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1시간 이상 좌선-일상이 수행몸·마음 알아차리며 생활속 이익 실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볼 때 일어나는 탐심을 한 번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이면 노력해서 취하고 그것이 욕심이면 놓아버리라고 배웠으나, 실제로는 거의 알아차림을 놓치고 실컷 탐심을 냈다가 가지지 못해 끌탕을 하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그때서야 마음을 보니 그때 탐심이 있었네 하고 아는 식으로 계속 뒷 북을 쳤다. 이런 경험을 인터뷰 스승에게 말하니 지금이라도 탐심을 안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스승은 계속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하면 알아차리는 시간이 점차 빨라져 막 탐심이 일어날 때 알게 되고, 그래서 대상에 휙 넘어가지 않고 욕망을 조절하는 힘이 생겨 번뇌가 줄어든 생활을 할 수
깨달음 구하는 종교라는 말에 불교입문절 찾아 기도생활 10년 만에 수행 발심 사춘기 시절에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친구의 말에 교회를 다녔다. 그러던 중 19세 때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어머니를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실망감에 하느님이란 존재를 믿지 못하고 교회 다니기를 그만두었다.그러다가 대학시절 우연히 보게 된 소책자에서 ‘불교는 깨달음을 구하는 종교’라는 구절이 아주 멋있게 느껴졌다. 무조건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알기를 원했지만 마땅히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1주일 가행정진 끝에 자성염불 성취새벽 예불·염불·좌선으로 하루 시작 철야정진 참석후 적게 먹고 조금 자고 가행정진을 해보라는 스님 말씀을 따라 아기를 안고서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가행정진을 했다. 이상한 것은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와는 달리 모든 상황들이 나의 수행을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가행정진을 시작하면서 인터넷 정토선 카페도 잠깐씩 들러 궁금한 것만 보고 나가기를 일주일 정도 지난 월요일 새벽 염불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성악가의 목소리도 아니고 굵은 남자 목소리에 아름다운 음율까지. 놀랍고 기쁘고 환희로울 뿐이었다. 이렇게 정토선 1차 관문인 자성염불 단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 염불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세시쯤 된다. 예불과 염불, 좌선 등 새벽수행을 여섯시까지 하고 하
외손주 기형적 얼굴보며 삶의 의욕 상실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염불…이적 체험 여섯 형제의 맏며느리인 나는 시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연로하신 시 할머님과 어린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스물 여섯.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뒷바라지를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막내 시동생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면서 시고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 불화가 생겼다. 칭찬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참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을 주체할 수 없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부처님 전에 고달픈 삶을 맡기면 그나마 편안해졌기에 도반들을 따라 다니며 관음정근도 하고 절, 사경 등을 했다. 하지만 모든 수행이 그렇듯이 하면 좋기는 했으나 공부의 진전도 없고 생활에 지장을 주기도 해서 모
삼보법회 인연 맺으며 참선수행 시작화두참구 5년…마음여유-자비심 늘어 경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던 중 발견한 광고는 내게는 갈증을 풀어 줄 가뭄 끝 단비와도 같았다. 이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광고는 당시 풍전호텔 4층에 있었던 삼보법회에서 금강경 법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1969년 11월 어느날,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삼보법회의 금강경 법문 광고를 보고 그 길로 삼보법회를 찾아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그 인연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경 법문을 들으면서 삼보법회에서 고승 대덕 스님과 재가 선지식들의 법문을 거의 매주 빠짐없이 들었다. 처음에는 고(故) 전진한 선생님의 금강경 법문을 들었고 그 다음에는 운허 스님으로부터 능엄
교회-성당 다녀도 이렇다할 감응 없어서울서 하숙집 주인 권유로 불교에 입문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기가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불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다. 이 말에 비교해보면 나는 상당히 행운아인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 불심의 싹이 텃고 30세에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정법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어릴 때에는 동네 한복판에 있는 예배당에 이끌려 다니면서 공책도 받고 떡도 얻어먹으면서 설교를 들었지만 별로 내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 또 중학교 때에는 대구에 계신 고모님 댁에 있으면서 새벽이면 고모님을 따라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여하고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별로 이렇다 할 감응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불교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면서도 부
두살 뇌성마비 아들 잃고 28년 속앓이사경수행하며 의욕 찾고 자신감 생겨 사경을 하면서 그저 편안하기만 할 듯하던 삶이 그렇게 한 순간 편안함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나이도 먹고 했으니 좀 더 푸근한 가슴으로 세상을 보듬으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동안 해오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어 버리는 일도 종종 생겨났다. 수행을 하면서 좀 달라질 수도 있으련만,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평생지기와 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속 좁은 여인네는 감정의 깊은 골에 떨어져 그만 붓이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면 생각이 ‘에이, 사경공부 그만 둘까’하는 데까지 미치면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때 지난날의 아픈 일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야 부모님의 불교인연을 내
