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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교 - 하

순교자 피와 눈물 없었다면 1700년 한국불교는 없었다

정방·멸구자·이차돈·나옹·행호·설준·지안 등 수많은 스님 순교
조선시대 대중들이 존경만 해도 온갖 음해로 고문·살해 자행
보우 스님, 죽음 예상하고도 불교중흥 앞장서다 제주서 타살

조선시대에는 유생들에 의해 천년고찰이 불태워지고 불상이 파괴됐으며,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고 양반가 무덤을 조성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됐다. 사진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목 없는 불상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제공
조선시대에는 유생들에 의해 천년고찰이 불태워지고 불상이 파괴됐으며,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고 양반가 무덤을 조성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됐다. 사진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목 없는 불상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제공

불교는 1700년 동안 온갖 부침을 거듭하며 한국인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호불 군주의 지지 속에 불교는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했고, 혹독한 억불의 회오리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때도 있었다. 불교가 숭상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돋보이지만, 불교가 탄압받는 암울한 시대에는 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빛을 발한다. 한국불교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에 힘입어 한국불교는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이 땅에 처음 불교인의 피가 흩뿌려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왕들의 주도로 각각 372년과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신라는 100년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법의 불모지였다. 눌지왕(재위기간, 417~458) 때 아도 스님이 선산 지역에 들어와 법을 펼침으로써 불교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호의적이었던 왕실과 달리 막강한 실권을 쥔 귀족들의 반대가 거셌고, 전법을 위해 신라에 왔던 정방, 멸구자 등 고구려 스님들이 잇따라 순교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이차돈(506~527)이다. 성격이 호방하고 정직해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던 그는 일찍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여전히 국법으로 불교를 믿는 것이 금지되자 이차돈의 한탄과 시름이 깊어져갔다.

법흥왕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백성의 안녕과 국운의 번영을 꾀하고자 했으나 왕권이 너무 약했다. 이에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은 거짓 명을 전한 죄를 내려 자신의 목을 베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한사코 반대하던 왕도 이차돈의 굳건한 결심 앞에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신성시 여기던 천경림에 사찰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자 신하들은 분노했다. 그들이 법흥왕에게 몰려가 거세게 항의하자 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며 국령을 어긴 이차돈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527년 8월5일, 22살의 청년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사형장으로 향했다. 신라 헌덕왕 때 만들어진 ‘이차돈순교비’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이차돈은) 눈물을 뿌리며 북쪽으로 나아갔다. 관리가 그의 모자를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다음 관아의 뜰로 가서 큰 소리로 사형집행을 고했다. 칼로 목을 내리치자 목에서 우윳빛 피가 한 마장이나 솟구쳤다.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크게 흔들렸다. 사람과 만물이 애통해 하고 짐승들은 불안해했다. 길에는 통곡소리가 이어졌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렀다.’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불교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법흥왕은 민심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불교를 공인하고 곳곳에 사찰을 지었다. 만년에는 법흥왕 자신도 출가해 법공이라는 비구로 지내며 불법 홍포에 온힘을 쏟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신라불교 서막을 열었던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찬탄했다. 이차돈의 묘소를 참배한 고려 대각국사 의천 스님도 ‘만약 말세에 법을 행하기 어려운 때를 만나면 나 또한 임을 따라 목숨 바치리’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이차돈의 성스러운 피를 머금고 피어난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정치, 문화, 사상 전반에 꽃을 피웠다. 그러나 국교의 지위를 누렸던 불교가 보리심과 보살도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불교에 대한 대중의 시선도 따가워졌다. 고려말 불교에 극히 비판적이었던 신진사대부들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불교 폐단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불교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명망 있는 고승들을 집요하게 비난하고 트집 잡아 귀향 보내거나 사형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백성들이 생불로 추앙하던 나옹혜근 스님(1320~1376)도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고 회암사를 중창함으로써 불교계를 적극 쇄신하려 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모함으로 밀양으로 향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세종실록’에는 나옹 스님을 귀양 보냈다가 살해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록 기록대로라면 나옹 스님은 유학자들에 의해 희생된 첫 순교자인 셈이다.

