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진, “융불의 저술이다”주장에 김상현, “법륭 저술을 범체가 기록” 반박 중국 화엄종의 2대인 지엄(智儼)이 『화엄경』의 요체로 제시한 십구(十句)를 풀어 쓴 『십구장(十句章)』을 접한 고려 초 고승 균여(923∼973)는 고민에 빠졌다. ‘중생을 위해 모든 경전을 쉽게 풀어 쓰겠다’는 발원을 세운 그로서는 『화엄경』의 핵심내용이 담겨져 있는 『십구장』을 누가 썼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 『십구장』의 여러 이본(異本)들이 있었고 저자에 대해 많은 이설(異說)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따라서 균여가 『십구장』의 저자를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균여는 『십구장』을 쉽게 해설한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를 저술하면서 여러 이설들을 검토했고 당시 존
고유섭 등 “미륵사지∼, 목탑에 더 가깝다” 주장 윤무병 등 “정림사지∼, 사비시대 초기 건립”반박 현존하는 백제의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이 두 불탑(佛塔)은 한국 석탑의 기원(起源)을 알려주는 단서로 미술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돼 왔다. 불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찰의 중심에 건립하는 것으로 불교가 전래된 초창기에는 목탑(木塔)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목탑은 재료의 특성상 유지관리가 힘들었고 이에 선조들은 탑을 건립함에 있어 새로운 양식을 시도했다. 즉 탑의 재료를 목재에서 석재로 바꾼 것이다. 백제 사비 시대(538∼66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중간 양식으로 한국 탑 양식의 변화를 고
역사학계, “중앙집권제 강화 위한 이념”주장 불교계, “연기법 강조한 대승불교 핵심”반박 신라 의상(義相, 625∼702)에 의해 막이 오른 한국 화엄사상. 이후 화엄은 한국불교사상의 근간이 되어왔다. 특히 개체와 개체 또는 개체와 전체사이의 조화와 평등을 강조하는 원융(圓融)과 중생제도를 강조하는 보현행원을 핵심 사상으로 하는 화엄 사상은 신라 중기 이후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이념적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몇몇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의상의 화엄사상은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립시키는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후 화엄사상은 논쟁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단국대 김문경 교수는 “화엄 사상은 일심(一心)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統攝)하는 것으
진찬(眞撰) 두고 韓·日 30년 논란 '가택설' 주장에 "사상적으로 원효의 것" 반박 신라 정토사상을 이해하는 지침서로 알려져 있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의 진짜 저자는 누구일까. 1960년대 이전까지 학계에서는 『유심안락도』가 『무량수경종요』, 『대승기신론』과 함께 원효의 대표적 저술로 믿어왔다. 이는 『유심안락도』의 전반부에 『무량수경종요』의 문장이 상당수 인용돼 있을 뿐 아니라 일본 승려 장서(長西, 1184∼1128)의 『정토의빙경론장소목록(淨土依憑經論章疏目錄)』에서도 『유심안락도』가 원효의 저서로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4년 5월 경주에서 원효의 입적(入寂) 연대가 686년으로 기록돼 있는 ‘서당화상탑비’(誓幢和上塔碑)가 발견된 이후 이에 대한 연구가 뒤따르면서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2일 오전 8시 25분 전격적으로 정토회관을 방문, 지율 스님을 만났다. 법장 총무원장 스님은 도법 실상사 주지 스님과 함께 총무부장 무관 스님, 기획실장 여연 스님, 사서실장 심경 스님 등 종단 집행부 각 부-국장 스님 등을 대동하고 정토회관을 찾았다. 지율 스님을 만나기에 앞서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과 약 20분 가량 환담한 법장 스님은 "타협이나 조건으로 (지율 스님의 단식을) 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만 정부에 대해서는 개발 정책이 인간을 잘 살고자 함이 목적인데 인간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판에 경제성이나 효율성 만을 거론 하는 것이 타당한지 묻고 싶다"고 따끔히 충고했다. 법장 스님은 환담 후 지율 스님이 거처하고 있는 정토회관 3층 염
최연식, “금나라 정언의 저술” 주장 김방룡, “사상적으로 보조 作” 반박 2000년 이전까지 불교학계에서는 한국 선서(禪書)의 백미(白眉)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진심직설』의 저자가 보조국사 지눌이라는 점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2000년 6월 당시 서울대 강사 최연식 박사는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재고찰’이라는 논문(「한국도서관·정보학회」31권 2호)을 통해 “『진심직설』의 저자는 보조가 아닌 금나라 승려 정언(政言)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논문에서 “『진심직설』을 지눌의 저술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명판 대장경에 수록된 『진심직설』이 지눌의 저술인 『고려국보조선사수심결』의 바로 뒤에 연이어 수록되어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저술인 『계초심학인문』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치열한 불교논쟁사, 사상적 심화 이끌어 논쟁이 학문발전의 자양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객관적인 주장과 논리적인 반박은 사상의 폭을 넓히고 학문의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비록 종교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다양한 해석과 검증은 사상의 깊이와 신앙적 틀을 더욱 견고히 하도록 한다. 이런 까닭에 2600여년 전 부처님조차 무언가를 강요하기보다 제자들과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 자신의 깨달음을 확실히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인도불교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스리랑카 등 남아시아와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면서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불교논리학파와 힌두 논리학파와의 500년에 걸친 무수한 논쟁, 티베트 불교를 성립토록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