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행 절로 생활화…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님 당신이 당신 모습 그리라 해 놓고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다시 한번 당신의 그 미소를 보여주세요.’ 사불수행을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나도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미소를 그리리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행이 잘 되지 않을 때 불보살님들께 떼를 써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마음이 관세음보살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게 됐다. 그럴때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삼배를 올리고 다라니를 염송한다. 그리고는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가지런히 앞에 놓는다. 관세음보살의 상호는 참으로 평화롭고 자비로운 미소로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저 멀리까지 빛을 보낸다. 그 관상이 사라지지 않고 안정될 때까지 집중하면서 모든 긴장을 긴 호흡과 함께 풀어 내놓는다. 관세음
Q. “자꾸 염불하라고 하는데, 지금 제가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중에 한가하면 수행하지요. 그리고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왕생 한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말과 같이 가능할까요? 사람의 됨됨이는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염불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이, 막상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이 될 턱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누리고 살던 모든 것을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런 상황이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보다 무서운 때가 어디 또 있었겠습니까? 그 어떤 경험이나 지식으로도 감당하지 못하기에, 오직 공포에 찌들어 죽어갈 뿐입니다. 당연히 몸뚱이나 가족이나 명예
사불수행은 내 마음 비추는 거울 늘 웃는 부처님 그리려 마음수행 “보살님, 부처님이 절에만 계신답디까? 보살님 집에 부처님이 넷이나 있고 보살님 안에도 부처님이 또 한 분 있는데 날마다 이렇게 절에만 오면 집에 있는 산 부처들은 어찌 합니까?” 절에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짓는 게 일상이었던 내게 이 한마디가 나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20년 넘게 동고동락한 시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적막함과 누추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부처님을 마음의 도피처로 여기고 날마다 절에 가서 공양간 설거지를 돕고 법당 청소며 화장실 청소, 도량 청소를 하면
태국 남부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원이 없다. 다만 70 여년 전에 한 비구에 의해서 창설된 숲속의 수행도량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해탈의 정원’이라는 의미의 수안 목(Suan Mokkh)이다. 필자는 1995년 12월 19일에 남부의 수랏 타니(Surat Thani)의 차이야(Chaiya)에 있는 수안 목을 방문하여 조사한 적이 있었다. 아찬 붓다다사가 입적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찬 붓다다사가 수안 목에서 펼치려고 했던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찬 붓다다사 스님은 고독하고 엄격한 수행을 하면서 경·율을 연구한 후 불교개혁을 시도했다. 아찬 붓다다사(1906-1993)는 26세의 약관의 나이인 1932년에 자신의 고향에 수안 목을 창설하였다. 이곳은 아찬 붓다다사가 주장
“육체의 달콤한 쾌락 버리고 나면 “온전한 깨달음을 만날 수 있을까” 네란자라 강에서 바라본 전정각산. 오른쪽으로 세나 마을의 고행림이 펼쳐져 있다. 붓다는 이곳에서 6년간 죽음을 무릅쓰고 고행을 했다. 알라라와 웃다카 스승의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했음에도 원하는 해답을 얻지 못한 붓다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게 가르침을 줄 스승은 없는 것인가.”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은 붓다는 마가다 왕국의 우루벨라로 갈 것을 결심하고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신흥 강국이었던 마가다 국 곳곳에는 제각각 독특한 수행법을 가지고 수행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고행은 가장 인기있고, 인정받는 수행법이었다. 당시 고행을 수행의 방편으로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학림사(鶴林寺)는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도량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학이 나래펴고 날아든 형국 계룡이 날개를 펴고 승천하는 듯한 뒷산과 좌측의 장군봉과 임금봉의 위엄이 조화를 이루고, 전면의 갑하산은 학이 나래를 펴고 학림사를 향하여 날아오는 형국이다. 동남간에는 연화봉이 솟아서 제석천왕이 연꽃을 바치는 모습이며 남쪽에는 문필봉이 우백호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학림사 좌측으로 흐르는 청룡계곡에는 세속의 미진도 떨어버린듯한 청량옥수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흐르고 있다. 학림사는 지난 40여년간 수행에 매진해 온 학산 대원 스님이 지난 1986년 8월 개산했다. 대원 스님은 용성 스님의 선맥을 이은 고암 스님의 전법제자로서 현재 속세
