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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교 - 상

“다음 생에는 내 목숨 빼앗는 저 사람과 서로 선지식이 되기를”

불교사 첫 순교자는 부루나…목건련도 이교도에 의해 순교
백원·법조 형제, 담무참 스님 등 중국불교에도 순교자 다수
불교는 순교자 피 머금고 성장, 순교자 있었기에 불교 존재

2600년 불교역사에서는 수많은 탄압과 시련이 끊이질 않았고, 그때마다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은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에 의해 불법이 전승될 수 있었다. 사진은 1960~70년대 중국 문화혁명 때 불상이 불태워지는 모습.
2600년 불교역사에서는 수많은 탄압과 시련이 끊이질 않았고, 그때마다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은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에 의해 불법이 전승될 수 있었다. 사진은 1960~70년대 중국 문화혁명 때 불상이 불태워지는 모습.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수승한 진리라도 그것을 널리 펴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그 일이 순탄할 수 있지만 때로는 목숨까지 내놔야 한다. 진리의 전파가 순교와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순교는 진리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가장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인 셈이다.

불교는 정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를 찬탄해왔다. 2600여년 전 인도 변방에서 시작된 불교가 한국에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이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교사에 첫 등장하는 순교자는 부루나(Punna)존자다. 설법제일로 명성이 높았던 부루나는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수파라카 지역의 해상무역상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아무런 재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 형제들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상인의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해상무역에 뛰어들었고 타고난 언변과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의 명성은 코살라국의 사왓티까지 퍼졌고, 수파라카에는 그와 해상무역을 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이 무렵 그는 재가불자라는 이들로부터 부처님의 위대함을 전해 듣고는 그분을 찾아뵙기로 했다.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 도착한 부루나는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듣자 환희심이 솟았고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있나 싶었다. 곧바로 출가자의 길을 선택한 그는 부지런히 정진했고, 오래지 않아 제자들 중에서도 두드러졌다. 해상무역을 통해 익혔던 언변술이 빛을 발해 그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해 불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잇달았다.

10대 제자의 반열에 오른 부루나는 고향 수파라카로 돌아가 그곳에서 바른 법을 몰라 고통 받는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부루나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자신의 뜻을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그곳 사람들의 심성이 사납고 흉포해 전법이 어려울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러자 부루나는 욕설과 업신여김은 물론 폭력과 죽음에도 의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내 제자여, 그대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능히 참고 견디는 마음을 배웠구나. 그대는 이제부터 평온함을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해 법을 펼쳐라”라고 당부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부루나는 열정적으로 법을 설했다. 사람들은 그의 설법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부루나는 절을 지어 그들이 불법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껏 도왔다. 불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질수록 시기와 질투하는 세력도 늘어났다. 부루나를 둘러싼 음해와 위협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부루나는 전법의 원력을 꺾지 않고 묵묵히 나아갔다. 그해 부루나는 부처님과 도반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수파라카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불법이 흥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이들에 의해서였다. 법을 위해 막대한 부와 명예, 목숨까지 돌아보지 않았던 위대한 전법사 부루나. 그는 불교사의 첫 순교자였다.

부루나의 뒤를 이은 순교자는 목건련(Moggallana)이었다. 부처님 제자 중 신통제일이라는 목건련은 부유한 바라문 출신이었다. 세속적인 즐거움에 미련이 없었던 그는 죽마고우인 사리불(Sāriputta)과 함께 산자야라는 유명한 수행자를 찾아가 공부했다. 하지만 오랜 정진에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라자가하에서 우연히 앗사지 비구를 만나 부처님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들은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부처님을 찾아갔다. 목건련과 사리불은 부처님의 법문에서 지금껏 찾아 헤매던 영원한 자유와 평안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부처님께 귀의한 그들은 곧 교단의 양대 축이 되었다. 부처님을 대신해 설법하고, 교단 내 문제가 있을 때면 목건련과 사리불이 직접 해결에도 나섰다.

목건련은 신통력이 뛰어났다. 엄지발가락으로 제석천의 궁전을 흔들거나 지옥에서 고통 받는 어머니도 구했다고 전한다. 카리스마에 신통력까지 뛰어났던 목건련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목건련은 초기교단의 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경쟁 관계로 바라보던 이교도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그들은 목건련을 살해하려 했고 그때마다 그는 신통력을 발휘해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건련은 더 이상 신통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석가족 멸망이 과보였듯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업장에서 비롯된 일임을 잘 알았다. 목건련은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온통 찢겨져나가는 구타를 당했다. 죽어가는 그에게 사리불이 왜 신통력으로 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부모님을 몹시 괴롭힌 적이 있다네. 도반이여, 이제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게나.”

목건련의 순교는 부처님 제자들이 법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면 다른 종교단체들이 불교교단의 성장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보여준다. 불교는 목건련과 부루나존자 등의 순교에 힘입어 인도 전역에 확산됐다. 이후에도 인도불교사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특히 7세기 말부터 침략을 본격화한 이슬람의 광기어린 훼불과 무차별 살육에 맞서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는 13세기까지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불법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쳐야 했다.