꿈속의 법당 현실에서 본 순간 황홀남편의 적극 지지 받으며 사경 입문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살이가 그리 평탄하지 많은 않았던 내 인생에서 이런 때가 오리라는 믿음이 없었기에, 요즘의 일상은 실로 꿈만 같다. 늦은 나이에 사경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내 삶이 평온을 얻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점점 밝아져 갔다. 나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가족 모두가 이 편안함을 함께 느끼면서 집안에서는 이전보다 더 크고 맑은 웃음소리가 자주 터져 나오고 있다. 어찌 부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의 내 기분은 정말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꼭 한번은 해 보고 싶었던 서예공부를 시작한 것은 이미 손이 굳어진 후였다. 이미 굳어져버린 손으로 용기를 내어 서예
사불은 철저한 규칙-호흡조절이 필요오전 1시간 수행이 일상의 즐거움 돼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실로 향한다. 향을 사르고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의 불화초본을 몇 장씩 먹으로 그리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불수행을 하게 된 후로 매일 아침 이런 과정을 거치며 평온한 하루를 시작한다. 수행을 하루에 몇 시간, 또는 일주일에 몇 번 하는 식으로 때를 정해서 하면 좋겠지만, 세워놓은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자책감에서 오는 피해가 클 것 같아 느슨하게 수행계획을 세웠다. 매일 어느때든 1시간씩 시간을 내어서 사불수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내게 있어서 사불수행을 하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에 나온 직후였다. 잠시 입정을 하고
불교 소재 졸업논문 통과 못해 방황친구따라 절 찾아 108배-사경수행 나는 매달 초하루면 절에 다녀오시는 어머니 덕에 불교가 친숙했고 다른 어떤 액세서리 보다 단주를 차고 다니는 것이 좋았다. 등산을 갈 때도 산사의 절을 찾아 예법도 모른 채 사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거나 스님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를 들으며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도예를 전공한 나는 그런 연유로 작업하는 내내 불교가 작업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죽고 사는 것에 관심이 많아 졸업논문으로 납골용기개발연구를 했었고, 이것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자 불교와 직접적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자료가 극히 부족한 상황이었고 젊은 여학생이 자료조사를 한다고 용미리 시립묘지나 벽제 화장장, 사찰 탑골묘 등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동안 매일 새벽에 염불수행 정진모든 장애의 실체가 ‘나’임을 깨달아 문사수법회에서 스님과 법사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나’라는 생각에 갇혀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하면서 선지식을 만나 눈을 뜬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된 것은 내 삶의 변화 자체였다. 그렇게 법문을 듣고 염불수행을 하면서 “산은 산이로되 옛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로되 옛 물이 아니로다”라고 한 옛 선지식의 말씀이 비로소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변하면서 온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염불수행을 시작하면서 3년 동안 새벽정진을 이어갔다. 목요일 새벽에 경전을 공부하는 날과 회사 일로 지방에 출장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정진을 했다.
‘변화하자’ 수 없이 다짐해도 작심삼일염불수행 후 ‘나’를 놓으면서 변화시작 누구에게나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것은 가장 큰 사건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일대사 인연이라는 명확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을 게다. 따라서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친다는 것이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사람이 불교가 무엇인지, 염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고 염불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표현으로 답변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은 바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것도 아주 혁명적인 변화라는
매일 아침·저녁 알아차림하며 수행“주변인 모두 수행의 길로 안내” 서원 여자 친구를 따라 호기심 반으로 찾았던 위빠사나 수행처는 내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첫 경험을 하고 곧바로 1주일간 집중수행코스에 참여해 수행의 문턱에 들어선 이후, 과거 무의식 속에서 행했던 내 언행과 사고가 얼마나 무모하고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수행을 배우면서 하나 하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정신적이고 육체적 현상에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림(사띠)하는 것이다. 이 알아차림에 의해 수행자는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깨닫게 되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정신적 오염원이 파괴되므로
