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반지하에 음악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 살고 있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옆집 사는 친구에게 빌리러 다녔던 2015년 겨울, 온갖 괴로움이 나를 스멀스멀 감쌀 때 처음으로 절에 찾아갔다.힘든 집안 사정에 엄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에 다니던 보살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의 목적은 ‘살려주세요’였다. 보살님의 소개로 엄마를 따라 하남 검단산 중턱에 올라 주지스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피골이 상접한 나를 보시곤 “지리산에 잠시 다녀 오거라” 하셨다.질풍노도의 시기, 힙합·랩 음악에 빠져있던 나는 불교에 전혀 관심이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참나를 탐구하며 심리상담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너는 이미 ‘그것’이야”라며 “네 본성은 이미 네 안에 있어. 네가 그것을 인정하고 참나로 살면 돼”라고 말했다. 그동안 내면 밖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과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내 마음가짐에 있었다. 친구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보듬어주자 햇살에 서리가 녹듯 내 마음속에 꽁꽁 얼어있던 감정들이 녹
진짜 나로 살게 된 이야기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불자인지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절에 가서도 불상 앞에서 삼배를 올리기보다 사찰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산책을 즐긴다. 사찰보다 산과 들의 자연에 더 경외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자 했지만 아직 어렵게만 느껴진다. 청소를 하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처님의 제자처럼 나도 쓸고 닦으며 수행하는 편이 더 낫겠다 싶다. 스님들을 만나면 존경심은 들지만, 어린아이나 욕심 없이 웃는 노인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니 내가 불자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 같아서
대학교 4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학생회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자치회의 성격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에 학생회장에 도전하는 해였다.학교에서 미얀마 수행 프로그램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또 냉큼 지원했다. 쉐우민센터에서의 수행 프로그램은 마치 대학교 같았다. 한국 고엔까 프로그램은 체계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다함께 모여 수행했지만 쉐우민센터 프로그램은 기본 정보만 제공해주고 알아서 수행하라고 했다. 굉장한 자유에 놀라 처음엔 주춤했지만 주변 어른들의 모습을 따라하며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쉐우민센터 주지 우 떼자니야
살면서 종교를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어난 환경도 영향을 미치지만 삶의 고난과 역경이 닥쳐올 때 단순히 의지하고 싶다거나 삶에 대한 의미, 목적을 발견하고자 종교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 일타 큰스님의 일대기를 읽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근이 송연해지는 경험을 한 후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나는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보자'며 스님이 될 결심을 했다. 부지런히 새벽예불을 올리던 어머니를 삼남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다닌 경험과 불교에 대한 탐구열로 가득했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서인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지금의 나는 10년 전과 많이 다르다. 짜증이나 화가 나면 꾹 참고 혼자 삼켜버렸기에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앓이 할 때가 많았다. 혼자 울거나 기도하며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이전에는 상대방의 화가 내 가슴 깊이 들어왔지만, 꾸준히 마음을 다스리며 참선 수행한 결과 그 화들이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한다. 참선을 통해 찾아온 마음의 고요함이 화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참불선원에서 동안거 100일 수행을 회향하며 누군가 내게 쏜 화살이 내 앞에서 멈추고 떨어지게 할 수 있게 됐다. 이 염력은 바로 자비심이다. 누군가 내게
외국에서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탓에 절에 다닐 기회가 없었다. 가끔 새벽에 ‘천수경’을 독송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유일한 불교 기억이다. 부처님을 처음 마주한 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다. 집에 있던 어느 책 속에서 발견한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엽서. 온화하고도 평온한 미소를 짓고 계신 부처님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당시엔 불심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가끔 부처님 엽서가 떠오를 뿐이었다.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에 돌아와서야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집안과 연이 있던 한 암자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절에 다
평소 사찰을 좋아해 가끔 절에 놀러 가곤 했다. 그러다 친구의 권유로 불교에 입문하고 도심포교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기도, 사시기도 등에 꾸준히 참석하며 경전 읽는 법을 배웠다. 시간만 나면 도반들과 이절 저절 기도하러 다니며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혼자서도 매일 날이 새기도 전에 절 앞에 가서 기다리다 기도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반들과 순천 금전산 금강암에 방문했다. 꼭두새벽부터 출발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금강암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쑤셨지만 부처님을 보러 간다는 기쁜 마음
12년 전, 김열권 법사를 처음 뵜을 때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도를 받으며 수행하던 중 명상에 몰입해 몸이 사라지는 듯한 현상을 체험했다. “아, 알아차리려 하니 이런 현상도 오는구나”일상 속에서 오온을 관찰하는 습관이 들도록 노력했다. 오랫동안 수행에 집중해 오온의 현상을 알아차리니 이때까지 내 몸이라고 했던 것들은 6근(눈·귀·코·혀·몸·마음)을 통해 들어오는 마음 작용에 불과했고 지, 수, 화, 풍의 요소들이 몸의 곳곳에서 단단하고 거칠고 무겁고 부드럽고 매끄럽고 가볍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의
스무살 무렵 어머니를 따라 구인사에 가게 됐다. 당시 충청북도 제천에서 단양 구인사까지 가려면 배에 버스를 싣고 강을 건너가야 했으나 그날은 한겨울 추위에 강이 얼어붙어 배를 운행하지 않아 밤새 걸어가야만 했다. 너무 힘 들고 추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힙겹게 구인사 일주문에 들어서자 갑자기 무거웠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며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을 하자 불교에 관심이 생겨났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불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불일암에 계셨던 법정 스님을 찾아가 스님께서 주신 차를 마시기도, 어머니와 같
대비주 7일7야 기도가 있을 때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용맹정진하는 7일7야 기도에 꼭 한 번 동참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마침 손가락 결절종 수술로 병가를 내 4일간 동참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 앞에 바짝 붙어 앉아 기도했다. ‘관세음보살님. 이 기도를 꼭 회향하고 싶습니다.’ 저녁 기도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데 직장 상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술 부위가 다 아물지 않았을 테니 며칠 더 쉬어도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하다. 관세음보살님이 나를 늘 지켜보시고 도와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안정되니 생활
어린 시절, 시골 작은 마을 교회 권사님이던 동생 친구의 어머니가 일요일마다 동생과 나를 교회로 데려갔다.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기 힘들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다녔다. 그러다 1992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휴거 사건 덕분에 교회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어머니를 따라 몇 차례 절을 찾아다녔다. 2003년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위해 상경했다. 여러 직업을 거쳐 서울 시내 대형호텔의 연회부에서 일하게 됐다. 서비스직이 성향에 잘 맞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나고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