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무병장수는 최고의 복 중 하나로 여겨진다. 불자들도 절에 가서 병 없이 오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자주한다. 불보살의 가피가 아니더라도 불교를 믿고 잘 실천하면 건강하게 장수할 가능성이 크다. 분노와 탐욕을 다스리면 스트레스가 적을뿐더러 욕심내지 않고 적당량을 먹기에 각종 성인병과 암에 걸릴 확률도 낮아진다. 게다가 운동 효과가 큰 108배까지 꾸준히 하면 금상첨화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스님들이 장수했던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산 수덕사 초대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 101세, 칠보사 조실이었던 석주 스님이 94세까지 생존했던 것을 비롯해 중국의 조주선사와 허운 스님도 120세까지 살았다. 6세기 문헌인 ‘고승전’에는 160세까지 살았던 승요(僧要) 스님도 소개돼 있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다고 꼭 무병장수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운의 죽음을 맞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유학자들이 불교를 공격하는 주된 논거로 삼은 것 중 하나도 불교를 숭상했던 몇몇 황제들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당나라 문장가 한유(768~824)는 ‘논불골표(論佛骨表)’에서 “불교를 섬겨 복을 구하였으나 오히려 다시 화를 입게 된다”고 비판했으며, 여말선초 정치가 정도전(1342~1398)도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부처 섬기기를 공경히 할수록 생명은 더욱 단축된다. 부처를 섬기면 화를 입는다”는 ‘사불득화(事佛得禍)’를 주장했다.
불교 억압을 부르짖는 이들 유학자가 ‘사불득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것이 양나라 무제(梁武帝, 464~549)다. ‘보살황제’ ‘불심천자’라고 불렸던 그는 동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숭불 황제로 꼽힌다.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수백 권의 경전을 직접 풀이해 배포함으로써 불교의 기반을 다졌다. 출가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동아시아불교 전통도 그의 ‘단주육문(斷酒肉文)’에서 비롯됐으며, 그 스스로도 음욕을 삼가고 평생 하루 한 끼 식사를 했다. 또한 무차별 살생을 금지시켰으며, 불교 비판 세력들에 맞서 불교의 이론 체계를 강화했다. 백제 법왕과 신라 법흥왕을 비롯한 많은 숭불 임금들이 양무제를 본받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양무제의 마지막은 불운했다. ‘금강경’을 오늘날처럼 32장으로 분류하고 제목을 붙이는 등 희대의 천재였던 큰아들 소명태자가 31살에 세상을 떠났으며, 양무제 자신도 후경(侯景)이라는 부하의 반란으로 유폐돼 굶주림으로 죽음을 맞았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양무제의 죽음은 대단히 비극적이다. 그렇다고 한유나 정도전 등의 주장처럼 부처님을 섬겼기에 불행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춘추시대 온 나라를 주유했음에도 제왕들의 외면을 받았던 공자의 삶도 세간의 성공에서 벗어나 있으며, 유학을 신봉했지만 암살당하거나 역모로 불우한 삶을 마쳐야 했던 황제들도 수두룩하다. 한유와 정도전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몇몇 특정 사건들을 마치 전체인양 주장한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며 역사 왜곡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유교를 신봉하면 화를 입는다’는 ‘사유득화(事儒得禍)’의 사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거나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불교를 통해 생사의 이치를 체득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면 보다 평안한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만년에 궁궐 내에 불당을 짓고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불경언해서인 ‘석보상절’을 편찬하는 등 호불 군주의 면모를 보였던 세종이 한유와 정도전의 불교비판 내용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세종은 불교를 믿는다고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한·당 이래 역대 임금들이 부처를 섬기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나도 섬긴다”고 당당히 밝혔다. 아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을 잃고 지극히 사랑하던 소헌왕후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세종의 깊은 절망을 불교에서 위로받지 못했다면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 등 만년의 업적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유와 정도전의 주장이 타당하지는 않지만 불교를 믿었는데 왜 저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느냐는 의구심은 여전히 남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부처님이 교화를 펼치던 2600여년 전 사람들도 비슷했다. 초기경전에는 불자들의 신심을 떨어뜨릴 수 있는 2가지의 충격적인 사망 사건이 기록돼 있다. ‘맛지마니카야’의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에 나오는 푹쿠사티(Pukkusati) 죽음과 ‘우다나’의 ‘나병환자 숩파붓다의 경’에 기록된 숩파붓다(Suppabuddha)의 죽음이 그것이다.