여자 친구 따라 위빠사나 수행 입문 무지함 인식…오계 지키며 집착 탈피 그저 ‘좋다’라는 이유만으로 불교에 이끌려 스스로를 불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거기에 불교관련 책을 몇 권 읽는 정도가 다였던 내게 있어서 위빠사나 수행을 만난 것은 진정한 불자가 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느날 여자 친구로부터 명상수행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자 친구는 위빠사나 수행을 말하면서 사띠, 위리야, 빤냐 등 생소한 용어들을 나열하며 수행의 이익을 설명했다.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듣고 흘렸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를 따라 빤디따라마 위빠사나 명상센터를 찾아가 명상 스승님에게 수행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곤 그 매력에 흠뻑 취해 곧바로 일주일간의 집중수행 코스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법이 진정한 법이구나
매일아침 10분 옴마니반메훔 주력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상태 관찰 어려서 부산 범어사에 있는 사천왕상이 무서워 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울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등목에 올라 석굴암 본존불을 만지며 그 보드라움에 놀랐고, 이 다음에 커서 이런 명작을 만들어 봐야지 하는 것이 꿈이 되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 주력수행을 주로하는 진각종 심인당에는 부처님상이 없다. 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반메훔과 36대 보살들의 명호만 새겨져 있다. 어렸을 때에는 심인당에 부처님상이 없어서 친구들을 데리고 가면 사이비 종교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 대답을 하기가 꽤나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상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물을 마셔보고서야 따뜻한지 차가
어린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주력 입문강요된 수행에 ‘내가 왜 하는가’ 번뇌도 네 살 되던 해 어느 일요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진각종 심인당에 따라가 어른들 하는 모양을 흉내내 가부좌를 틀고 지권인을 한 채 저린 발을 참으려 연신 좌우로 몸을 흔들며 뜻 모를 진언을 소리 높여 염송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나면 인자한 얼굴을 한 노 전수님이 내 손에 소보로빵과 단팥빵 하나씩을 쥐어주시며 잘한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그 칭찬이 좋아서 심인당을 다닌 것이 벌써 40년을 훌쩍 넘겼다. 유년시절 알사탕에 눈이 어두워 집에 있는 희사고에서 거금 20원을 꺼내 사먹고선 배가 아파 쩔쩔맨 적이 있다. 이 때 어머니가 무엇을 아셨는지 내게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아픈 것이라 하셨고, 그 말씀에 놀라 눈물을 뚝뚝
미사여구 털어내라는 호령에 의심 소멸수행에서 나온 지혜로써 사회 회향 발원 그렇게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알려줄 스승을 간절하게 찾던 중 여름수련회를 통해 알게된 해인사 습의사 스님이 스님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백양사 운문선원장으로 계셨던 스님이었다. 스님을 찾아갔을 때 허름한 암자의 겉모습과는 달리 스님의 모습을 맑았고 빛이 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빛과 향기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은 “왔느냐” 하는 한마디 말고는 다른 말씀이 없었지만,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듯 그 한마디에서 무수한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수행이 무르익어 내뿜는 향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 마음을 뒤흔들고 지나가는지 알았다.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어린 나이에 ‘나’ 란 무엇인가 고민 부모님 반대에도 해법 찾겠다 휴학 새벽 세시. 산사의 법당에 홀로 앉았다. 범종 소리가 울리고 곧이어 법고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리고 새벽 예불을 모시기 위해 스님들이 장삼에 가사를 수하고 법당으로 모여든다. 범종과 법고 소리에 이어 스님들의 예불 소리가 저 멀리 퍼지고, 다시 법당 가운데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기어이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내 발등을 타고 흘러들어 온몸을 두드리며 속삭인다. ‘합장하지 않아도 좋으니, 쉬어가라’고 위로하는가 하면, ‘절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어서 아픔에서 벗어나라’고 걱정하기도 한다. 지난 2000년 여름. 세존과의 만남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란 무엇일까? 나란 확정된 어떤 것, 즉 도식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경전 사경하면서 가족의 태도 달라져마음·몸 반듯하게 하는 자체로 수행 사경을 하면서 ‘나도 이제 수행인’이라는 자만감은 아들을 군에 보내고 나서 그렇게 허무하게 깨졌다. 그리고 수행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래도 아들을 보낸 후의 허전함과 불안함을 달래고 가라앉히기 위해 사경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작정 사경을 하는 것보다 백일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매일 한번씩 반야심경 사경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의 간절한 마음은 아들이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무사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원을 세우고 사경을 하다보니 마음이 진정되고 망상이 변해 좋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 덕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강원도 최전방 보병으로 지원했던 아들은 3개월만에
사경하면서 수행인이 되었다고 자만 아들 입대 후 온갖 걱정… 망각 깨달아 ‘내 이제 일념으로 서원하노니 미래세가 다 하도록 오늘 사성한 이 사경 파손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붓을 놓았다. 사경이 파손되지 않기를 발원한 염원 속에는 가족의 안녕과 이웃의 건강도 함께 들어 있다. 지난 2000년 초봄이었다. 사경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작은 붓으로 글씨를 써 보자는 생각에서 사경을 시작했다. 무엇을 배우든 올바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아니면 전생이 선업을 많이 닦았는지, 다행히 전통사경을 연구하는 분을 스승으로 맞이하는 행운이 따랐다. 단순하게 작은 글씨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사경수행으로 바뀌었고, 하루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