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2월2일 새벽. 어둠에 잠긴 남원 실상사 백장암에 수상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이 불어오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움직임은 신속하고 치밀했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2m 넘는 각목들이 하늘거렸다. 이윽고 백장암을 빠져나온 그림자들은 대나무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검은 움직임들이 멈춘 곳은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앞. 달빛을 받은 각목이 번뜩이며 하늘을 갈랐다. 기단부를 제외한 2·3층 탑신 전체가 산산조각 나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보륜(寶輪) 3개 중 2개가 깨졌다. 옥개석은 눈 속에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력을 세운 지장보살. 삭발한 머리에 석장을 짚고는, 지옥문을 통과하려는 중생들을 가로막거나 이미 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지옥 자체를 부셔 극락으로 인도하겠다는 원력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을 포기한 채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지장보살은, 관세음보살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신앙되고 있다. 이러한 지장보살이 현현함으로써 미혹한 중생들을 참회로 이끄는 모습을, 우리는 1936년 목격할 수 있었다.1936년, 지장보살상 훔쳐거액 받고 일본으로 반출소장자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물은 중앙통로에 전시된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석탑이다.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1층 목돌에 남아있는 이 탑은, 불보살과 꽃무늬 등이 빼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고, 전체적인 모습 또한 아름답게 균형 잡혀 있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탑이 원래 있었던 곳은, 그 이름으로 알 수 있듯 경기도 개풍군(현재 개성시)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였다. 경천사 십층석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우리는 한민족이 겪었던 수난과 비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국보 101호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팔각형 기단부에 배가 부른 형상의 몸체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부도의 양식이라면, 지광국사현묘탑은 사각형 기단부에 탑 모습의 몸체를 갖춘 파격적인 양식으로 조성됐다. 또한 기단과 탑신 각 면마다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들로 장엄돼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고려시대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 스님을 향한 당대의 존경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이 부도는,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00여년 동안 타지를 떠도는 기구한 운명을 겪
1928년 8월12일 오후 6시30분, 당진 영탑사에 모셔진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8각형 연꽃무늬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계시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 구도인 금동불상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다행히 범인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11일 서울 광화문 종로거리에서 붙잡혔는데, 취조해보니 전직 총독부 순사 이모씨였다. 그는 범행을 저지른 뒤 서울로 상경, 일당과 공조해 2000원을 받고 불상을 넘기려다 덜미를 잡혔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
1999년 7월, 조계종은 ‘불교문화재 도난백서’를 발간했다. 1984년 1월부터 1999년 6월까지 도난당한 문화재 가운데 불교문화재만을 검색해 수록한 최초의 백서였다. 조계종은 불교회화, 불교조각, 탑파·석등, 불교공예, 전적·경판 등 5개 분야 총 318개 유물들의 도난일시와 세부설명, 도난경위 등을 백서에 기재했다. 이는 도난당한 불교문화재를 회수하는 데 효과를 거두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실제로 백서가 발간되면서 적지 않은 도난문화재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특히 훔친 문화재가 백서에 수록됨으로써 밀거래가 어렵게 되자 자진해서
“대한민국 보물이 훼손됐는데 처리비용으로 70만8000원만 보상받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을 국민들이 이해할까요? 이건 도리에도 맞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일본 전시 위해 반출 도중항공기 진동으로 충격·파손국정조사서 변상비용 밝혀져저조한 문화재 보험가입률도2003년 9월30일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일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박물관 유물들의 보존실태를 지적하며 이와 같이 개탄했다. 김 의원이 지목한 유물은 보물 제325-1호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금동제사리기. 국립중앙박물관은 2002년 일본 나라국립박
2012년 1월, 광주 향림사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2010년 7월 입적한 조계종 원로의원 천운 스님이 남긴 유물 가운데 하나인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뒤집었는데, 창호지가 뜯긴 채 안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에 제작된 송광사 불상과 비슷하다는 전라남도 문화재위원의 말에 따라 정밀조사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향림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 54cm로 결가부좌를 취하고 있으며 어깨는 오른쪽을 노출한 통일신라시대 양식이지만 복부의 폭 넓은 주름은 전형적인 16세기 중후반 양식을 가지고 있다.불상 조사 중 도난사실 알아경찰
불상을 조성할 때 내부에 넣는 복장유물은 도난당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법회나 학술적 조사 등을 제외하고는 불상 내부를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복장유물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해 회수에 난항을 겪기도 한다. 2011년 일어난 서울 보문사 복장유물 절도사건이 이와 유사한 사례다.보문사에 잠입한 박씨 형제복장유물 훔치고 불상 버려검거되면서 경전 찾았지만후령통 유물들은 회수 못해그해 3월5일 오전 4시30분, 복면을 쓴 남자 두 명이 보문사 대웅전에 침입했다
