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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카디타 세계대회 개최기념 특별기고] 2. 샤카디타의  시작

암담했던 비구니 삶…각국 불교학자·수행자 집결해 여성 권리 논의 

지원·교육 없는 세계 비구니 현실
함께 모여 개선 논의하려 뜻 모아

“급진적”이라는 비난 편지 받기도
달라이라마 “긍정적” 평가에 큰 힘

87년 보드가야 첫 회의 천여명 동참
‘붓다의딸들’ 설립은 기적같은 일

1987년 인도 보드가야에서 처음 열린 세계여성불자회의(위 사진과 흑백 사진들)에는 1000여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결성된 ‘샤카디타(붓다의딸들)’ 세계대회는 이후 한국을 비롯해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호주 등 전 세계에서 순회 개최되고 있다. 
1987년 인도 보드가야에서 처음 열린 세계여성불자회의(위 사진과 흑백 사진들)에는 1000여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결성된 ‘샤카디타(붓다의딸들)’ 세계대회는 이후 한국을 비롯해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호주 등 전 세계에서 순회 개최되고 있다. 

1986년 나는 달라이라마 존자의 배려로 인도 다람살라의 불교론연구소(Institute of Buddhist Dialectics in Dharamsala)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덕분에 개인적인 학업의 목표는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인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비구니들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제공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대대수 비구니들은 가족으로부터 별도의 지원을 받지 않았으며 비구들에게 주어지는 교단적 지원도 비구니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부처님의 평등주의적 사회철학과는 달리 실제 내 주변 비구와 비구니들의 생활환경은 명확하게 대비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비구니들은 가난하게 살았다. 충분한 영양, 의료, 교육, 심리적 지원이 결여돼 있었다. 어떤 이들은 포장용 상자와 폐기 철판으로 만든 간이 숙소에서 노숙하기도 했다. 

1980년 초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이 안타까운 실상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생활환경과 지역사회의 지원 그리고 존중의 측면에서 비구와 비구니 사이에 명확한 격차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또, 다른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나는 성별 간 격차가 다른 불교국가들에도 마찬가지로 편재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아야 케마(Ayya Khema) 스님과 태국의 차슈만 카빌싱(Chatsumarn Kabilsingh)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특히나 관심을 기울였다.

어느날 다람살라의 진흙 움막집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미국인 비구니 컨척(Kunchok)과 나는 불교계 여성들을 모아 이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어떨까 하며 같이 의견을 나눴다.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성지이자 유명한 순례지이기도 한 보드가야가 그 최적의 장소라 생각했다. 이러한 모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아야 케마와 차슈만에게 전하자 그들은 인도에 살고 있는 내가 그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막상 회의를 조직하려니 막막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고, 회의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전혀 없었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전화 통화료도 매우 비쌌으며, 우편물을 통한 교신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조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에 나는 그 역할을 담당하기로 했다. 무척 오래된 브라더(Brother) 타자기를 이용해, 나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이 있을 법한 사람들의 주소를 색인 카드에 타이핑해서 신발 상자에 알파벳 순으로 정리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샤카디타 이메일 목록의 시초였다. 나는 초대장을 출력해 그것을 전 세계로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우편을 주고받는 일은 각각 한 달씩이나 결렸고 심지어 그마저도 분실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찔끔찔끔이라도 답장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우리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비구니들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논의하고 싶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몇 십 명 정도가 사적으로 모여 각자의 경험을 비교하고 이야기 나누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개회식에 무려 1000명 이상이 참석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초기부터, 우리는 회의에 대해 포용적인 접근을 선택했다. 성별, 사회적 지위, 종교적 입장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음을 뜻했다. 아야 케마 스님은 “논의의 주요 주제가 불교계 비구니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했다. 이는 비구니들의 삶의 처지가 그만큼 암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첫 모임이 모두에게 열려있되, 비구니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그때 나는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숲 쪽에서 강한 텍사스 억양을 가진 사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도와주세요! 길을 잃었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그 목소리를 따라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미국인 여성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야맹증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호텔로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었다. 그 후 그 일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 여성을 매클로드 간지(Macleod Ganj)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엘다 하틀리(Elda Hartley)였고 코네티커트(Connecticut) 출신의 영화감독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우리가 기획 중인 회의에 대해 알려주자, 그녀는 그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회의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돈을 갖고 있는지 물은 후 “한 푼도 없다”는 나에게 회의 구성을 위해 쓸 5000달러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때 나는 집세 5달러를 내는 것조차도 고생스러워하고 있었다. 5000달러는 그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액수였다. “당신은 저를 알지도 못하잖아요?” 내가 물었다. “전 당신을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그 비용을 충당해내지 못하면 어쩌나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선물이 되겠네요.” 그녀가 답했다. 나중에 그녀는 이 회의에 대해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했다.

