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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원효 스님의 목소리와 사하라 사막 [끝]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무릎까지 서서히 차오르더니 턱밑까지는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그리고는 속도가 뚝 떨어지기는 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외딴섬 한 모퉁이에 있는 절벽이었다. 굴러 떨어지다시피 어떻게 내려오기는 했는데 옆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고 기어오르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오묘한 절벽공간에 갇혀있었다.

시간은 물처럼 빨리 흐르고
얼마나 살지는 아무도 몰라
몸은 반드시 마침이 있으니
헛된 밤낮 말고 일생 닦아야

그래 이렇게 한생을 마감하는 것도 뭐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바닷물이 깨끗하게 씻어주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살토막이나 그런 것들도 바닷물고기들이 적당히 알아서 소화해주겠지.

콧구멍에서 3mm쯤 떨어진 곳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아직 숨쉬는데는 크게 지장이 없다. 오묘한 편안함과 평온함이 온 몸을 휩싸고 감돈다. 그리 차갑지도 않다. 눈앞에는 너르고 너른 바다만 펼쳐져있다. 이렇게 죽는다니하는 억울한 마음이나 아쉬움도 별로 없다. 머릿속이 점점 텅 비어가는 느낌이다. 오랫동안 과거형으로 아팠던 어깨부분의 뼈마디 깊숙한 곳의 골수세포 몇알이 ‘나 아직은 조금아파요’하고 말하는 것 빼고는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콧구멍의 높이를 지나서 윗눈썹까지 물이 차올랐다. 어라, 그런데 호흡에 지장이 없다. 이게 무슨 조화속인가 속으로 제법 궁금한 생각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갑자기 등에 붙어있던 절벽이 툭툭 소리를 내며 뜯어져나가더니 말소리가 들려온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장임사체험연극 1막이 끝났습니다. 연기를 리얼하게 잘 하시네요.”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꿈이었다. ‘에이, 깨지말고 좀더 연극에 참여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절벽 바닥이며 등쪽의 바위도 그리 딱딱하지는 않았었다. 연극대본이 이왕이면 숨넘어가는 것까지 써놓을 일이지 거기서 왜 멈추었단 말인가.

문득 발심수행장의 끝부분을 읽어주는 원효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時時移移 速經日夜 시시이이 속경일야
日日移移 速經月晦 일일이이 소경월회
月月移移 忽來年至 월월이이 홀래년지
年年移移 暫到死門 년년이이 잠도사문
破車不行 老人不修 파거불행 노인불수
臥生懈怠 坐起亂識 와생해태 좌기난식
幾生不修 虛過日夜 기생불수 허과일야
幾活空身 一生不修 기활공신 일생불수
身必有終 後身何乎 신필유종 후신하호
莫速急乎 莫速急乎 막속급호 막속급호

한시간 두시간 흐르고 흘러서 신속하게 하룻밤이 지나가버리며 / 하루이틀 흐르고 흘러서 재빠르게 한달의 그믐날이 지나가버리며 / 한달 두달 흐르고 흘러서 홀연이 내년이 다가오며 / 한해 두해 흐르고 흘러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당도하게 되나니 / 부서진 수레는 굴러갈 수 없고 수행않고 늙어버린 몸은 제대로 닦을 수 없다네 / 누워서 게으름만 피우고 일어나 앉아도 어지러운 생각만 일으킬 뿐 / 그 몇생을 닦지 않았거늘 헛되이 하룻밤을 그냥 보낼 수 있겠으며 / 부질없는 몸뚱아리 얼마나 살리려고 일생을 수행하지 않을쏘냐 / 몸은 반드시 마침종 치는 날이 있으리니 / 뒤에 받는 과보의 몸 어찌해 볼 것인가 / 속히 급히 해야되지 않겠으며 속히 급히 해야 되지 않겠는가.

발심수행장을 읽노라면 글자 하나하나에 원효 스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때로는 나지막하게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애절하게 들려온다. 어떤 때는 소리없는 소리로 들려오기도 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하는 수행은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이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하는 수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니라.”

그동안 찐 모래를 모으면 사하라사막보다 더 큰 사막이 되고도 남으리라.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축원 올리면서 ‘시향만리’ 연재를 마친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75호 / 2014년 1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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