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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 천막법당 안에선 어떤 일 있었나

인간 한계 넘나드는 90일간의 험난한 여정

일교차 30도 넘는 열악한 환경서도 하루 한 끼에 14시간 정진
20일 남겨 두고 곡기마저 끊고 장좌불와 용맹정진으로 회향

9명 스님들이 위례천막결사를 회향까지는 숱한 난관과 마주해야 했다. 난방시설이 일체 없는 천막법당에서 매서운 추위와 맞서야 하는 열악한 수행환경에다 하루 한 끼에 14시간 이상 정진해야 하는 엄격한 청규까지…. ‘어떤 안락함도 구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기로 시작된 결사라지만 지난 3개월은 하루하루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고된 여정이었다. 상월선원 총도감 혜일 스님을 통해 위례천막결사 3개월의 과정을 돌아봤다. 편집자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말라버려도 좋다, 가죽과 뼈와 살이 녹아버려도 좋다, 어느 세상에서도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에서 죽어도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 부처님 저희의 맹세가 헛되지 않다면, 이곳이 한국의 붓다가야가 될 것입니다.”

지난해 11월11일, 부처님께 고하는 굳은 다짐으로 위례천막결사가 시작됐다. 수많은 대중들의 응원과 걱정을 뒤로하고 상월선원 철문은 굳게 닫혔다.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진 철문은 해제 때까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고, 혹여 중도에 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조계종에서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사 대중들은 막다른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다.

입재 이튿날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초겨울 찬비는 12일에 이어 15일, 17일에도 이어졌다. 겨울비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결사 대중들과의 유일한 소통창구였던 공양배식구에서 쪽지가 전해졌다. 천막법당 내부로 비가 샌다는 내용이었다. 20여일 만에 서둘러 천막법당을 지었기에 벌어진 사단이었다. 법당 내부로 통을 집어넣어 비가 새는 곳에 받치게 했고, 빗물이 고인 곳은 걸레로 닦아내도록 했다.

대형 비닐로 천막법당을 덮어 임시로 보수했지만 엉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결사 대중들은 더 이상 이렇다 할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겨울비가 그치자 본격적인 추위가 엄습해왔다. 산자락 인근 공사장 허허벌판에 위치한 탓에 상월선원 체감 온도는 상대적으로 더 낮았다. 찬바람이 몰아칠 때면 손발이 꽁꽁 얼어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때까지도 천막법당 내부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11월28일부터 상월선원 천막법당과 똑같은 조건을 갖춘 체험관이 운영됐다. 일반대중들의 체험담이 하나둘씩 전해졌다. 천막법당 내부의 낮과 밤 기온은 극과 극이었다. 낮 기온은 영상 20도를 훌쩍 넘겨 땀이 흐를 정도였지만, 해가 지는 오후 5시가 넘으면 기온이 급강하했다. 새벽 무렵에는 온도계가 영하 10도를 가리켰고, 환풍이 되지 않아 지독한 습기가 지친 몸을 더욱 무겁게 할 것임이 분명했다. 소량의 음식에 하루 14시간 씩 정진해야 하는 결사 대중들이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이었다.

12월7일 천막결사 외호대중들이 신도들과 함께 철야정진을 열었다. 이날 천막법당에서 또 쪽지가 나왔다. 외호대중들의 철야정진 소식을 접한 결사 대중들이 자신들도 철야정진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철야정진 때마다 함께 하겠다는 내용도 보내왔다. 결사 대중들의 정진의지가 새삼 놀라웠다.

삭풍의 기세는 날로 거세졌다. 천막법당 내부에 설치된 간이화장실 수도가 얼어버렸다. 결사 대중들은 하루하루를 혹독한 추위와 씨름하고 있을 결사 대중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상월선원 주지 원명 스님(봉은사 주지)이 “이러다간 자칫 큰일이 생길 수 있다”면서 방한조끼를 구해 전달했다. 그러나 결사 대중들은 한사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양배식구를 통해 방한조끼가 그대로 되돌려 나왔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에서 죽어도 일어서지 않겠다”는 맹세가 허언이 아니었다.

기해년이 저물고 경자년이 밝았다. 동안거 결제가 이미 반환점을 돈 상태였다. 야외에서 마주하는 추위는 뼛속을 파고들었다. 천막법당에서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결사 대중 가운데 두 분의 스님이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급격한 체력저하에 따른 위급한 상황이었다. 의료진이 서둘러 도착해 비상대기했다. 의료진이더라도 천막법당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묵언정진하는 결사 대중들의 진료는 종이에 글을 쓰는 문진 형태로 이뤄졌다. 다행히 의료진의 긴급처방으로 스님들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90일간 위례천막결사를 진행한 9명 스님들이 2월5일 철야정진을 끝으로 죽비를 내려놓았다. 이어 2월6일 해제를 하루 앞두고 기록용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상월선원 제공
90일간 위례천막결사를 진행한 9명 스님들이 2월5일 철야정진을 끝으로 죽비를 내려놓았다. 이어 2월6일 해제를 하루 앞두고 기록용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상월선원 제공

스님들의 정진은 계속됐다. 결사 대중들을 응원하는 외호대중들의 기도소리도 차츰 높아졌다. 동안거 해제를 20여일 앞두고 결사 대중들은 다시 극한의 정진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하루 한 끼의 식사마저 마다하고 두부 4쪽, 방울토마토 3알 정도만을 요청했다. 외호대중들은 숙연해졌다. 동시에 엄동설한에 단식에 가까운 식사로 견뎌낼지 근심이 깊어졌다. 결국 천막법당에서 비상벨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스님 한 분이 의식을 잃었다. 응급차가 도착했다. 의료진은 “이 정도라면 아주 심각한 상태로 대중들을 응급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의료진 도착과 더불어 의식을 회복한 스님은 의료진의 진료를 거부했다. 오히려 외호대중을 향해 “의료진을 불러 수행하는 데 방해하지 말라”는 결기를 드러냈다.

1월30일 회향을 앞두고 마지막 용맹정진을 단행했다. 2월5일까지 참선을 하며 눕지 않는 장좌불와로 결사의 마지막을 회향하겠다는 각오였다. 서슬 퍼런 결사 대중의 정진의지에 외호대중들도 용맹정진에 동참했다. 한동안 주춤하던 혹한이 맹위를 떨쳤다. 천막 밖은 영하 15도를 밑돌았고 천막법당 안도 수은주가 영하 10도를 가리켰다. 그렇게 한파와 더불어 혹독한 용맹정진의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2월5일 천막법당에 전달됐던 장군죽비가 다시 되돌아 나왔다. 용맹정진을 무사히 회향했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2월7일 오후 1시30분 굳게 잠겼던 상월선원 천막법당의 문이 마침내 활짝 열렸다. 90여일간의 지난했던 상월선원 천막결사도 그렇게 회향됐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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