몇 달 간의 바쁜 응대 작업이 지속되었고, 우리는 숙소를 예약하는 등의 기타 업무를 처리하느라 고생했다. 첫 모임이 열리기 한 달 전쯤, 나는 틸로크퍼에서 온 네 명의 비구니들과 야간열차 3등칸을 타고 48시간 동안 보드가야로 장거리 여행을 했다. 보드가야에 도착한 우리는 첫 회의 참가자들의 숙소를 제공받기 위해 버마사원(Burmese Vihar)의 주지스님이었던 반테 우니네이다(Bhante U Nyaneinda) 스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에는 ‘불교계 여성들을 위한 회의’라는 것 자체가 급진적이라 여겨졌다. 어떤 이들은 이를 위협적이라 여기기도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익명의 편지들을 받기도 했다. “당신은 이 일을 왜 하는 겁니까?” “당신은 비구들과 경쟁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당신의 배후가 누구입니까?”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은밀한 ‘페미니스트적 문제의식’이 있어서 불교에 위해를 가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지스님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우리의 뜻을 지지해주었고, 우리는 사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회의를 준비하던 어느 날 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 3시였다. 문을 열자 나는 작은 옷 보따리를 들고 있는 간디와 같은 모습의 비구와 백의를 입은 사미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을 위해 잠자리를 마련해준 후에야, 나는 그 비구가 캄보디아계 불교의 존경받는 승려인 미국의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 사미니를 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해 여기까지 와준 것이었다. 비구와 적으로서가 아니라 동지로서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소중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인지, 우리는 회의 첫날 승가에 공양(sanghadana)을 올리자는 탁월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달라이라마 존자와 보드가야의 모든 주지스님들을 비롯해 회의에 참석하는 모든 비구니들을 초대했다. 마하보디 소사이어티(The Mahabodhi Society)가 공간을 빌려주었고, 사람들은 음식을 마련하는 데에 필요한 돈을 기쁜 마음으로 기부했다. 

많은 상좌부불교계의 비구들에게 있어 비구니와 같은 방에서 식사를 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종래의 관습을 넘어 비구니들과 같은 높이의 책상에 앉았다. 식사 후 우리는 달라이라마 존자를 접대실로 안내하고 여러 나라에서 온 진취적인 비구니들과 재가자들을 소개했다. 존자는 이 불안정한 세상 속 불법(佛法)의 귀중함을 긍정하셨고 자애로움의 상징인 어머니들을 찬탄했다. 그는 여성 인권을 긍정하며 “자신의 권리를 위해 힘쓰는 것은 올바르다”고 하였다.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비구니들이 “중심지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는 인도에서부터 티베트까지의 이동이 매우 어려웠던 까닭에 티베트에 비구니 계맥이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티베트 불교인으로서 개인적인 견해를 밝혀보자면, 이와 같은 비구니 계보가 티베트 전통의 방식으로 설립될 수 있다면, 이는 정말이지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꿈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매 아침 우리는 침묵 명상을 하기 위해 모였다. 아침과 오후에는 온갖 국가들에서 온 불교학자와 수행자들이 그들의 경험, 통찰, 그리고 고난을 공유했다. 매일 저녁 다양한 불교 전통의 기도가 마하보디사원(Mahabodhi Temple) 근처에서 지내는 비구니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간이 텐트 아래에서 이 불교인들의 다채로운 모임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 어떤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하였다. 그래서 1987년 2월16일, 우리는 샤카디타, 즉 ‘붓다의딸들’을 설립했다. 

회의가 끝나고 순례까지 끝마쳤을 때, 나는 이번 회의의 회계 내역을 검토했다. 놀랍게도, 회의의 수익과 지출은 딱 맞게 떨어졌고, 샤카디타 책자를 배부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알맞게 남아 있었다. 엘다 하틀리가 빌려줬던 5000달러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줬을 때는 정말이지 감사하기도 했고 안도가 되기도 했다.

카르마 렉셰 쏘모 스님 전 샤카디타 세계여성불교협회장

 
[1683호 / 2023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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