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거사님이 종무소에 명함을 두고 갔다고 합니다. 들어보니 20대 초반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천도리에서 군대 생활을 함께하던 한 달 후배였습니다. 근 30년 넘어서의 연락에 바로 전화하진 못하고 며칠이 지난 뒤 통화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에 배운 경험도 기억납니다. 요즘 인플레이션이 온다고 다들 걱정입니다. 곧 물건이 부족하고 생필품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분위기입니다. 지금 상황에 옛 군대 시절을 대입하니 ‘경제는 심리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저와 후배
우리는 보통 경제적으로 풍요롭거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호의를 받는 사람을 두고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고 말한다.살기가 빠듯하지만 곁을 돌아볼 줄 알고 버거워하는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은 “배울 것이 많은 분이다”하고, 어떤 사람은 “아이고~, 본인처지나 살피지~”라며 염려 섞인 말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가치관은 각양각색이고 살아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이다.지인 병문안을 다녀온 후 나는 내가 여전히 걸어 다니는 것에 감사하고 내 삶의 질서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음에 다행이라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대처하는 것이 연기적 삶이고 부처님 제자다운 삶입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낡은 철학이나 관념, 제도 등에 얽매인다면 불행한 사람이 생길 뿐만 아니라 더 좋게 성장하지도 못하고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기회를 잃기도 합니다.전통적인 것은 다 낡고 불필요하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것 중에 그런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것은 다 좋은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새로운 것 중에는 전통적인 것보다 더 해악을 끼치는 것도 있습니다.전통적인 것을 보수라 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진보라
새벽 목탁소리가 참 좋습니다. 상단예불을 마치고 중단에 ‘반야심경’ 독송을 하는데 불현듯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하는 대목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요 며칠 일렁이던 마음이 쉬어집니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로 사는 혜택이구나 싶습니다.불청객 같은 그 마음 안에는 상처받은 나와 상처를 준 상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내 선한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 섭섭함과 슬픔이 있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분노도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더 이상 관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음에도 한번 씩 찾아드는 그 마음은
자다가 눈이 뜨입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나 봅니다. 불을 켜기 전 휴대폰을 찾는 저를 봅니다. 뭔가 아니다 싶어서 손이 가는 것을 멈춥니다. 불을 켜보니 휴대폰이 작고 예쁘게 보입니다. 어제 껍데기를 벗겨 두었더니 자유롭고 가볍게 잘 잤나 봅니다.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원래 아주 얇고 가벼운 모습이었는데 카드를 넣으려고 덮개를 씌우고 깨지지 않게 하려고 보호막을 입혔더니 두 배 이상 커지고 무거워졌습니다. 가볍고 얇은 본래 모습에 나의 필요와 욕심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
부처님오신날에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실행하던 분도, 평소 종교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던 분도 사찰을 찾아 희망 담은 연등을 켠다. 도량에 주렁주렁 달린 아롱다롱 울긋불긋 연등에는 어떤 고운 마음들이 담겨 있을까? 나는 지금도 몹시 궁금하다.두껍게 늘어진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듯, 등불은 어둑어둑한 세상을 밝힌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혜를 등불에 비유한다. 완성품이 나오기 전에는, 솜씨 가진 분들이 대나무와 철사를 이리저리 구부려 탑, 종, 북, 팔각 모양 틀을 만들면, 우리는 등 틀에 한지나 노루지를 붙이고, 그 위에 오색 습자지
착한 사람이 부자가 아닌 것은 받아들이겠는데 악한 사람이 부자로 사는 것을 보면 너무 불쾌합니다. 과연 인과는 있을까요? 인과가 있다면 악한 이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세상일은 서로 맞지 않아 보입니다. 기대가 잘못된 걸까요? 세상이 불합리한 것일까요?인과의 법칙은 연기법의 의거합니다. 연기법의 기본 정의는 ‘잡아함경’에 나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
순간이었다. 꺾인 발의 모양이 낯설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보니 발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갖 상식을 동원해 얼음찜질을 하고 심장보다 높이 두며 정성을 다했지만 걸을 수가 없었다. 발등 뼈가 부러진 것이다. 단 몇 걸음의 거리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계단이 큰 산처럼 느껴졌다. 작은 움직임에도 퉁퉁 붓는 탓에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늘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순간 불안이 올라왔다. 존재조차 몰랐던 인터넷 골절카페를 드나들며 위로받았다.
오랜 도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서 안부 전화를 해봅니다. “괜찮아요. 혼자 푹 쉬는 시간인데요. 많이 아프진 않아요.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돌아오는 대답은 스님답습니다. 늘 스님들은 혼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고 혼자가 되는 것이 처음 출가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바쁘게 살던 사람이 나이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스님들의 고향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인간이라면 모두 홀로 이 세상에 왔다가 갈 때도 홀로 가게 됩니다. 그때 따라오는 감정이 외로움이고 쓸쓸함입니다. 또, 아쉬
바람결은 아직 차가운데 겨우내 흙속에서 숨을 죽이던 풀들은 기지개를 쭉 켜며 봄 맞으러 나온다. 덩달아 내 일손도 바빠져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제멋대로 여기저기 불숙불숙 땅을 비집고 나와 너풀너풀 자라는 풀을 없애야 해서다. 시골 아닌 시골로 들어온 덕에 맑은 공기는 덤이지만, 들여야 할 품은 배다.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방해받지 않고 홀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 산 아래 자그마한 마을로 들어왔다. 마당을 세면으로 포장하자는 권유도, 마당에 돌이라도 두껍게 깔아야 풀이 덜 나온다는 조언도 연신 뒤로하고 잔디를 심었다. 그런데
봉사자도 많고, 공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 때는 황룡사가 시끄러웠습니다. 불자님들이 서로 갈등하고, 절 운영에 대한 불만도 있고, 단체끼리 알력도 생겼으며, 처음 오는 불자들은 기존 불자들의 텃세에 불만도 상당했습니다. 기도나 봉사하러 왔다가 상처받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종종 들렸고 이 사람이 오면 저 사람이 가고, 저 사람이 오면 이 사람이 가는 등 포교당 특성상 여러 일이 복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조용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상적인, 화합이 잘되는 사찰이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과학의 진보에 따른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일상에 놀라운 유익을 주었지만 반면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들 또한 만들어냈다. 지금 세계는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협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떻게 해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첨단무기들에 인류가 더이상 희생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절망과 분노가 아닌 상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외부의 평화는 내면의 평화 없이 불가능하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이기심과 증오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