기엔 무리수“스님 제가 어느 큰스님을 잘 압니다. 스님께서도 그 큰스님을 혹시 뵌 적이 있으신지요.” 그 택시 기사분이 잘 안다는 큰스님이 자신의 택시에 탔는데 그 큰스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당사자 큰스님에게 질문을 한 것이다.혹 관세음보살님이 택시기사로 현신하여 그 큰스님에게 자신의 본래면목을 만난적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