먼저 푹쿠사티는 탁카실라의 왕이었다. 이웃나라인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친교를 맺은 그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아갔다. 어느 날 빔비사라 왕이 친교의 징표로 푹쿠사티 왕에게 보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겨진 황금접시였다. 푹쿠사티는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출가를 결심했다. 왕위를 내려놓은 그는 정식 구족계를 받지 않았지만 자신의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채 궁전을 떠났다. 푹쿠사티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마다가국 수도 라자가하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누군가 푹구사티에게 부처님은 이곳에서 1000km 떨어진 사밧티에 계시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당장 갈 곳이 없던 푹구사티는 옹기장이의 작업장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됐다. 때마침 홀로 유행하던 부처님이 옹기장이의 작업장을 찾았다. 부처님은 아직 라자가하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님은 먼저 와 있던 푹쿠사티에게 하룻밤 같이 머물러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부처님인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푹쿠사티는 흔쾌히 승낙했다. 부처님과 푹쿠사티는 각자 자리에 앉아 명상에 들었다. 새벽녘, 부처님은 작업장 한쪽에 밤새도록 가부좌를 틀고 있는 푹쿠사티를 바라보며 그를 위해 법을 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후 괴로움의 원인과 과정,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자상히 들려주었다.
설법이 끝나갈 무렵 푹쿠사티는 자기 앞에 있는 분이 그토록 뵙기 원했던 부처님임을 직감했다. 환희에 겨운 그는 부처님께 구족계를 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말했다. 부처님은 흔쾌히 승낙하며 발우와 가사가 있어야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푹쿠사티는 얼른 구해오겠다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발우를 구하려 마을을 돌아다니던 푹쿠사티가 황소에게 들이받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
‘우다나’에 등장하는 숩파붓다(Suppabuddha)도 비슷한 경우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벨루 숲에서 대중에게 법문할 때였다. 가난한 한센병(나병) 환자 숩파붓다는 행여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법회장소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먹을거리가 없다는 것을 안 그는 이왕 온 김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많은 대중 가운데 숩파붓다가 있음을 보았고, 그가 진리를 깨우칠 단계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부처님은 숩파붓다를 위해 보시, 계행, 감각적 쾌락의 위험, 괴로움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숩파붓다는 점점 법문에 몰입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 순간 숩파붓다를 괴롭히던 온갖 절망과 분노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모든 의혹도 해소됐다. 마침내 진리의 눈을 뜬 것이다.
경전에는 이를 지켜보던 제석천이 숩파붓다를 시험하는 장면도 나온다. 호법신인 제석천은 공중에서 말했다. “숩파붓다여, 그대는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자이다. 그대가 나에게 부처님도 없고, 가르침도 없고, 승단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무한한 재산을 주겠노라.”
그러자 숩파붓다가 대답했다. “어리석고 눈 먼이여, 나는 가난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지극한 행복에 도달했으며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재산, 계행의 재산, 부끄러움을 아는 재산, 배움의 재산, 보시의 재산, 지혜의 재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고는 숩파붓다가 부처님께 나아가 경배와 찬탄을 했다.
“존자 고타마여, 훌륭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타마께서는 이 같이 여러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타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며 그 수행자들의 참 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타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숩파붓다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부처님의 말씀에 고무돼 기뻐하던 숩파붓다가 그 자리를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송아지를 데리고 있는 암소에 들이받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푹쿠사티와 숩파붓다의 운명과 미래에 대해 물었다. 푹쿠사티와 숩파붓다가 부처님 법문을 듣지 않았더라면,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더라면 살았을 텐데, 오히려 발심해서 죽은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깔려있었다. 이때 부처님을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현명한 자로서 법에 따라 법답게 실천하고 법을 이해했다. 중생을 욕계에 결박해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다섯 가지 번뇌(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탐욕, 성냄)를 부수었으므로 천상세계에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은 그 자체로 고통도 슬픔도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사윤회의 과정일 뿐이다. 다만 무명과 탐욕에 휩싸여 죽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요, 깨침과 공덕을 쌓고 생을 마치면 축하할 일이다. 그렇기에 깊은 안목으로 보면 호화로운 죽음이 비극일 수 있고, 불행해 보이는 죽음도 비극이 아닐 수 있다.
불법홍포를 위해 헌신했던 양무제가 굶주려 죽은 것이나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환희에 겨워하던 푹쿠사티와 숩파붓다가 소에 받혀 죽은 것, 또한 국내외 불교성지를 순례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우리 중생의 안목으로는 여전히 비통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꼭 불행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일이다. 더없이 비극적인 죽음처럼 보이는 푹쿠사티와 숩파붓다 같은 이들도 천상에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던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어보자. 두려워할 것은 죽음의 형태가 아니다. 얼마나 번뇌와 업장을 씻어내고 삶을 마무리하느냐이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84호 / 2021년 5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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