1392년 조선 개국과 더불어 숭유억불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불교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폐사하는 사찰이 잇따랐고 천민 취급 받은 스님들은 도성 출입조차 금지됐다. 천태종 마지막 고승 행호 스님도 순교의 길을 걸었다.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스님은 태종과 세종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을 정도로 인품과 수행력이 뛰어났다. 스님은 고려후기 천태종 백련결사 도량이었던 백련사를 중창했고, 천태종 부흥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교탄압의 거센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스님이 흥천사 주지를 맡자 수많은 대중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유림에서 스님을 조직적으로 음해하기 시작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648명이 상소를 올려 행호 스님이 요사스럽고 망령되다며 참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단순히 많은 백성이 흥천사를 찾아 불법을 들었다는 억지스런 이유에서 비롯됐다. 유생들의 거듭된 탄핵 요구에 행호 스님은 1446년 제주도로 귀향을 갔고 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호불 임금인 세조대를 지나 예종과 성종대에 이르면서 불교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불교 명맥 자체를 말살하려는 듯 명망 있는 스님이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려 했다. 월심, 계엄, 지성, 상명, 의철, 학선, 죽변, 해초, 각돈, 학전, 설준 등 수많은 스님들이 불법을 펴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거나 참수됐다. 이 가운데 해초 스님은 교종판사를 거쳐 판교종도대사(判敎宗都大師)를 지낸 고승이며, 각돈 스님은 진관사를 중창하고 1470개의 화엄경판을 완성한 학승이다. 설잠 김시습의 스승이었던 설준 스님도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변방으로 끌려가 참사를 당했다.

불교의 명운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성종은 신분증명서인 도첩이 없는 스님들을 강제 환속시켜 군대에 편입시켰다. 연산군은 선교양종의 승과를 폐지하고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와 교종의 본산인 흥덕사를 연회 장소로 이용했다. 중종도 ‘경국대전’에서 승과제도를 아예 없애버림으로써 스님들이 더 이상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불상과 범종은 녹여져 살상 무기로 탈바꿈됐다. 유생들에 의해 천년고찰이 불태워지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거나 양반가의 무덤을 조성하는 일이 자행됐다. 유생들이 절에 놀러와 고기와 술을 요구하고 산행을 할 때면 스님들에게 가마를 메도록 했다. 행여 스님들이 행패를 일삼는 유생들을 관아에 제소하면 오히려 죄를 뒤집어 씌웠으며, 사찰에 불을 지른 유생이 영웅처럼 떠받들어졌다. 바야흐로 법난의 시대였다. 불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불온한 사상이었으며, 스님들은 더 이상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순교한 허응보우 스님과 환성지안 스님의 비·석상을 모신 제주 불사리탑사.
조선시대 제주에서 순교한 허응보우 스님과 환성지안 스님의 비·석상을 모신 제주 불사리탑사.

허응보우 스님(1510~1565)은 불교의 암흑기를 맞아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힌 순교자다. 1551년 6월, 불교중흥을 발원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금강산 선승 보우 스님의 명성을 듣게 됐고, 병환으로 사임한 노승의 후임으로 봉은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보우 스님은 한사코 거절했다. 이미 숱한 스님들이 유생들의 모함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물론 자신도 온갖 음해와 질시에 시달릴 것임을 잘 알았다. 더욱이 병약했던 보우 스님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스님이 당시 심정을 시로 남겼듯 ‘마음 같아서는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나거나 귀를 씻고 못 들은 일’로 되돌리고 싶었다. 사양의 뜻을 거듭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님은 숙연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마저 이 길을 외면하면 불교가 사라질 수 있다는 고뇌가 스님의 무거운 발걸음을 한양으로 향하게 했다.

문정왕후의 뜻을 받아들인 스님은 불교중흥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보현사, 회암사 등 퇴락한 사찰을 중창했으며, 선종과 교종의 승과를 다시 설치해  유능하고 합법적인 승려 배출에 힘썼다. 서산휴정 스님과 사명유정 스님도 이러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물이었다.

유생들의 끊이질 않는 모함과 상소에도 보우 스님은 불교중흥에 헌신했다. 1565년 4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스님의 활동도 곧바로 중단됐다. 예상대로 그해 6월 스님은 제주도로 귀향을 가야했고, 같은 해 10월 제주목사 변협이 힘센 무사 40여명에게 매일 늙은 보우 스님을 때리도록 함으로써 그곳에서 장살로 순교했다.

하지만 보우 스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사찰이 그나마 안정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간경, 참선, 염불이라는 조선후기의 삼문(三門) 수행문화도 정착됐다. 또 서산과 사명 같은 고승이 배출될 수 있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나라를 구하고 불교 명맥도 이어질 수 있었다. “보우 스님은 조선왕조 500년의 불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허나 순교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우 스님에 이어 조선후기 선과 화엄의 대가였던 환성지안 스님(1664~1729)도 법을 지키다 입적했다. 1725년 금산사에서 1400여명이 모이는 화엄대법회를 개최하는 등 설법에 탁월했던 스님은 이를 경계하던 유생들의 모함으로 제주도로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조선불교가 500년이라는 억불의 시기를 거치며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불교인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고 했다. 불교계는 이제라도 순교자 추모일을 제정해 극한의 상황에서 온몸을 던졌던 불교인들을 선양해야 한다. 순교성지도 서둘러 지정해야 한다. 이런 노력들이 선행될 때 전법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될 뿐 아니라 불자들의 발심과 종교적 자부심 고취로도 이어질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언제라도 되풀이된다. 법난은 끝나지 않았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78호 / 2021년 3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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