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은사에서 남쪽으로 약 23km 떨어진 창안취 왕좡샹[長安區王莊鄕]에서 종남산의 천자욕(天子峪)을 따라 오르다 보면, 초입 마을 길가에 아주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 나타난다. 단지 한 동의 건물만 남아있어, 언뜻 보면 오래된 민가처럼 보이는 이 건물엔 거대한 은행나무가 그 옆을 지키며 이곳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이 초라한 건물의 현판에는 ‘백탑사(百塔寺)’란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사찰임을 알려주고 있다.백탑사의 명성은 단 하나의 인물로 대표된다. 일찍이 이곳은 수많은 탑이 운집한 곳이었고 그 탑들은 바로 삼계교(三階敎)
“중생이 생사의 바다를 오래도록 떠도는 이유는 실로 계율이라는 공덕의 나룻배가 없기 때문이다. 계율의 나룻배를 타고 자비의 노를 젓는다면, 반드시 풍랑을 헤치고 멀리 피안에 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가르침이 많더라도, 한결같이 계율을 행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나갈 때는 반드시 문을 통해 나가는 줄 알면서, 어찌 이 계율을 통해 나가지 않는가?” (‘광홍명집’ 계공편 서문)종남산 줄기의 중앙에 자리한 용담희수풍경구(龍潭戱水風景區)의 차도를 따라 구비구비 오르다 보면 길 바로 옆에 산문(山門)이 보인다. 사찰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자은사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천년고찰 흥교사(興敎寺)가 자리하고 있다. 흥교사의 가치는 이곳에 모셔진 현장법사(601~664)와 원측(圓測, 613~696), 규기(窺基, 632~682) 등 법상종 3조의 사리탑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 분이 원적하신 곳은 모두 흥교사가 아니며, 이곳에 모셔진 시기 또한 다르다. 그 배경에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세 인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얽혀있다.현장은 인도 나란타사에서 미륵-무착-세친에 뿌리를 두고 호법-계현으로 이어지는 유식학을 공부하였다. 범본 경전을 가
‘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따르면, 몰래 국경을 넘은 현장법사가 험난한 서역으로의 여정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에 빠졌을 때마다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명호와 ‘반야심경’에 의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항간에 전해졌던 현장이 어느 촌부를 구제하여 그로부터 ‘반야심경’을 얻고, 그 후로 항상 독송했다는 설화는 현장이 260자로 축약하여 새로이 번역한 ‘반야심경’의 수승함과 대중성을 방증한다.현장법사는 대안탑의 건설을 직접 기획·감독하고, 또 몸소 벽돌을 나르며 축조 현장에 참여했다. 대안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으로서 시현
당나라 정관 22년(648)에 태자 이치(李治, 훗날 고종)는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황후를 추념하며 옛 절터 위에 13개 원(院)에 1897칸의 방을 갖춘 대사찰을 세웠다. 이곳이 현재에도 시안시 남부에 남아있는 대자은사이다. 사찰명을 “대자은사(大慈恩寺)”고 하였으니, 곧 자애로운 어머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자은사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정관 19년(645)에 현장(玄奘) 법사가 17년간의 서역 구법을 마치고 장안에 돌아왔다. 떠날 때는 노쇠한 말 한 필에 의지한 채 혈혈단신으로 몰래 국경을 넘는 신세였지만,
초당사에는 중국불교사에 있어 중요한 또 다른 고승의 행적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대웅전 앞 양측에는 각각 비석을 안치하여 초당사에서 활약했던 두 스님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그중 우측의 비는 청대 용정12년(1734)에 황제가 사찰명을 ‘성은사(聖恩寺)’로 개명하고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僧肇, 384~414)의 행적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좌측의 비는 규봉 종밀(圭峰 宗密, 780~841) 선사가 입적한 지 15년 후에 당대(唐代)의 명재상이자 명문가였던 배휴(裴休)가 명문을 쓴 ‘규봉정혜선사비[唐故圭峰定慧禪師碑]’이다. 종밀은
역사상 최고의 역경승을 꼽자면 단연 구마라집 삼장(343-413)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번역한 유려한 문체의 경전들은 이후 동아시아 불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수많은 역경 불사는 대부분 장안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시안에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그의 숨결을 유유히 전하는 사찰이 남아있으니, 바로 초당사(草堂寺)이다. 초당사는 시 중심에서 서남으로 약 35km 떨어진 후이취(鄠邑區)의 읍내에 자리한다. 산문(山門)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삼론종조정(三論宗祖庭)”이란 비문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구마라집을 비조로 하는 삼론종
안식국(安息國·Parthia, BC 240~AD 226)의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안세고는 득도 후 여러 나라를 유행하며 홍법에 힘썼다. 그가 언제 중국 땅을 밟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출삼장기집’의 기록은 후한 환제(147~167년 재위) 초에 장안에 입성하였다고 전한다. 안세고는 그로부터 약 20여 년간 장안에 머물며 35부 41권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후한 명제(57~75년 재위)가 꿈에서 부처님의 상호를 뵌 후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낙양에서 맞이하여 백마사를 세우고 ‘42장경’을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진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