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문화부에서 내가 맡은 일은 불교중앙박물관 건립 불사로, 종무원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다. 2009년에는 문화부 팀장을 맡게 됐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소임이었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계획해왔던 것들을 추진했다. 앞서 조계종 입사 즈음에 직원들과 문화부 로드맵을 작성했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부를 중심으로, 연구·조사를 담당하는 발굴조사단과 가장 앞서서 사람들과 만나고 홍보하는 박물관, 그리고 문화재 자체에 대한 보존처리를 이행할 불교유산보존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것이었다.불교유산보존센터 예산 확보방재시스템 도입 등에
고등학교 1학년 때 비로소 진짜 부처님을 만났다. 경남 마산의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할머니, 어머니 손을 잡고 절을 드나들긴 했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울산으로 이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친구의 권유로 동축사를 찾았다. 무상과 무아,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종범 스님이 쓴 ‘불교를 알기 쉽게’를 읽으며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내 삶의 방향은 그때 결정됐고, 지금껏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올 수 있는 원동력이
변해가는 종단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매일 108배를 올리면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내 삶 속으로 체화하고자 노력했다. 수차례 3000배에 도전하고, 참선공부도 체계적으로 이어갔다. 참선입문프로그램, 심화과정프로그램을 거쳐 조계사에서 참선대학원 과정으로 운영하던 ‘선림원’ 2년 과정도 수료했다. 고우 스님과 적명 스님 등 큰스님들의 강의를 듣고 봉암사 참선수련도 참가했으며, ‘이뭣고’ 화두를 들며 나를 찾고자 정진하고 있다.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 전 조계사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하고 잠시라도
대학 졸업 후 일하게 된 첫 직장부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언제나 부처님의 그늘에서 살아왔다. 불교는 곧 내 삶의 지표였고 신앙이자 인생의 터전이었다. 종립학교 불교부서 신심 키워대학 시절부턴 불교 활동가로불교와의 인연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시작됐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매월 음력 초삼일에는 빠짐없이 정성스레 떡을 해 초를 켜고 기도를 하셨다. 매 순간 불제자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일상 속 불교를 일깨워줬다. 인연인 듯 종립학교인 동국대 사범대
대학을 졸업해서도 불연은 계속 이어졌다. 대한불교신문사에서 사람을 구했다. 당시 대표가 혜총 스님이다. 6개월 정도 기자생활을 했다. 그러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포교원이 매월 간행하는 ‘법회와 설법’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것이다. 포교연구실서 포교 청사진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들어진 월간지였다. 재가종무원으로 20년째 근무‘금강경’ 제법무아 실천 발원‘법회와 설법’은 매달 설법문안 3가지와 특별법회 진행 매뉴얼, 각종 발원문 등 포교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2010년 ‘웹진 법회와 설법’으로 전환됐고, 이후 ‘개
부처님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이 전환점일지 모른다. 내 인생에서 굳이 꼽자면 그런 전환점이 3번 있었다. 고등학교 불교학생회, 5·3인천사태, 평화리더십아카데미라고 말할 수 있다. 80~90년대 자주화운동 매진아르바이트로 포교원 업무김제에서 태어났지만 전주로 이사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1학년 학기 초, 그러니까 봄이었다. 각 서클에서 신입부원을 모집했는데, 칠판에 ‘불(佛)’자 하나 써 놓은 선배들이 있었다. 종교에 관심 없던 때였다. 좌담회가 있다는 설명에 끌렸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고치고
1993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이하 대불어) 산하 어린이불교교육연구소 직원으로 불교활동가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한 스님의 요청을 받아 대전의 어린이집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도반 이동원 거사와 결혼해 첫 아이를 낳으면서 잠시 활동가의 삶을 접었다. 이후 대불어의 제안으로 사무국장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어린이 포교를 위한 실무자 역할을 지속했다. 찬불동요대회를 만들고, 불교학교를 개최하고,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등 천진불들을 위한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대불어 주요 사업인 전국어린이지도자연수회가 열리
사촌고모가 절을 창건할 정도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심이 깊었다. 모두가 할머니의 영향이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자연스레 부산 남포동 대각사 고등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불교활동을 시작했다. 대각사 어린이법회 맡으며기타 배워 어린이들 지도당시 대각사 법회는 또래들에게 인기였다. 친구들과 만나 노래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하던 선배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내가 어린이법회 지도법사가 된 것은 당시 대각사 어린이법회 지도교사였던 박용하 관장 덕분이었다. 관장님은 나를 볼 때마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를 켜고 사찰명과 입종년월, 서류 위치 등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등록사찰 전산화 작업을 마치니 이번에는 승려명부가 눈에 들어왔다. 종무행정이라는 게 어떤 일인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종무행정 서류들을 전산화하는 작업은 몇 주간 계속됐다. 그 일들이 마무리될 즈음 새로운 업무가 떨어졌다. 관음종 개산조인 태허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법석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불과 4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 결정된 것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봉행한다는 것 뿐이었다.직접 부딪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어머니로 인해 부처님을 알게 됐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자인 아내를 만나, 아내 덕분에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이 주례를 섰고, 홍파 스님의 제안으로 지금 법인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으니 인연의 끈은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던 그 인연이 또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니 어느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는 이유다.봉원사서 뛰놀며 불연 맺어아내 덕분에 홍파스님 주례어린 시절 서울 마포에 살았던 나는 어머니를 좇아 절에 가기를 좋아했다. 너른 절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무렵 조계종은 격변기였다. 1994년 의현 총무원장 체제에서 벗어나 종단운영에 대한 새로운 틀을 마련하던 시기였다.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환경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종단개혁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내가 종무원이 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왠지 숟가락 하나를 슬쩍 얹는 것 같았다. 몇 번을 고사했지만, 집까지 찾아와 함께 일하자는 류지호(불광미디어 대표)의 권유에 총무원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다. 성불회에서 활동하며 훗날 불교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
1981년 봄, 거리에 걸린 연등은 어린 날의 기억을 소환했다. 불심 깊었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포천 왕방산 산길을 따라 보덕사에 올랐던 일, 절에서 또래들과 뛰어 놀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련한 추억을 더듬으며 성균관대 불교학생회(성불회) 방문을 두드렸다. 써클룸은 초파일 준비로 한창이었다. 선배들 틈에 끼여 연등과 장엄물 제작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사찰을 찾아 수련회를 하고 선배들과 경전을 공부하면서 불교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불교학생회 생활에 심취할수록 ‘행정고시를 통해 경제관료가 되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