1950~60년대는 국가지정문화재의 수난시대였다. 광복 이후 최대 미스터리라 일컬어지는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도난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수많은 국가지정문화재들이 잇따라 도난당하면서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특히 1965년 벽두에 주요 일간지들의 지면을 장식했던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75호) 도난사건은 문화재 보호에 대한 허술한 인식을 여실히 대변했던 사례로 손꼽힌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밀양교육청 조사에 의해향완 도난 사실 알려져송씨 등 일당 검거 후2차례 추가 범행 확인1965년 1월19일, 밀양교육청 이모 계장이
1989년 7월13일, 부여 무량사. 한낮의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으슥한 어둠만이 경내를 배회하던 무렵이었다. 복면을 쓴 두 사람이 인적 끊긴 무량사의 일주문을 넘어왔다. 한 명은 산소 용접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경내를 가로질러 주지실로 향했다. 이윽고 주지실 앞에 당도한 그들은 주머니에서 칼을 빼들고는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아연실색하고 있는 주지스님의 손발을 묶고 입은 테이프로 막았다. 곧이어 가지고 온 산소 용접기의 밸브를 개방하자 토치에서 불이 뿜어져 나
1458년(세조 4)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 명빈 김씨와 효령대군 등 왕실이 주도적으로 조성한 영주 흑석사의 국보 282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사진〉. 복장기에 불상 제작연도와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이 정확하게 나열돼 있음은 물론 독특한 조성 양식으로 조선 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돼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탐욕과 관리 인식 부족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잇달아 수난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들었다.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는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도난 걱정에 파출소 맡겨언론 보도로 세간의 지탄신도회장이 복장물 은닉8
2003년 5월15일 밤 10시, 국립공주박물관. 바람을 쐬러 잠시 밖에 나갔던 박모씨가 당직실로 돌아와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그렇게 20여분이 지날 무렵이었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고개를 든 박씨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의 오싹함을 느꼈다. 검은 옷을 입은 괴한 두 사람이 당직실로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청원초소를 향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괴한들의 몸놀림이 더 빨랐다. 그들은 칼과 전기충격기로 위협한 뒤 박씨의 손을 묶고 눈과 입은 테이프로 막았다. 공포에 떨고 있는 박씨의 귀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몇
1995년 1월27일, 겨울밤 깊은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순천 송광사. 암흑 속에 몸을 숨긴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내에 잠입했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푸른 안광과 하얀 입김만이 가물가물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 누구도 이들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목격하지 못했다. 국보 56호 국사전 앞에 당도하자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 순간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왔던 터였다. 이윽고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국사전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송광사는 다시 짙은 적막에 잠겼다.한겨울 야음 틈타 경내 잠입국사전에서 진영 모두
1974년 10월9일 오전 8시. 전매청 신탄진 연초제조창 직원들이 순천 송광사 종무소를 찾았다. 한글날 휴일을 맞아 사찰 구경을 하고 성보박물관도 관람할 요량이었다. 재무스님에게 열쇠를 받은 총무스님이 전매청 직원들을 안내해 성보박물관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 앞에 선 일행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바깥문이 활짝 열려 있고, 더구나 속문에 걸려 있던 주먹 크기만 한 자물쇠는 뜯긴 채 한쪽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뭔가를 직감한 스님이 성보박물관 가장 깊숙한 곳으로 뛰어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금고
‘문화재관리국 국장님께 직접 알려라. 오늘 밤 12시까지 돌려주겠다고. 이는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얕은 수작을 부리다 죽은 자식 XX 만지는 격 되지 말고. 이따 11시경에 국장께 알리겠다. 지문감정은 의뢰할 필요 없다.’덕수궁박물관서 훔친 뒤돌려주겠다는 쪽지 남겨한강철교 모래밭에 묻어놔지금까지 범인 찾지 못해1967년 10월24일 오전 10시30분, 덕수궁미술관.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제3전시실 문 밖에서 내부를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를 목격한 경비원은 온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젖어버릴 만큼 오싹함을 느꼈다. 진열
2012년 3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성철 스님의 유시(諭示) 위작이 유통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서울 종로구 소재 미술품 경매회사 운영자 K씨가 석연찮은 입수 경위를 내세우며 인터넷 경매에 유시를 올렸다는 것이다. 광역수사대는 일단 위작 유통 혐의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수사에 착수했지만 몇 가지 난관에 봉착해 더디게 진행됐다. 그 즈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보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매에 출품된 것과 똑같은 유시를 책에서 봤어요. 경매에 올라온 유시가 왜 가짜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