청차는 발효과정을 가져 원하는 향과 맛이 나면, 살청하여 더 이상 발효를 막아 품질을 고정시키고 유념과 건조로 마무리하는 즉 홍차처럼 만들다가 녹차 제다공정으로 완성시키는 차다. 중국 복건성에서 처음 만들어 지게 되어 18~19세기에는 유럽에 까지 명성을 떨쳤다. 19세기 청차의 산지는 복건성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 지역이었고, 광동성 동부 및 대만에서도 생산되었다. 청차의 주산지는 복건성 남부지역인 민남(南)을 중심으로 발전되었고, 20세기 초 청나라가 멸망 후 1950년에 이르러 중국 내전으로 인해 청차의 생산은 쇠퇴하였다. 80년대에 이르러 청차의 보건작용과 더불어 매혹적인 향과 맛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어 급속히 옛 명성을 찾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차 소비 흐름은 홍차는 아
‘똑같은 차를 우려도 맛은 각양각색이다’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차는 어떤 차를, 어떤 물에, 어떤 온도에, 어떤 다기에 우려내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냅니다. 일반 차, 고급차, 중국·일본차 등 각기 우려내는 방법이 다르지만 일반적인 녹차를 중심으로 차 맛있게 우려내는 방법을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이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A 찻물 준비하기 『동다송』에 ‘차는 물의 정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니, 진수가 아니면 그 정신이 드러나지 않으며, 정갈한 차가 아니면 그 몸을 엿볼 수 없다(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莫顯其神 非精茶莫窺其體)’ 라는 말이 있듯 차를 마심에 있어 물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차를 우릴 때 가장 좋은 찻물은 산에서 천천히 흘러 내려오는 샘물이다.
삶의 통찰 번뜩이는 입문서 단문-명쾌한 그림도 일품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이 때로 한 권의 소설보다 진할 때가 있다. 이는 수행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두툼하고 어려운 수행서보다도 얇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 종종 있다. 불일출판사의 『관』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란 부재가 붙은 이 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틸포인트연구소에서 명상지도자로 활동하는 수자타 씨 저술로 86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돼 소개됐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지금까지 24쇄 째 발행하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초판 당시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수식관과 위파사나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수행입문서다. 그렇다고 무작정 방법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애끓는 절규와 통곡소리가 그치치 않는 장례식장. 그러나 내 앞엔 조문객 하나 없이 돌아가신 노인이 있다. 이 분도 분명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친지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을 텐데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홀로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지…. 멀고 외로운 길 가는데 내 염불과 부처님 말씀이 벗이 되어 주기를 다음엔 더 좋은 곳에서 태어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나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죽은 이의 몸을 씻기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인 수의를 단정히 입혀 극락왕생하길 기원한다. 한 달에도 예닐곱 차례씩 시체를 직접 만지는 이 일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종교란 내 일신의 평안만을 위해 있는 것이라 여겼다.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운구행렬 광경 효봉 스님은 6·25 피난길에 인연을 맺은 경남 통영의 도솔암에 머물고 계셨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동산 스님,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오월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에도 선봉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친상 이후 장례지도사 길 선택 “엄마 이제 집에 가자.” 7살 꼬마 아이는 절에 가는 길이 멀고 험하기만 했다. 아이의 손목을 낚아챈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끌고 그 고갯길을 넘었다. 어머니는 절에서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절을 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지금은 나의 일상이 된 염불과 절.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선사에 발을 디딘 게 불교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죽은 이들을 염해주는 독특한 직업을 갖게된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겠지만 고단한 어머니 삶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구원의 빛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불심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덕에 나는 자연스레 불자가 되었고 보림청년회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