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중생희견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신통력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그리고는 곧 여러 가지 전단, 훈륙, 도루바의 향과 필력가, 침수, 교향들을 먹고, 1200년 동안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 앞에서 하늘 보배 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서원으로써 1200년에 걸쳐 스스로 몸을 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느니라.”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법화경’에서 약왕보살 전신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사람 목숨은 고래심줄처럼 질긴 듯싶지만 동시에 허망할 정도로 가볍다. 우리 피부는 날카로운 쇠붙이 앞에 잘려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고, 뱃속은 독성 강한 이물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출가자 실천규범인 율장에서 무기를 지닌 이와 함께 가거나 그에게 법을 설하는 것조차 금지한 것은 무기의 위험성과 불교의 비폭력 정신을 잘 보여준다.옛 스님들 일대기를 다룬 역사서에는 전법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스님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에 ‘오랑캐의 것’이라는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에 무수한 시련이 있었고,
2600여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히말라야산맥과 타클라마칸·고비사막을 건너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불살생 차원을 넘어 동물들을 적극 보호하고 이들을 살리려는 방생으로 나아갔다. 고승들의 출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신라 자장 스님은 사냥으로 잡은 꿩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었고, 7세기 혜통 스님은 자신이 잡아먹은 수달이 뼈가 되어서도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고 출가했다. 통일신라 율사 진표 스님도 사냥하던 중 버드나무에 꿰어놓았던 개구리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다고 피해가지 않는다. 죽음은 그래서 평등하다. 하지만 죽은 뒤에 그 시신이 어떻게 다뤄지냐는 지위와 권력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거대하면서도 은밀한 무덤을 만들어 자신들의 시신 훼손을 막고자 했다. 사후에 현세의 삶이 재현된다는 믿음으로 온갖 귀중품은 물론 시중들 사람들까지 함께 묻도록 했다.반면 불교의 죽음은 극히 소박하다. ‘옷 세벌에 발우 하나(三衣一鉢)’면 충분하다는 출가자들은 죽어서도 별다른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일부 고승의 경우 화장한 뒤
흔히 무병장수는 최고의 복 중 하나로 여겨진다. 불자들도 절에 가서 병 없이 오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자주한다. 불보살의 가피가 아니더라도 불교를 믿고 잘 실천하면 건강하게 장수할 가능성이 크다. 분노와 탐욕을 다스리면 스트레스가 적을뿐더러 욕심내지 않고 적당량을 먹기에 각종 성인병과 암에 걸릴 확률도 낮아진다. 게다가 운동 효과가 큰 108배까지 꾸준히 하면 금상첨화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스님들이 장수했던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산 수덕사 초대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 101세, 칠보사 조실이었던 석주 스님이 94세까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속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악업으로 간주한다.2600년 전 인도사회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쳐 복을 얻으려는 제사문화가 만연했다. 희생되는 동물의 수도 적게는 한두 마리에서 많게는 수백수천 마리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이러한 희생제의로 복을 받기는커녕 다른 생명을 무참히 죽인 무거운 과보를 피해갈 수 없다고 비판했다.불교의 생명관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자타카(본생담)’이다. 여기에
불교는 1700년 동안 온갖 부침을 거듭하며 한국인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호불 군주의 지지 속에 불교는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했고, 혹독한 억불의 회오리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때도 있었다. 불교가 숭상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돋보이지만, 불교가 탄압받는 암울한 시대에는 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빛을 발한다. 한국불교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에 힘입어 한국불교는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이 땅에 처음 불교인의 피가 흩뿌려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왕들의 주도로 각각 372년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수승한 진리라도 그것을 널리 펴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그 일이 순탄할 수 있지만 때로는 목숨까지 내놔야 한다. 진리의 전파가 순교와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순교는 진리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가장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인 셈이다.불교는 정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를 찬탄해왔다. 2600여년 전 인도 변방에서 시작된 불교가 한국에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이들의 순교가
계율은 불교의 정체성이며 승가공동체를 지탱케 하는 근간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이가 계율에 의지해 진리의 길로 나아갔고 깨달음을 이뤘다. “내 차라리 계를 지니고 하루를 살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어기며 백년을 살기 원치 않는다”던 신라 자장율사처럼 계율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난이나 죽음까지 기꺼이 감수했다. 역사서에는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계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자 했던 스님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중국 동진 때 고승인 여산혜원 스님(廬山慧遠, 334~416)은 승속의 제자들과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한 중국 정토종의
유교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죽음은 철저히 가려지고 외면됐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 焉知死)’는 공자의 말처럼 모든 사고의 주파수는 죽음이 아닌 삶에, 내세가 아닌 현세에 맞춰졌다. 반면 죽음은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넷 사(四)’까지 꺼려했으며, 건물의 4층을 ‘F층’으로 표시하기도 했다.죽음에 관한 견해는 현대에 이르러 크게 바뀌었다. 죽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재발견으로 이어진다는 게 오늘날 학계의 통설이다. 1960년대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