불교사에서 무수한 훼불의 역사가 있었고 그때마다 사찰과 불상은 파괴의 대상이었다. 사진은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파키스탄 칼리가이 마애불. 주수완 우석대 교수 제공
불교사에서 무수한 훼불의 역사가 있었고 그때마다 사찰과 불상은 파괴의 대상이었다. 사진은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파키스탄 칼리가이 마애불. 주수완 우석대 교수 제공

그들이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불법은 인도를 넘어 각 지역으로 확산됐다. 험준한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1세기를 전후한 시기였다.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에 서역에서 탄생한 불교가 뿌리 내린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삼무일종(三武一宗)’으로 대별되는 불교탄압사에서 알 수 있듯 한번 법난이 시작되면 수만 개의 사찰이 폐허로 변했다. 또 수십만 명의 스님들이 강제로 환속당하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러한 고난의 세월을 견뎌내며 불법의 씨앗은 싹을 틔웠고, 마침내 불교는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과 문화로 우뚝 서게 됐다.

중국 역사서에는 법난의 시대를 맞아 기꺼이 목숨을 바친 고승들의 기록이 많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백원(帛遠)‧법조(法祚) 형제가 그렇다. 형인 백원 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불법을 두루 공부했고, 나중에는 그의 이름이 나라 전체에 알려졌다. 백성들은 온화한 인품과 지혜를 갖춘 스님을 존경하고 스승으로 따랐다. 이때 장보(張輔)라는 인물이 진주자사로 오면서 스님을 환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기를 원했다. 백성의 존경을 받는 인물을 수하에 둠으로써 정치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스님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잘 알았다. 스님이 한사코 거절하자 장보는 악감정을 품게 됐다. 그는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스님을 옥에 가뒀다.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안 스님은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는 부처님 명호를 되뇐 뒤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를 이제 환희로움으로 다 갚고자 합니다. 이것으로 다음 생에는 장보와 함께 선지식이 되어 다시는 죽고 죽이는 살생의 과보를 받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백원 스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장보에 대해 원한이 아닌 다음 세상에 선지식이 되기를 발원한 것이다. 다음날 스님은 모진 채찍질에 목숨을 잃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분노했다. 보살의 화현처럼 존경하던 스님이 장보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모두들 원수를 갚자며 관으로 몰려갔고, 백성의 손에 장보도 목숨을 잃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생 법조 스님도 똑같은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형의 영향으로 25살에 출가한 스님은 불교의 이치를 꿰뚫어 관롱(關隴) 지방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주자사 장광(張光)이 스님을 환속시키려 했고, 스님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들 형제스님의 죽음은 불교가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위대한 진리라는 점과 어떤 권력과 명예에도 좌지우지되지 않는 출가자의 높은 기개를 순교로써 보여주었다.

이슬람 등 이교도에 의해 멸실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강성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의 부처님 모습. 주수완 우석대 교수 제공.
이슬람 등 이교도에 의해 멸실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강성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의 부처님 모습. 주수완 우석대 교수 제공.

중인도 바라문 출신으로 중국에 건너와 불경 번역에 매진하다 순교한 담무참 스님(曇無讖, 385~433)도 비슷한 시기의 고승이다. 6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불문에 들었다. 총명한데다가 구도심까지 갖춘 담무참은 출가자들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졌고, ‘대반열반경’을 접하면서 대승불교에 깊이 매료됐다. 계빈, 구자, 돈황을 거쳐 412년 감숙성 고장(姑臧)에 들어간 담무참은 북량의 왕 저거몽손의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담무참은 그의 지원 아래 ‘대반열반경’ 전분(前分) 10권을 비롯해 ‘대집경’ ‘대방등무상경’ ‘금광명경’ ‘비화경’ ‘우바새계경’ 등을 차례차례 번역했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불교 자체보다는 불교를 이용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다. 저거몽손보다 세력이 훨씬 강했던 북위의 척발도가 담무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모셔가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이 언젠가 자신을 떠나리라 여겼고, 서역에 가서 ‘대반열반경’의 나머지 부분을 구해오겠다는 담무참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저거몽손의 의중을 알아차린 담무참은 서역으로 떠나기 전날 대중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과거에 지은 내 업을 갚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불경번역이라는) 서원을 세웠기에 아무리 목숨이 중하더라도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다음날 길을 나선 담무참은 자신이 예견했듯 저거몽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됐다. 433년, 담무참이 49살 되던 해였다.

불교가 중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불경 번역에 힘입어서였다. 당대 사대부들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 전란에 시달렸던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도 불경에 의해 충족될 수 있었다. 7세기 현장법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 역할은 서역의 스님들이 주로 담당했다. 섭마등, 축법란, 지루가참, 안세고, 구마라집, 진제 등 수많은 스님들이 전법을 위해 이역만리의 길을 걸어 왔다. 이들 스님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불경을 한문으로 옮겼다. 권력자들의 환대를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온갖 강압을 견뎌야했으며, 담무참처럼 순교도 불사해야 했다.

이들 스님에 의해 싹을 틔운 중국불교는 1960~70년대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숱한 법난에 직면했다. 그때마다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은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에 의해 불법은 전승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종교가 그렇듯 불교는 이들 순교자의 피를 머금고 성장해왔으며, 순교자 없이 불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76호 / 2021년 3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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