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가 확립된 것은 우빠니샤드 사상이 등장할 무렵인, 대략 기원 전 7~6세기 무렵이다. 이 시기에 또한 기존의 바라문교를 비판하는 사문들(자유사상가)이 등장하게 된다. 불교 역시 사문종교 가운데 하나였고, 그래서 부처님도 종종 ‘사문 고따마’라고 불렸다.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다. 흔히 성직자라고도 하는데, 힌두교/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성직자라고 불릴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의 목사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불교의 스님들은 성직자라는 말이 온당치 않다. 대신
터질게 터진 것이다.‘땅’하면 복부인, 졸부, 지게 짊어진 갑부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부정적인 단어가 아닐까 한다. 고급세단을 타고 모피목도리를 두른 돈 많은 사모님, 갑자기 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우리나라가 근대화 되면서 땅이 가장 먼저 투기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때는 그저 국가가 주도해 개발하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공공연하게 고급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고위 공직자들과 지역 토호세력이 연관돼 부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개발소식이 전해지면 이미 그 지역은 모모 의
대중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흔히 ‘지도자(指導者)’ 또는 ‘리더(Leader)’라고 한다. 두 단어 모두 ‘~이끌다’라는 동사에 사람을 뜻하는 단어(者, ~er)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불교 경전에서도 지도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를 치는 사람’, 목우자(牧牛子)다.‘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9권과 제46권 ‘마혈천자품(馬血天子品)’과 ‘잡아함’ 47권 1248, 1249, ‘목우자경(牧牛子經)’에서 첫 번째는 어리석은 목우자(牧牛子)로 우기를 맞아 이쪽 강가의 언덕도 잘 살펴보지 않고 저쪽 강가
지난 3월19일 법보신문에 ‘전통사찰도 종부세 부과대상…세금폭탄 우려 확산’에 이어 24일에는 ‘정부, 종부세 부과하려 불교계 기만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번 종합부동산세 파동을 지켜보면서, “근현대불교 탄압사 다음 원고는 이승만 정권 당시의 농지개혁 문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 불교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상황에 이를 때까지 대처 방식이나 문제가 공론화된 뒤의 대책 등이 수십 년 전의 농지개혁 당시와 거의 닮았다는 아쉬운 마음을 놓기 어려웠기 때문이다.이승만 정권이 출범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1949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1991년 8월22일 도난된 후 2016년에 서울 한 개인의 사립박물관장 수장고에서 되찾았다(사진1). 발견 당시 불상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었으며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조성 발원문과 개금중수기·후령통·주서다라니·‘법화경’ 등은 따로 보관돼 있었다(사진2).해남 대흥사는 신라시기 창건된 사찰이다. 옛 이름은 대둔사(大芚寺)다. 18세기 말 서산 휴정 스님(1520~1604)의 의발(衣鉢)이 전해진 후, 이름난 고승들이 주석해 왔다. 선수행과 강학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
서구인이 자랑하는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은 물리세계를 수학을 통해 접근해서 가능했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그들은 우주를 ‘수학적’으로 보았고, 이런 형이상학적 가설은 뉴턴이 우주의 변화와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며 확증됐다. 뉴턴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붓으로 그리지 않았다. 신의 섭리나 도(道), 음양오행 또는 이(理)와 기(氣)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인간의 가장 엄밀하고 정교한 개념적 도구인 수학으로 그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성공했다.뉴턴
한평생 어린이운동에 몸 바쳐 일하는 것이 쉬운 일 아니다. 한 평생 어린이 위해 시와 동화를 창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의 아동문학 발전을 위해 월간 아동문학 잡지를 계속 내는 일은 더욱 쉬운 일 아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세 가지 일에 몸 바쳐 일하다가 한 세상을 마친 원로 아동문학가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박종현 시인(1938~2020)이다.박종현 시인은 좋은 동시집 여러 권을 남겼다. 좋은 동화집도 여러 권 남겼다. 1976년 월간‘아동문예’를 시작하여 통권 445호가 출간되었고, 등단작가 600명을 길러내었다. 역
나는 언제부터 ‘나’일까? 붉고 작은 몸을 가지고 태를 빠져나왔을 때부터 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알 수 있다. ‘나’라는 개념은 몸이 태어나고도 한참 후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항상 나인 건 아니었다. 내가 되기 전까지, 난 내 안에 없었다.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곳, 나를 제외한 모든 곳.” 그 뒤에 나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마도 처음에는 내 안과 밖의 구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머무는 곳,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곳, 나
철이 들면서부터 내 소망은 평범하게 사는 일이었다. 생활이 단순하고 작을지라도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었다. 특별나보이는 내 삶을 누구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는 일이기에 보이는 그대로 살고 싶음이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상처를 받는 그 소망을 위로해준 법정 스님의 책들.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스님의 책 한 권을 들고 길상사에 가는 길에는 무심의 즐거움이 있다.봄비 그친 길상사가 맑았다. 많지 않은 사람들 곁으로 바람만 스칠 뿐 고요했다.봄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영춘화 꽃잎 몇 개가 바람결에 떨어지더니 극락전 풍경소리가
마스크가 일상이 되어서인지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어느새 곁에 와 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 옷차림에도 봄이 왔다. 봄과 함께 마스크 없는 일상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마음이 설렌다. 요즘 우리 복지관은 무척이나 분주하다. 돌아오는 4월1일이면 문을 연지 만 20년이 된다. 복지관이 스무 살 청년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런 곳에서 어르신들은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사회참여활동을 하신다. 어르신들을 위해 영양사는 어제, 오늘 달래장을 만들어드렸다. 오랜 대체식으로 지친 어르신이
불교에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여러 방편들이 있다. 방편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나 방법이다. 이러한 방편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언어 즉, 설법이다. 언어를 이용한 설법은 중생들을 깨우치는데 필수적이다. 부처님은 설법 방편으로 수많은 중생을 가르치셨다. 세상의 교육도 대부분 언어로 이루어진다.그런데 불교에서는 간혹 색다른 방편도 쓴다. 주로 선가에서 사용한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했다는 삼처전심법, 덕산의 방망이 세례, 임제의 할, 마조의 발길질, 조주의 끽다거 등은 언어를 대신하는 방편들이다. 이외에 좀 더
參方問道別無他 只要當人直到家참방문도별무타 지요당인직도가打碎虛空無一物 百千諸佛眼中沙타쇄허공무일물 백천제불안중사(참방(參方)하며 도를 묻는 것은 별로 다른 뜻이 없음이니다만 자신의 집으로 곧바로 가기 위해서라네.허공마저 쳐부수어 한 물건도 없게 하면백 천의 모든 부처도 눈[眼] 속의 모래가 될 것이다.)이 시의 출전은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에 실려 있는 ‘송심선자참방(送心禪者參方)’에 나오는 시문이다. 산청 대원사 천광전(天光殿)의 주련 가운데 이 주련과 더불어 ‘참선절막착완공(參禪切莫着頑空)’은 서울 종로구 청룡사우화루에도 걸